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6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Y형!
어제 오후가 무르익어 갈 무렵 임포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게으른 아이의 걸음걸이 마냥 늘어지던 햇살은 그 장엄하고 육중한 동백나무에 걸려 처처에 붉은 선혈(鮮血)을 뚝뚝 흘리고 있습니다. 남해의 청아(淸雅)한 바다를 박차고 솟아 오르는 붉은 햇살을 가슴에 안아 5백년 이상을 갈무리하여 한겨울 붉은 꽃으로 피어난 동백(冬柏)을 바라보며, 여행길의 일면(一面)을 아름답게 펼쳐주는 것은 언제나 꽃이라는데 다시 한 번 공감을 합니다.
새해가 시작하는 즈음에 남단의 바닷가를 지천(至賤)으로 채우고 있는 동백의 군무(群舞)에 사로잡혀 심연(深淵)의 의식까지 가라앉아 있던 한 줄기의 그리움을 울컥 토해내다가 어느 시인의 시(詩)가 아니더라도 동백은 과연 겨울에 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 겨울에는 동백이 피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백설이 눈부신 / 하늘 한 모서리 // 다홍으로 / 불이 붙는다. // 차가울사록 / 사모치는 정화(情火) // 그 뉘를 사모(思慕)하기에 /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 정훈, 동백(冬柏)
시인은 동백을 가슴으로 몰아쳐오는 불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꽃은 언제나 마음 속에서 살아있습니다. 선암사를 두르고 있던 매화향기나 화개골을 몇 겹으로 덮고 있던 벚꽃의 햐이얀 웃음이 아직도 저 깊은 사념(思念)의 골짜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까닭입니다. 하물며 칼날같은 바람으로 피어나는 동백의 붉은 상념이야말로 오직 겨울에만 그 얼굴을 드러내야 격에 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Y형!
임포항 여관의 불빛이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느낌이 들어 적당한 숙소를 찾아 다니다가 교회가 있는 마을의 후덕한 할머니를 만나 시골의 정감(情感)이 물씬 흐르는 작은 방을 하나 얻어 들었습니다. 흐릿하지만 두터운 정(情)이 흐르는 불빛을 마주하고 인심 좋은 할머니와 시간을 나누다가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나도 몰래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가심이 짠허제? 고렁거이 사람사는 인생이제. 눈물로 그리워해도 손에 잽힐 듯한 거리에서 닿을 듯 말 듯한 거이 우리네 인생인 것이랑께. 그래도 너무 낙심허지 말어. 내외간이 서로 닮어서 잘 살거여.”
쭈글쭈글한 손을 들어 등을 토닥여주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나는 문득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Y형!
손바닥만한 예배당에 앉아 새해의 건실한 삶을 다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참으로 가슴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아직 기도의 은총이 남아 있는 마음으로 우리는 해오름을 담기 위한 달리기에 나섰습니다. 향일암까지 이르는 도로에는 겨울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바람 자락 밑으로 짙은 어둠이 두껍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달렸습니다. 넓은 주차장이 있는 탐방객 안내소에 이르렀을 즈음 등에 땀이 솟기 시작합니다.
새해의 아침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이루지도 못할 꿈을 꾸어 봅니다. 창문을 흔드는 비릿한 바닷바람과 개펄을 더듬어 오르는 달빛을 가득 담을 수 있는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앉아 가난한 화두(話頭)를 이어가며 말간 기운을 담은 정겨운 달리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나온 삶의 아픔들을 지우고, 미처 키워내지 못한 생활의 편린들을 다독이며 다정한 사람들과 찻잔을 기울여 가슴까지 밀려온 바다와, 바다에서 솟아나는 붉은 빛의 그리움을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투박한 삶을 다독여 줄 연보라빛 멜로디라는 생각입니다.
Y형!
어느 사이에 바닷물은 붉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새해를 밝혀줄 힘차고 건강한 태양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순수한 햇살을 가슴에 담아보려는 마음에 괜히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향일암을 오르는 길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집채만한 거대한 바위가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갈 만큼만 길을 열어 놓은 곳을 지나며 아내가 ‘통일문(通日門)’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해탈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온갖 번뇌를 부처의 자비로 승화시키는 것이 해탈(解脫)이라면 어쩌면 순수로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 속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아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바위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길을 이리저리 돌아 향일암에 올랐습니다.
Y형!
백제 의자왕 4년(644년)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원통암이라 불렀다는 향일암(向日庵)은 참 작은 절입니다. 대웅전과 관음전, 칠성각, 독서당, 취성루 등을 복원하여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는 하나 향일암은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암자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자비가 어디 절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겠습니까?
원효대사가 득도(得道)했다는 관음전으로 이어지는 길은 바위더미 속으로 이어진 하나의 동굴입니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탐욕과 잡념에 찌들은 속(俗)한 마음도 말끔히 씻겨 내릴 것 같습니다. 관음전에서 바라보는 임포항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향일암을 품고 있는 금오산은 부처의 자비를 깨달아 속세를 버리고 이제 막 바다로 들어가고 있는 한 마리의 거북입니다. 오른발은 이미 바다에 내디뎠고 왼발을 들어 바다로 들어가는 거북은 무슨 까닭으로 등에 향일암을 업고 있을까요? 거북의 목과 왼발 사이에 자리잡은 임포항은 향일암 부처의 이마에서 반사된 아침 햇살이 내려앉는 아늑하고 정겨운 아주 작은 포구입니다.
Y형!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태초의 신비 속에 쌓여 있는 듯한 고요 속에서 새해를 밝히는 태양이 힘차게 솟아 오릅니다. 남해의 검푸른 물빛을 머금고 저렇게 찬란한 모습으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여수 돌산도 남쪽 끝자락 바위 밑에 웅크리고 있는 향일암(向日庵)은 이제 붉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온통 주변이 붉은색 일색입니다. 간헐적으로 울리는 처마끝의 풍경소리까지 붉은 빛으로 물들어 버린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남해를 다 덮어버린 붉은 기운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어둠까지도 낼름 삼켜버렸습니다.
Y형!
숨소리까지 멎어버린 듯한 고요함에 젖어 속세의 모든 끈을 놓아 버린 체 그저 멍한 눈길을 던져 스스로 붉은 햇살더미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아내는 불쑥 조선의 정갈한 여인 의유당김씨의 동명일기(東溟日記), 그 황홀한 해오름의 수사(修辭)를 기억해 내었습니다. 아내는 의유당김씨의 붓끝에서 수레바퀴의 궤적을 그리며 치밀어 올라오던 바로 그 명랑(明朗)하고 통랑(通郞)한 아침 해의 모습을 나즉이 읊조립니다.
그 붉은 우흐로 훌훌 움직여 도는데, 처음 났던 붉은 기운이 백지(白紙) 반 장(半張) 넓이만치 반듯이 비치며, 밤 같던 기운이 해 되어 차차 커 가며, 큰 쟁반만 하여 불긋불긋 번듯번듯 뛰놀며, 적색(赤色)이 온 바다에 끼치며, 몬저 붉은 기운이 차차 가새며, 해 흔들며 뛰놀기 더욱 자로 하며, 항 같고 독 같은 것이 좌우(左右)로 뛰놀며, 황홀(恍惚)히 번득여 양목(兩目)이 어즐하며, 붉은 기운이 명랑(明朗)하여 첫 홍색을 헤앗고, 천중(天中)에 쟁반 같은 것이 수렛바퀴 같하야 물 속으로 치밀어 받치듯이 올라붙으며, 항, 독 같은 기운이 스러지고, 처음 붉어 겉을 비추던 것은 모여 소혀처로 드리워 물 속에 풍덩 빠지는 듯 싶으더라.
- 의유당김씨, ‘의유당관북유람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에서
오백 년을 한결 같이 솟아오르던 태양의 노래는 누가 불러도 아름답습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가르며 두 팔을 들어 해오름을 이야기하던 조선 아낙의 필설(筆舌)은 오늘 아침에도 우리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Y형!
온 바다에 진홍빛 비단을 깔아 놓고 이제 막 바다로 내려서는 거북의 목덜미에 앉아 고요를 흘리고 있는 임포마을의 허리를 감아 훌훌 솟아오르던 기운은 이제 힘에 넘치는 태양으로 솟아올랐습니다.
마이산 돌탑을 한걸음에 달려 올라가 원만하고 온화한 시간들로만 한 해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던 마음 속으로 아무런 광택도 없이, 아무런 외침도 없이 불쑥 솟아 오르던 지난 해 아침의 햇살은 올 해 아침도 참으로 곱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수레바퀴만큼 커져버린 태양의 황금빛 울림을 바라보면서 한 떼의 시간들을 흘려보냅니다. 절망을 흘려보냅니다. 아픔을 흘려보냅니다. 태양이 뜨겁게 내려 쪼이던 주로(走路)에서 흘렸던 그 숱한 눈물들을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지난 한해 동안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산하(山河)를 달리며 이름 모를 풀잎들과 맑은 하늘의 산뜻한 기운들과 엮어 내었던 온갖 단어들과, 아직도 내 가슴 깊숙이 가라앉아 남아 있는 스물 몇 살 때 그렸던 한 토막의 아름다운 시간과 슬몃슬몃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은 붉은 태양의 한 가운데 고이고이 간직해두고 싶습니다.
Y형!
이른 아침 하늘로 날아오르는 물새 떼의 날갯짓이 퍽 감동적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공간을 나누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도 희망과 꿈의 날개를 한껏 펼쳐 부드럽고도 힘찬 고공비행을 하는 것 같습니다. 탐스럽고 풍요로운 내일을 향한 몸짓으로 저 넓고 넓은 남해의 품에 안겨 끝없는 도약의 달리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달리는 날이 힘나는 날이 되는 또 다른 한 해를 위하여 이 여린 가슴을 황금빛 햇살로 가득 채워야겠습니다. 힘날세상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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