마라톤기행 8
대동(大同)의 세상이여, 여립(汝立)의 하늘이여!
Y형!
늘 그렇듯이 길은 언제나 인간을 향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주시를 벗어난 1번 국도는 호남의 기름진 들녘을 두껍게 덮고 있는 겨울의 찬바람과 며칠 째 이어지고 있는 눈발을 거슬러 가며 주변의 작은 마을을 일깨워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괴나리 봇짐을 등에 메고 한가로운 들녘의 풍광(風光)을 따라 여유롭게 걸어다녔을 조선시대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4차선으로 말끔히 단장되어진 길 위에 두 발로 걸어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낍니다. 이제 더 이상 1번 국도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은 아닙니다. 그저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가는 자동차의 질주음(疾走音)만이 차디찬 겨울 바람과 더불어 나풀거리고 있을 뿐, 사람의 정(情)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여정(旅程)에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주린 배를 움켜 쥐고 찾아드는 나그네를 이빠진 투박한 그릇에 담아내는 따뜻한 국밥과 막걸리 한 사발로 맞아 주던 주막집 주모(酒母)의 정이 담긴 손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이제 낡은 세대의 마음 속에서만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삭막한 길을 달리며 인간들의 삶의 발자취를 반추(反芻)해 보는 것은 인간의 정(情)이 그렇게 쉽게는 지워져 버리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Y형!
호남평야의 너른 들녘을 내려다 보며 우뚝 솟아 있는 모악산 자락을 끼고 돌아가는 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산자락마다 업드려 있는 마을의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 금구(金溝)를 지나 원평(院平)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남아 있는, 역사와 문화의 주인공이었던 민초(民草)들의 거친 발자국 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그 가운데서도 대동사상(大同思想)의 깃발을 높이 들고, 관료들에 의해 찢어지고 갈라진 힘없는 백성들의 시린 가슴을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었던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 정여립(鄭汝立1544~1589 )의 혁명정신을 더듬어 역사의 몇 페이지를 다시 한 번 펼쳐 선인(先人)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Y형!
사금(砂金)이 많이 나서 금구(金溝)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면소재지를 지나면서 서해바다까지 광활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 호남의 들녘을 바라봅니다. 저 넓은 들녘에서 자신들의 뜻을 펴지 못하고 짓밟히며 살아가던 가엾은 백성들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바꿔 줄 ‘메시아’라고 믿었던 ‘정도령’을 따라 다니며 그가 펼치는 대동세상이 열리기를 꿈꾸었을 그들의 한(恨)과 곡절(曲折)이 이어진 세상살이를 생각하다가, 문득 우리 선조들은 늘 힘겨운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면서 그래도 더 나은 날을 위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봅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땀흘려 생산한 먹거리를 싸들고 정여립의 문하(門下)로 찾아 들었을 것입니다.
Y형!
정여립은 전주에서 출생하여 이율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 때 홍문관 수찬(修撰)의 벼슬에까지 오르며 조정에서 제법 입심을 발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절대왕정을 비판하고 공화정(共和政)을 주장하였으며, 임금에게도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정적(政敵)들과 부딪치게 되었고, 결국 벼슬을 버리고 처가인 금구(金溝)로 낙향하여 대동계(大同契)라는 모임을 열어, 모든 사람들이 한 데 어울려 살아가는 대동 세상을 꿈꾸다 서인(西人)들의 모함을 받아 역모의 죄를 둘러쓰고 말았던 비운(悲運)의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일 천 여명의 희생자를 내었던, ‘조선 시대의 광주항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기축옥사(己丑獄死)에 휘말려 족멸(族滅)당했던 참으로 속터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던 공화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사상(思想)은 그가 남긴 말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유비의 촉(蜀)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위(魏)로 정통을 삼아 기년(紀年)한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이를 부인하고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았는데, 후생(後生)으로서는 대현(大賢)의 소견을 알 수 없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요(堯) ․ 순(舜) ․ 우(禹)가 임금 자리를 서로 전했는데, 그들이야말로 성인(聖人)이 아닌가? 또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한 것은 왕촉(王蠋)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일 뿐,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가 아닌가?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 양(梁)나라의 임금에게 천자가 될 수 있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권하였는데, 그는 성인 다음 가는 사람이 아닌가?
Y형!
이제 저 멀리 원평(院平)이 보입니다. 전주에서 15km 정도를 달려온 셈입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나는 여립의 대동세상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원평(院平)은 여립이 펼치려 했던 대동세상의 발판이었습니다. 대동사상은 프랑스나 영국처럼 밑으로부터 치밀어 올라온 혁명(革命) 사상이었습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 정여립의 대동계(大同契)를 모반을 위한 군사 세력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Y형! 반역(叛逆)이냐 아니냐를 말하기 전에 절대 왕정의 세상에서 권력이 세습되는 사회 구조에 맞서 모든 백성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것을 펼치려 했다는 정신을 우리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Y형!
오늘 달리는 이 길은 내가 속해 있는 전주마라톤클럽의 정기 훈련 코스이기도 합니다. 전주에서 금산사, 원평, 금구를 돌아 전주까지 이어지는 35km의 코스로 적당한 오르막과 주변의 경치, 그리고 역사와 문화의 통로이기에 회원들과 더불어 정을 나누며 달리기에는 아주 그만입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혼자서 지나간 세월의 안쪽을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원평 시가지 건너편에서 말없이 서 있는 땡뫼산이 보입니다. 탐관오리들의 폭정(暴政)에 들불같이 일어났던 동학혁명의 함성을 갈무리한 채 느긋한 마음으로 호남의 들녘을 내려다 보고 있는 땡뫼산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정당한 자리매김을 위해 핏빛 어린 마음으로 발걸음에 힘을 주었던 민초(民草)들의 혁명정신을 더듬어 봅니다. 제비산(帝妃山)의 황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던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원평 들녘에서 다시 살아나 전봉준의 횃불로 타오른 것이 바로 동학사상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광주민주화 항쟁이 떠올라 콧마루가 시큰해집니다.
동학혁명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녹두장군 전봉준(全奉準)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원평은 아직도 하늘을 찌를 듯하던 그의 함성과, 그를 따르던 수많은 깃발들을 모두 거두어 땡뫼산 품안에 곱게 곱게 갈무리한 채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남아 있습니다. 땡뫼산 또한 혁명군의 주둔지에 현대식 정자를 앉혀 놓고 세월의 길목에서 아무 말 없이 이어져가고 있는 역사를 향해 달관(達觀)의 미소를 지을 뿐입니다.
Y형!
영국의 역사학자 E.H. Carr가 말했던 것처럼 역사는 현재에 발을 딛고 현재의 눈으로 바라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여립을 억울한 누명을 쓴 인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의 선구자적인 혁명정신에 초점을 맞추어 현재의 관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조선의 절대 왕정(王政)은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하루 빨리 무너뜨려야 할 독재정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동사상을 부르짖었던 그의 목소리는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반세기를 앞선 선구자로서 인민주권(人民主權)을 주장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좌절되었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또한 혁명(革命)이냐, 모반(謀叛)이냐를 가리는 것으로만 한정되어버린 듯하여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Y형!
모악산(母岳山) 자락을 따라 군무(群舞)를 펼쳐 보이던 철새떼들이 오리알터 금평저수지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내려 앉는 모습이 황혼의 붉은 빛에 젖어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 옵니다. 날카로운 바람의 끝에서 건들거리는 겨울의 노래는 균형이 잘 잡힌 몸매를 드러내고 있는 제비산(帝妃山) 꼭대기를 돌아 한(恨)맺힌 목소리로 하늘까지 치닫고 있습니다. 이제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의 집터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 제비산(帝妃山) 품안에서 모질게 파헤쳐지고 숯불로 혈맥을 끊긴 채 핏빛이 서린 눈물로,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부서진 기왓장 몇 조각과 무너진 돌담으로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혁명사상은 면면히 이어지는 역사의 줄기 속에서 항상 새롭게 피어날 것입니다.
Y형!
다시 눈발이 내립니다. 이마에 부딪치는 눈송이의 서늘한 감촉을 받으며 금구(金溝) ․ 원평(院平)을 더듬어 달리면서 나는 갑자기 역사의 한 장면을 몸소 겪은 듯한 느낌입니다. 정여립의 대동계원들이나 전봉준의 동학군이 목을 놓아 외쳤던 함성은 평등이었습니다. 어쩌면 모악산의 넓은 품에 안겨 있다고 믿었던 미륵부처를 향한 간절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다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애타는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고 살고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여 봅니다.
발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원평의 들녘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대동계 무사(武士)들이나 동학혁명군이 일으켰던 역사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지역이었다고 말하기에는 지금은 너무나 한가로울 뿐입니다. 힘날세상 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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