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5
고요의 바다로 빠져든 일몰
Y형!
안면도(安眠島)는 온통 고요 속에 젖어 있습니다. 낮은 언덕 모감주나무(천연기념물138호) 아래에서 내려다 보는 방포 해수욕장은 그야말로 고요 그 자체입니다. 벌써 30분이 지나고 있지만 그 넓은 모래사장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잔잔한 해면(海面) 위에 흩뿌려진 은빛 햇살만이 오후의 여유로움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간간히 스쳐 오는 바람 줄기에는 가을의 내음이 물씬 묻어나건만, 주변의 어디에서도 단풍이나 화려하게 채색된 홍엽(紅葉)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 여름의 왕성했던 혈기를 잃고 길섶에서 자신의 존재를 거둬 들이고 있는 풀잎 위에 다사롭게 내려 앉는 말간 햇살만이 이방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뿐입니다.
중국 산동반도에서만 자생한다는 모감주나무는 열매 그대로 염주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 자체가 불심(佛心)을 가득 담고 있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다가 열매 하나가 서해의 파도를 타고 안면도까지 흘러 들어 이곳 방포 해안에 뿌리를 내렸다는데, 이것을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젓개’라는 제법 향토색이 담긴 이름을 가진 아늑한 방포 포구를 바라다 봅니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곳 산자락에 절을 짓고 수련을 하다가 간월암(看月庵)으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개’라고 하다가 오늘날 ‘젓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Y형!
달리기를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느긋한 마음으로 가을 햇살 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참으로 가을의 햇살은 투명합니다. 갓 잡아 올린 고깃비늘 마냥 싱싱함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싱싱하고 투명한 햇살을 느끼며 안면도의 해변을 달려보고 싶은 심사(心思)를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신발끈을 졸라맵니다.
한달음에 세계꽃박람회가 열렸던 꽃지 해수욕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사로운 안면도 사람들의 마음을 수천만 송이의 꽃으로 피워내어 그 꽃송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천진무구(天眞無垢)한 향기로 감싸주었다는 박람회장에는 이제 갯벌을 쓰다듬어 온 짭짤한 바람 줄기만이 떼를 지어 몰려 다니고 있습니다. 꽃지 해수욕장의 3km가 넘는 백사장에는 가을의 끝자락을 따라 서로의 사랑과 마음을 이어보려는 듯이 가족들과 연인들의 발걸음이 무수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방포 해안의 고요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Y형!
모래를 밟고 달리는데 한 떼의 갈매기들이 나란히 날갯짓을 하며 낮은 비행을 합니다. 문득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이라는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삶의 본질에 향한 심오(深奧)한 날갯짓을 하고 있는 조나단 리빙스턴의 부드러운 자유비행을 지금 나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갈매기들과 어울려 먹고, 싸우고, 권력을 얻고 하는 것 이상의 것이 삶에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깨닫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삶을 통과해야 했는지 알 수 있겠어? 천 번의 삶, 만 번의 삶을 거쳐야 되는 거야, 존! 그리고 나서 완벽함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또 수백의 삶이, 그리고 그 완벽함을 찾아내고 그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또 다시 수백의 삶이 있어야 하는 거야. 이와 똑같은 법칙이 지금 우리에게도 물론 적용되는 거야. 우리는 이곳에서 배운 것을 통해 우리들의 다음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지.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을 때, 다음의 세계는 이 세계와 마찬가지의 것이야. 넘어서야 할 똑같은 한계와 납처럼 무거운 짐이 모두 그대로 있는……."
Y형!
안면도 휴양림을 지나면서 주로(走路) 양쪽으로는 소나무 숲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안면송’이라고 불리우는 붉으스레한 빛깔을 띈 소나무 속에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햇살이 말간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안면도를 달리는 내내 가슴 속으로 밀려들던 고요함의 실체는 바로 이 소나무 숲에서 발원한 것입니다.궁궐을 짓기 위해 인공으로 조림하였다는 안면송은 이제 가을의 햇빛을 머금어 속(俗)한 세상에서 발돋움하여 금빛 바람을 밀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문득 강화의 숲 속을 따라 달리며 맛보았던 소쇄(瀟灑)한 바람이 한 줄기 가슴을 타고 흐릅니다.
푸르른 기운으로 열병식(閱兵式)을 하듯 기운차게 솟아 있는 소나무 숲 속을 바라보는데 당(唐)나라 시인의 유종원(柳宗元)의 시심(詩心)이 불쑥 떠오릅니다.
日出霧露餘 靑松如膏沐 澹然離言說 悟悅心自足
해가 돋았으나 안개와 이슬은 그대로 있고 푸른 소나무는 기름으로 목욕한 듯한데
고요함은 이미 말을 떠났고 깨달음의 기쁜 마음에 스스로 넉넉하구나.
- 柳宗元, 晨詣超師院讀禪經에서
이쯤해서 도로를 따라 달리던 나는 깨달음의 마음을 따라 달리게 됩니다. 의식의 심층부에서 슬몃슬몃돋아나던 가느다란 희열(喜悅)은 솔숲을 타고 흐르는 말간 기운을 타고 제법 뚜렷해진 형체로 온몸을 감싸옵니다. 이것이야말로 Y형이 말하는 ‘심주(心走)’일까요? 아니면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이 하늘을 날아 오르며 꿈꾸던 ‘무한한 자유’일까요?
Y형!
섬의 남쪽 끝에 있는 영목항을 향하여 달리던 발길은 다시 한 눈을 팔고 말았습니다. 대야도라고 쓰여 있는 이정표 밑에 ‘이니스프리’라는 작은 푯말을 본 까닭입니다. 지중해에 있어야 할 섬이 대체 왜 안면도에 있다는 것인지 참 달콤한 유혹입니다. 3km가 조금 못되는 길은 평범한 시골의 분위기를 흘리며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할 즈음, 아! 그곳에는 정말 지중해가 갓 시집 온 색시마냥 부끄러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낮은 언덕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눈부시게 햐얀집, 그리고 그 앞에 펼쳐져 있는 작으마한 바다는 마치 서양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어느 겨울 함박눈이 천수만을 가득 채우는 날 창가에 앉아 있을라치면 아스라이 떠오르는 추억의 시간들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입니다. 마치 바늘이라도 떨어지면 들릴 것 같은 적막이 온 몸을 휘감아 들어 옵니다. 아내는 더 이상의 달리기는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저 이 곳에 주저앉아 몇 날이고 몇 달이고 바닷물빛과 고요함에 젖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싶다며 소녀의 치기(稚氣)를 보이고 있습니다. 과연 자연은 인간을 지배하는가 봅니다.
Y형!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곳에 자리잡은 곳이 영목항입니다. 안면읍에서 17km를 달려온 곳입니다. 비릿한 내음이 감도는 포구에는 따스한 가을햇살이 얄팍한 두께로 내려 앉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붙잡아 두고 있습니다. 햇살 아래에서 졸고 있는 늙은 아낙의 모습이 아니어도 손바닥만한 포구에는 한적하다 못해 적막함만이 두텁게 쌓여 있습니다. 철늦은 바닷바람이 간들거리는 선착장에 앉아 우리는 말없이 황혼에 젖어가는 바다를 바라다 봅니다.
문득 배 한 척이 선착장에 닿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작은 파동이 일어납니다. 허리를 굽혀 떠올리는 어부의 뜰채에는 팔뚝만한 우럭들이 팔딱거리고 있습니다. 비스듬히 사선(斜線)을 그으며 떨어지는 황혼빛은 고깃비늘을 붉게 물들이고, 환한 얼굴로 고기를 바구니에 담는 어부의 함박만한 웃음까지 온통 붉게 칠하고 말았습니다.
“고기 다 퍼 놓고 소주 한 잔 하세. 오늘은 술 맛 꽤나 날걸세.”
마음까지 풍요로워진 어부의 말소리는 수평선을 붉게 태우며 하루를 마감하는 일몰의 시간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들려 옵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닻을 내린 어부의 포만감을 생각하다가 한 해 동안 달렸던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새 해 첫날 불재 고갯마루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시작한 달리기는 가슴 속에 야릇한 흥분을 불러 일으키며 꽃향기 가득한 금산사 고갯길, 5.7km나 이어지며 작열하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모랫재, 황금물결이 일렁이던 중인리 벌판으로 이어지면서 내 마음을 살찌우고 내 상념에 쫄깃쫄깃한 맛을 심어주었습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달리기는 생활의 8할 정도는 차지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Y형!
안면도는 우리나라에서 6번째 큰 섬으로 일몰의 풍광(風光)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을 돌아다보는 달리기를 하기에는 아주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안면도는 고요의 섬입니다.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모래사장을 달리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다 보면 가슴 속에서 뭉클하게 솟아오르는 좀 헐거운 시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삶의 본질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힘찬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보다 남을 위해서 높이 날아 오르고 있는 조나단 리빙스턴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향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것입니다.
Y형!
마라톤 기행을 하면서 나는 언제나 작아집니다. 발걸음을 따라 이어지는 길가에서 잔잔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바람과 햇살 그리고 대자연이 써내는 위대한 시(詩)를 보면서 나는 늘 마라톤 기행의 거대한 힘을 느낍니다. 힘날세상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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