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기행 3
구천계곡의 말간 노래 따라
Y형!
지난 일요일의 LSD로 인한 피로감이 남아 있었지만 여름 방학의 끄트머리에 달려 있던 1박 2일의 휴가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고3 담임이라는 책무가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지만 마라톤 기행의 달콤한 맛에 빠져 버린 아내와 나는 서둘러 차를 몰아 무주로 향하고 말았습니다. 33경을 더듬어 흐르는 구천계곡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 보자는 생각에 우리는 소풍길에 나선 어린이 마냥 설레이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세 번째 이어지는 마라톤 기행은 횟수가 늘어 갈수록 그 즐거움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나그네의 객창감(客窓感)이 주는 약간의 우수(憂愁)는 늘 그렇듯이 마라톤 기행의 고갱이입니다. 낯선 곳에서 보내는 하룻밤은 약간의 긴장감이 있긴 하지만, 시류(時流)의 모든 것을 잊고 나만의 세계를 다듬어 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먼 소리디야? 오십 리가 넘는 길인디 거그를 뛰어 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허덜 말어”
삶은 옥수수를 한 바구니나 가져다 줄 정도로 넉넉한 마음을 가졌던 민박집 아주머니는 나제통문에서 백련사까지 달린다는 말에 손사래를 치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입니다.
새벽에 옷을 차려입고 나서는데 밭에 다녀오던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참말로 뛰는 거셔? 밥도 안 먹고?”
“밥은 경치 좋은 것으로 대신하고요, 점심 때 쯤 지나서 차는 가져갈게요. 괜찮죠?”
“그럼, 괜찮고 말고. 근디 조심히서 뛰어이잉.”
민박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가게에서 음료수 한 병 마시다가 우연히 얻어들게 된 가정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던 터라 상업적인 분위기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고, 걱정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마치 친누나 같습니다.
Y형!
역사는 인간들의 삶의 이야기이고 세월을 따라 이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구천동 제1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 앞에 섰습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다는 석모산의 기암절벽을 뚫어 동서(東西)를 하나로 잇고 있는 길입니다. 백제와 신라의 힘이 맞부딪치며 피비린내를 풍기던 전쟁의 길목이었다고 하지만, 전쟁도 일면으로 보면 서로를 향한 길을 열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단순히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을 뿐이지만, 이 곳을 경계로 언어와 풍습이 다른 것을 보면 그 옛날에는 가로막힌 산줄기로 인해 서로가 교류를 하지 못했던 것을 그대로 드러내어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Y형!
5시 40분에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는 통문을 출발하여 벌써 40여 분을 달렸습니다. 손에 든 구천동 안내지도에 따르면 이곳은 제6경 일사대(一士臺)입니다. 조선 말기 학자 송병선이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서벽정이라는 정각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일사대라는 이름은 송병선이 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선비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고 사람들은 수성대라고도 부르는 곳입니다. 아침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신선의 세계 그대로입니다. 이른 아침이라서 일사대 주변은 온통 고요의 메아리가 있을 뿐, 우리들의 존재는 자연 앞에서 아주아주 작아져 버렸습니다. 대자연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볼품없이 작아지고 마는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일사대를 돌아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조선 중기의 기생이었던 운초(雲楚)가 지었다는 시를 생각해 봅니다.
秋湖十里繞群巒 一曲淸歌倚彩欄 浩浩臺門流居水 終歸大海作波瀾
가을 호수가 산을 돌고 흐르는데 / 한 곡조 맑은 가락을 난간에 기대어 부르네
이 정자 앞을 흘러가는 저 물은 / 바다에 흘러 큰 파도를 일으키겠지
민주지산 꼭대기에 떨어진 빗방울이 동쪽으로 흘러내리면 낙동강을 이루고, 서쪽의 골짜기를 적시게 되면 굽이굽이 금강으로 흘러 서해로 돌아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옆에 끼고 달리고 있는 남대천은 주로 구천 계곡을 살찌우며 장만한 말간 기운으로 세속(世俗)의 두께를 씻어내려는 마음 하나로 저렇게 힘차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훗날 세상에 큰 사람으로 일어서기 위해 오늘의 고행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다가 50이 다 된 자신이 모습에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습니다.
Y형!
가벼운 발걸음을 놀리던 아내가 불쑥 한 마디 물어옵니다.
“남대천에 반딧불이가 서식한다고 하던데, 밤에 보면 장관이겠지요?”
반딧불, 그렇습니다. 천연기념물 제 322호로 지정된 반딧불이가 사는 유일한 곳이 바로 이 남대천입니다. 진(晋)나라 때 차윤(車胤)이 반딧불 밑에서 공부하여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개똥벌레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반딧불이에 대한 추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 소중한 추억을 축제로 승화시켜 환경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 해마다 무주에서는 반딧불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새 천년의 빛’이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있지만, 어쩐지 나는 윤동주가 노래한 ‘달 조각’이라는 표현이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가자 가자 가자 / 숲으로 가자 / 달 조각을 주우러 / 숲으로 가자 // 그믐밤 반디불은 / 부서진 달 조각 // 가자 가자 가자 / 숲으로 가자 / 달 조각을 주우러 / 숲으로 가자
달빛에 흠뻑 젖어 날아 다니던 반딧불의 아름다움이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까닭입니다.
Y형!
7시30분이 조금 못되어서 삼공리 집단시설지구를 통과하여 인월담 앞에 섰습니다. 신라 때 인월화상이 절을 짓고 수도하던 곳이라는데 맑다 못해 시퍼런 물줄기가 넓은 반석 위를 구르며 건너편 산기슭을 보듬고 주변의 나뭇가지까지 물 속으로 끌어 들여 제법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구천계곡을 덮고 다가옵니다.
구천동의 이름이 참 재미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9천명이나 되는 승려가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아서 구천동(具千洞)이라 한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어사 박문수가 구천동민을 신도로 다스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Y형!
이제 우리는 구천계곡과 나란히 달립니다. 숲으로 터널을 이룬 부드러운 흙길 위에는 아침의 고즈넉함이 탐스럽게 덮혀 있습니다. 숲 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시간들이 우리들의 발소리에 놀라 화들짝 깨어 졸린 듯한 눈길을 보냅니다.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는 듯한 느낌에 땀을 흘리며 달리는 우리들의 발걸음까지 멎는 듯하고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너무나 커서 스스로 놀라운 마음입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숲길을 버리고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는 계곡의 물줄기는 수도 없이 늘어 서 있는 기암괴석을 휘어감고 행진곡풍으로 여름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 9천 명의 승려가 살아서 구천동이 아니라 9 천 개의 바위가 있어서 구천동이라고 이름 붙인 것 같네요.”
인월담부터 구천계곡에 빠져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내가 한 마디 합니다.
구천계곡의 유일한 폭포라는 구천폭포 앞을 지나 이속대(離俗臺)를 달릴 때에는 이미 하프가 넘는 거리를 달려 왔고, 또 제16경 수경대부터 계속 오르막길이 이어진 탓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가느다란 통증이 허벅지를 파고들었지만, 사자담, 비파담, 금포탄, 호탄암, 안심대 등의 장관이 가져다준 풍성함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내는 기분은 날아갈 듯 가볍습니다.
이속대(離俗臺)!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난다는 곳입니다. 하기야 나제통문에서 여기까지 오르면서 수도 없이 많은 담(潭)과 소(沼)에 세속(世俗)의 뜻을 씻고,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푸르디 푸른 숲 속을 돌아 내리는 청아(淸雅)한 기운을 맛보게 되면 자연히 세상의 속(俗)한 마음을 모두 털어 버리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Y형!
이제 오늘의 달리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탐욕과 욕망으로만 얼룩진 삶을 씻어 내려는 심사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의 맑은 기운을 찾아 달리는 것도 또 하나의 욕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달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달리기는 그냥 달리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꾸만 머릿속에 무언인가를 담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큰 업보(業報)라는 생각이 들어 백련사를 오르는 계단이 너무나 높아 보입니다.
향적봉 꼭대기에 올라 큰 함성이라도 한 번 질러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마라톤 기행을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어야겠습니다. 힘날세상 200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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