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7
야자수 그늘에 정(情)은 살아 있어라.
- ‘東洋最漂亮的海岸’, 海南島
Y형!
해가 떠오릅니다.
중국 해남도(海南島) 삼아시(三亞市) 해안을 박차고 솟아 오른 갑신년의 새 해가, 손을 흔들어 마음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해는 조용히 솟아 오릅니다. 동양의 하와이라는 해남도의 아침은 짙은 고요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파도에 밀려온 희미한 그리움 같은 것이 발밑을 간지럽히고 있습니다.
해안을 따라 달리기 시작합니다. 해남도 여행의 마지막 날인 새해 첫날, 온 몸을 감싸오는 통랑(通郞)한 햇살을 받으며 달리는 발걸음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만났고, 나와 같이 호흡했던 해남도의 자연과 인정(人情)이 새록새록 묻어납니다. ‘동양 최고의 해변’이라며 현란한 치장을 하고 고층의 화려한 호텔들을 세우는 망치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는 해안을 달리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와 중국인들의 삶을 떠올려 봅니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 그래서 ‘만만디(慢慢的)’라는 특유의 성격도 바꿔가고 있는 중국 사람들의 놀라운 변신을 생각하며 해남도의 풍광(風光)을 달려봅니다.
Y형!
끝없이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앞에서 스트레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달림이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니하오(你好)?” 놀랍게도 그는 중국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보조를 맞추어 달렸습니다. 나는 짧은 중국어로 대화를 시도합니다. “중국 사람들도 자주 달립니까?(中國人常常跑步嗎?)” “중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달리기를 잘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달리기를 좋아합니다.(一般中國人不跑步,可是我喜歡跑步)” ”어느 정도 달립니까?(跑得多少?)“ ” 매일 한 시간 정도는 달립니다.(每天一个多小時)“
우리는 30여분을 같이 달리면서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얘기를 나눴습니다. 해남도 검역청에서 근무한다는 그는 진실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달리기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시(詩)를 좋아한다는 그가 해안가에 곱게 단장해 놓은 작은 공원에서 떠오르는 해를 올려다 보며 읊어준 싯구절은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내 발자국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藍天連碧海 쪽빛 하늘과 이어진 푸른 바다에
日月照妝臺 해와 달빛은 정자에서 부서지는데
遊客尋覽處 나그네가 바라보는 눈길마다
波平一鏡開 파도는 거울같이 잔잔해지누나
Y형!
야자수가 둘러싸고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흙길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의 시골 마을이 생각이 나서 발길을 돌립니다. 마을은 형편없이 초라한 가난에 짓눌린 채 올망졸망 업드려 있습니다. 고샅에는 야자수열매가 떨어져 뒹글고 있습니다. 황금빛으로 잘 익은 야자수 위에서 투명한 아침 햇살이 미소짓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을은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검은 물소를 앞세워 논갈이를 하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어딘지 정답게 보입니다.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물소의 잔등에서 여유로움이 잔뜩 묻어납니다. 여기서는 문명(文明)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학교에 가고 있는 듯한 초등학생이 다가옵니다. 어린이가 입은 옷은 색깔을 잃어버렸습니다. 두꺼운 때가 한 겹을 덥고 있을 뿐입니다. 떨어진 슬리퍼를 신은 소년은 책 두 권과 노트 한 권, 그리고 연필 하나를 들고 학교에 가고 있습니다. 나는 또 다시 짧은 중국어를 토해냈습니다.
“학교에 가니?(你去學校嗎?)” “예.(是)” “가방은?(有沒有書包?)” “없어요.(沒有)”
그의 온몸에는 가난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TV와 인터넷, 그리고 전자오락에 빠져서 인간성을 잃어 가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그의 눈망울은 순수하고 맑았습니다. 나는 달리기를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그와 나란히 학교로 걸어가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제대로 중국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소년은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습니다. 웃는 모습이 참 순박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문도 없는 교문 앞에서 웬 아주머니가 두 개의 고무통을 매단 자전거를 세워 놓고 있습니다. 학생은 그 아주머니에게 1위안(한화 약 150원)을 건네고 빵을 세 개 받아 들더니 나에게 한 개를 건넵니다. 그의 아침식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사양했지만 시커멓게 때가 낀 손을 내밀고 있는 소년의 마음을 물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아저씨 이거 잡수세요.(你吃一个)”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나는 그 빵을 입에 물었습니다. 밀가루 냄새와 함께 견딜 수 없는 향이 코를 찔러왔습니다. 정말 억지로 그 빵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먹고 있는 빵은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딴에 나에게 더 좋은 빵을 준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것은 분명 정(情)이었습니다.
“이름이 뭐야?(你叫甚麽名字?)” “려홍이예요.(黎紅)” "앞으로 뭐가 되고 싶어(你的理想是什麽)?" "손문 선생님 같은 사람요.(我理想當好象孫文先生)"
무엇인가 답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려홍’에게 씌워 주었습니다. 려홍은 극구 사양했습니다.
“내가 달리기 할 때 쓰는 모자야. 너에게 줄게. 꼭 받아줘. 그리고 너의 꿈을 꼭 이루기 바래.(這是跑步的時候用的帽子我給你.應該收到,而且我希望你實現你的理想)” 나는 려홍의 손을 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려홍’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습니다.
Y형!
나는 '려홍'의 눈가에는 천인미답(千人未踏)의 말간 기운이 넘실거리는 잔잔한 호수가 담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말간 기운이 미래의 중국을 이끌어갈 원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려홍’의 손을 놓았습니다.
교문을 나서다가 학교 담에서 눈에 띄는 구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敎育要面向現代化, 面向世界, 面向未來 - 鄧小平”
중국 교육의 목표는 현대화와 세계화 그리고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기 시설 하나도 없는 시골의 낡은 학교였지만,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은 활기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려홍’이 이 낡은 학교를 발판으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야자수 그늘에 서서 손을 흘들어 주던 ‘려홍’의 그윽한 정(情)이 담긴 눈길은 돌아오는 길 내내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도 나는 그 지독한 가난 속에서 험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물질적인 탐욕을 내세우지 않고, ‘손문’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다는 ‘려홍’의 맑은 눈길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Y형!
마을을 나오자 길은 6차선의 도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속도로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길 옆으로 늘어서 있는 야자수의 풍광에 매료되어 힘차게 달렸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밀려들기 시작할 즈음 경찰차가 앞을 가로막아 섰습니다. 그리고 별 생각없이 지나치려는 나를 불러 세웁니다.
“왜 그러시죠?(怎麽了?)” “왜 달립니까?(你爲什麽這兒跑步?)” 그리고는 달리는 차와 오토바이 등을 가리키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말하는데 내 판단으로는 ‘여기는 자동차 전용도로인데 왜 달리느냐?’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을 가렸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경찰에게 잡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찰관의 얼굴은 웃음 띤 얼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날도 더운데 왜 자동차를 타지 않고 달려서 가느냐?’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한국 관광객인데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해남도의 경치가 좋아서 달리는 것입니다.(我從韓國來玩的,我喜歡跑步. 因爲海南島的風光最高漂亮所以我跑步.)”
내 판단이 맞았는지 경찰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인사를 하더군요.
“즐겁게 달리시고 관광 잘하고 돌아가세요.(小心吧, 希望你的旅行愉快)”
Y형!
해남도는 낯선 이국땅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 있는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들판에서 천막을 치고 오리를 키우고 있는 늙은 농부의 얼굴에서도, 갈아 놓은 논에서 묘를 던져서 뿌리고 있는 아낙의 느릿한 손길에서도, 짧은 치마에 짙은 화장을 하고 활기차게 걸어가고 있는 멋쟁이 아가씨에게서도 잔잔히 흐르고 있는 인간의 끈끈한 정(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높이 솟아버린 태양의 눈부신 노래는 바닷바람의 등에 업혀 빌딩 숲을 일으켜 세우는 건설 현장의 망치 소리와 함께 맑은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Y형!
여행은 늘상 우리의 마음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울퉁불퉁한 삶의 응어리를 안고 떠나온 낯선 공간의 한 켠에서 마음 속으로 사모쳐 오는 그리움의 줄기를 따라 은은하게 작은 샘물이 솟아나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가져다주는 힘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삶을 세워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낯선 산하(山河)를 달리면서 발밑에 부딪히는 작은 풀 한 포기에서 인생의 일면(一面)을 돌이키게 되고, 코끝을 스쳐가는 희미한 바람자락에서 황금빛 일렁이는 희망을 느끼게 되는 것, 이 또한 마라톤 기행이 남겨 주는 참 맛이 아니겠습니까?
해남도의 해변을 끊임없이 핥아대는 비취빛 바닷바람을 따라 달리면서 갈무리한 작은 시간들은 내 의식의 심층부를 채워가고 있는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포근한 마음이었습니다.힘날세상 2003.12.
'마라톤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9 남도 들노래의 여음(餘音)을 마음에 담고 (0) | 2009.07.29 |
---|---|
8 대동(大同)의 세상이여, 여립(汝立)의 하늘이여! (0) | 2009.07.29 |
6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0) | 2009.07.29 |
5 고요의 바다로 빠져든 일몰 (0) | 2009.07.29 |
4 새야 새야 파랑새야 (0) | 2009.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