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4
새야 새야 파랑새야
Y형!
배들평(梨坪) 너른 들녘 위로 내려 앉는 햇살은 황금빛의 노래를 부르며 잘게잘게 부서지는데, 길섶에 피어 있는 들국화의 향(香)은 푸르른 하늘까지 치켜 올라가 청아(淸雅)한 기운으로 가을의 오후를 덮고 있습니다. 지독한 바람과 빗줄기를 이겨내고 노란 얼굴을 들어 꼿꼿하게 서있는 벼들의 모습에서 100여 년 전 들불같이 일어섰던 동학 농민군의 함성과 열기가 문득 느껴집니다. 이렇듯이 기름지고 풍족한 농토를 온 몸으로 껴안고 순수하고 넉넉한 인심으로 살아가던 농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은 오직 지배층의 욕심과 학정이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기가 어렵습니다.
호남의 들녘을 적시며 농민들의 가슴속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 손을 맞잡고 풍년의 기쁨을 갈무리하며 힘을 모으는 곳에 고부군수 조병갑이 새로 쌓았던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상징인 만석보는 결국은 엄청나게 큰 부메랑이 되어 고부군수의 심장으로 날아들고 말았습니다.
Y형!
바로 그 역사의 현장 만석보(萬石洑)터에서 동학농민군의 혁명 정신을 더듬어 미진한 후학(後學)의 발걸음일지라도 거대한 역사의 한 복판을 힘차게 달려 보려고 합니다.
황금빛 햇살은 만지면 노란 물이 묻어날 것 같은데, 신발끈을 붙들어 매는 마음은 어쩐지 묵직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숱한 민초(民草)들의 애환(哀歡)이 아직까지 이어질 듯한 들녘을 가로질러 달릴 것을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짠하게 울려오는 듯합니다.
배들평은 동진강을 따라 배가 드나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일제 때 이평(梨坪)으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배들평은 자신의 이름마저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풍성한 가을걷이를 가져다 주는 참으로 정직한 들녘입니다.
Y형!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희승님의 시조가 떠오릅니다.
손톱으로 툭 튀기면 /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淸淨無垢)를 / 드리우고 있건만.
- 이희승, 벽공(碧空)
자연은 저렇게 정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서는데, 인간들은 세속(世俗)에 눈이 어두워탐욕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심히 부끄럽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죽창을 들었던 1894년의 하늘도 분명히 저렇게 푸르렀을 것입니다.
Y형!
만석보에서 이평면 소재지까지 2km 남짓 이어지는 710번 지방도로는 참으로 한적하고 고요합니다.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들만이 흐뭇한 얼굴로 논두렁을 거닐고 있을 뿐입니다. 지나다니는 차량도 거의 없어 달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아름다운 길입니다. 코스모스까지 가세하여 한층 가을색으로 물들어 버린 자연의 노랫소리에 빠져 들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지고 말았습니다. 땀이 나기 시작하고 몸이 데워지기 시작할 즈음에 이평면사무소 앞 삼거리에 도달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말목장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894년 1월 10일 밤 사발통문을 받은 농민들이 농기구와 죽창을 들고 모여 들었다는 곳입니다. 동학 혁명의 시발점(始發點)이 되었던 곳이지요. 농민들은 이내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무고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었으며 만석보를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은 농민들의 힘이었습니다. 민초(民草)들이 부르는 피맺힌 한(恨)의 노래였습니다.
말목장터에서 710번 지방도로를 따라 창동리를 거쳐 영원면 삼거리까지 달리면서 무엇이 그리 바쁜지 마치 경주나 하는 듯이 달리고 말았습니다. 곁에서 달리는 아내는 왜 그렇게 말한 마디도 없이 무엇에 쫓기는 사람마냥 빨리 달리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농민들의 분노에 찬 함성이 들려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의 격렬한 발걸음에 나도 모르게 빠져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달리는 내내 우리의 마음을 잡아 채고 있었던 것은 오직 동학의 혁명정신이었습니다.
Y형!
영원면에서 29번 국도를 따라 고부면으로 달립니다. 저 멀리 지평선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호남의 들녘을 바라보며 이 풍족한 고장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선 농민들의 심사를 헤아려 보는데, 어느덧 옛날 고부관아가 자리하고 있었던 고부 초등학교 앞입니다. 텅 빈 운동장에 서서, 농민군이 3월 20일에 무장에서 선포했다는 창의문을 떠올려 보다가 문득 성난 얼굴로 횃불과 농기구를 들고 동학농민군이 밀려 들어오는 것 같은 환상에 빠져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다. 인군(人君)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후에야 나라가 무강의 역(域)에 미쳐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자애하며 정신이 밝아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니 현량하고 방정한 신하가 있어서 그 총명을 보좌한다면 요순의 덕화와 문경의 다스림을 가히 바랄 수 있으리라. - 동학군 '창의문'에서
지금은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농민전쟁 당시에는 인근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의 집산지이며 상업의 중심지로 정읍보다 번성했었다고 하는 고부 들녘의 사람들이 내세운 것은 ‘탐학한 관리를 제거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음으로써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살려내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Y형!
이제 두승산 자락을 돌아 달리기 여행의 종착지인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으로 향합니다. 고부를 벗어나자마자 하늘고개(天峙)를 넘어갑니다. 하늘 고개에 오르니 눈앞에 고부의 너른 들녘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배들평 평야와 전봉준 장군의 생가(生家)가 있는 조소리 마을도 그날의 이야기를 품고 황금 물결 속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습니다. 하늘고개를 내려서는 2차선 도로는 농민군들의 발자취를 따라 꿈틀거리며 이어지고 있고, 주변의 밭에서는 가을 배추를 가꾸는 농부들이 스프링쿨러를 돌려가며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저렇게 순박하게 살아가는 농민들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그날의 함성이 갈무리되어 있을 것입니다.
Y형!
황토현 고갯마루에 섰습니다. 그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보기에는 황토현은 너무나 낮은 언덕이었습니다. 다만 ‘갑오동학혁명기념탑’만이 홀로 서서 그날의 싸움을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황토현의 길가에 돋아난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부를 점령한 농민군은 백산(白山)에 호남창의소를 설치한 후, 군대의 행동지침인 4대 강령과, 일반 백성들의 동참을 권유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태인, 부안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1984년 4월초 전라감영에서 파견한 1,300여명의 관군과 맞선 농민군은 백병전을 벌이기에 유리한 황토현으로 유인하여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여 관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조선은 전봉준의 손에 달렸고 세상은 동학군의 천지가 된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로 동학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사실 이 전투는 동학군에게 엄청난 힘을 실어주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면서 백성들의 자주독립을 꿈꾸며 서울로 쳐들어가던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면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
황토현, 그 역사의 현장에 세운 ‘갑오동학혁명기념탑’에 새겨 놓은 노랫말입니다. 동학혁명의 실패와 녹두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불리던 노래로, ‘파랑새’는 원래 ‘전(全)’를 풀어서 ‘팔왕(八王)새’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오늘날 파랑새로 되었다고 합니다.
Y형!
제폭구민(除暴救民)․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고부 들녘을 뒤흔들었던 동학농민군들의 핏발 어린 눈빛과 분노의 함성을 지켜 봤던 두승산은 아무런 말이 없이 배들평 황금 들판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풍족하고 넓은 들녘에서 봉기한 동학혁명의 무대를 따라 달리면서, 동학 농민군의 개혁정신과 자주정신은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 일제 치하에서 민족 독립 운동으로 피어 났으며, 4․19의 혁명정신으로, 광주민주화항쟁으로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껴보았습니다.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로 말입니다.
Y형!
늘 그렇지만 달리기는 살아가는 재미를 확인시켜 줍니다. 국토의 한 자락을 따라 달리며 그 지역의 강줄기에서 이룩된 문화와 산자락에 담긴 역사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궤적을 반추해보는 그 쏠쏠한 재미에 빠져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山河)를 또 다시 달려야겠습니다. 힘날세상 2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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