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기행 9
남도 들노래의 여음(餘音)을 마음에 담고
Y형!
18번 국도는 겨울의 끄트머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겨울 바람을 보듬고 진도대교를 넘어갑니다. 나 또한 소매 끝을 붙잡는 바람줄기를 따라 진도에 들어섭니다. 진도대교 밑을 흐르는 울돌목의 거센 물결은 분기(憤氣)를 머금은 목소리로 나의 발걸음을 이끌고 진도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갑니다. 진도를 휘감고 돌아가는 길 위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봄의 노랫가락에서 진도의 정신은 다시 살아납니다.
Y형!
진도는 49개의 유인도(有人島)와 212개의 무인도(無人島)가 본 섬인 진도의 품에 안겨 저마다의 풍광(風光)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산수화' 같습니다. 그러나 진도의 참 맛은 산마다 골마다 담겨 있는 예술혼입니다. 강강수월래, 남도 들노래, 씻김굿, 다시래기, 진도 만가(輓歌)와 북놀이 그리고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래 대대로 내려오는 남종화(南宗畵수묵(水墨)과 담채(淡彩)로써 산수(山水)를 그리며 가볍고 아담하나 주관적 사실을 존중하여 획과 색채를 곱게 하지 않는 화풍(畵風)을 가지고 있음)는 진도 사람들의 신명(神命)나는 삶을 그대로 드려내고 있습니다. 섬이라고 하기에는 땅이 너무 기름지고 농사가 잘 되어 '한 해 농사를 지어 삼 년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이어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래와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해로 들어서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험난한 역사의 한 복판에 서게 되어 항쟁과 투쟁의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Y형!
오늘의 달리기는 이 곳 남도석성(南道石城)에서 시작합니다. 다사로운 손길을 뻗어 등줄기에 내려 앉는 햇살의 애무를 받으며 남동리 남도석성에서 바라보는 손바닥만한 들녘이 퍽이나 평화로워 보입니다. 높이 4m, 폭 2-3m, 둘레 526m인 작은 성을 의지해 이 작은 들녘을 무대로 피나는 삶의 투쟁을 벌였을 옛날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성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이어지고 있는 삼별초군의 호국 정신은 남문(南門) 앞에 다정하게 놓여져 있는 쌍홍교와 단홍교를 건너 저 들녘의 품속에서 다소곳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품이 넓고 깊은 까닭이요, 저 작은 들판은 아직도 이 곳 사람들의 삶의 발판이고 삶의 현장인 까닭입니다. 석성(石城)의 동문과 서문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넌지시 알려 주던 마을의 한 할머니는 또렷한 말씨로 얘기합니다.
"삼별촌지, 배중손인지는 몰라도 여그가 나라를 지키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싸웠던 전쟁터였다는 것은 틀림없지라우. 말허자면 여그가 역사의 고장이지라우."
그렇습니다. 진도는 우리민족이 외부의 침입 세력과 맞부딪치는 들머리였습니다. 울돌목은 예나 지금이나 거센 목소리를 토하며 심하게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1597년 10월 26일 단 12척으로 구성한 이순신의 선단은 정찰병이 그 숫자를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 많은 마다시 함대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워낙 좁은 해협이 서로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던 까닭에 대규모로 쳐들어 오는 일본 선단을 보고 겁에 질려 도망하려는 자신의 군사들을 독려하며 이순신은 '칼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전라 우수영에 승리의 깃발을 올리는 조선 수군의 심사(心思)를 헤아리다가 문득 남도석성에 깊은 한(恨)을 남기고 부릅뜬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어갔던 삼별초의 우두머리 배중손(裴仲孫)과 몽고군 홍다구의 칼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삼별초 정부의 임금 승화후(承化侯) 온(溫)의 피어린 한(恨)이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바람자락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느껴봅니다. 한(恨)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역사의 줄기가 바로 진도의 속살을 타고 흐르는 18번 도로입니다.
Y형!
남도 석성까지 한달음에 내달아 피어린 역사의 질곡을 말끔히 씻어 낸 18번 도로는 서망해수욕장의 백사장을 지나 팽목항을 날으는 갈매기의 울음에 실려 호젓한 들녘을 따라 흥겨운 가락을 흥얼거리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란히 달리고 있는 아내는 발자국 소리를 내지 말자고 채근거립니다. 두껍게 가라앉아 있는 고요의 퇴적물들이 우리들의 소란스러움에 놀라 깨어날까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도대체 사람을 만날 수 없는 달리기를 한 시간쯤 이어가고 있을 때 송호리라는 마을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밀려오는 봄기운에 한껏 취한 것인지 몰라도 할아버지의 콧노래는 흥겨움이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진도가 말여어 소리의 고장이지. 진도 아리랑 한 번 들어 볼랑가?"
청천안 하늘에넌 잔별도 많고 / 요내야 가심속에넌 수심도 많다. // (후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났네 /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 야답세 두번걸이 열두폭 치매 / 신작로 다 씰고 임 마중얼 가네 // 놀다가세 놀다나가세 / 저달이 떴다 지도록 놀다나 가세 // 십오야 밝은 달은 구름 속에 놀고요 / 이십안짝 큰 애기는 내 품에서 논다
노래를 못하면 진도 사람이 아니라며 구리빛 얼굴을 허물어 환한 웃음을 일으키는 할아버지의 이마에 늦은 오후의 희미한 햇살이 살짝 내려 앉는 것이 참으로 보기에 좋습니다.
"진도가 말여어 섬이라도 해물(海物)이 귀해. 아 농사(農事)가 잘되는디 괴기 잡을 필요가 없제. 또 진도가 옛부터 귀양을 많이 왔제. 그리서 양반들이 많이 내려왔거등. 아 그 사람들이 와서 멋허겄능가? 노래하고 글씨 쓰고. 그리서 진도 노래가 나오고 운림산방이 생긴 것이랑게."
차를 타고 넘어오면서 들렀던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첨찰산이라는 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산자락 밑에서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3남인 미산(米山) 허형(許瀅1862-1938),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1908-1988)이 대를 이어 탄생하여 150여 년을 묵향(墨香)을 풀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운림산방은 남녘의 민초(民草)들이 들노래와 함께 부르고 있는 진도 예술의 양대 산맥인 것입니다.
Y형!
봉암 저수지에서부터 세방 낙조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길은 가파른 고갯길입니다. 숨이 거칠어져 차곡차곡 쌓아 놓았던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는 모두 깨어져 버리고 비오듯이 땀만 흘리며 발걸음에 힘을 주어 봅니다. 달리기를 하다보면 언제나 고갯길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달리기는 인생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참으로 많은 삶의 모습들을 만나게 되고, 그 다양한 삶의 모습들 속에서 아직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도 달리기가 가져다 주는 기쁨입니다. 더구나 급한 오르막을 치달릴 때는 짧은 간격으로 동당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에 짜릿한 전율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육신(肉身)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곤해졌을 때에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라고 말하던 소설가 이상(李箱)을 내 삶의 안쪽으로 끌어 당기고 있었습니다..
세방리 낙조 전망대에 섰지만 짙은 구름이 수면을 덮고 있어 마지막 힘을 모아 붉게 타오르던 황혼은 참으로 오랫동안 내 의식의 심층부에 고이고이 간직해 두어야 할 것 같은 환상적인 노래를 잠깐 부르더니 이태극님의 시조 한 편을 남겨 놓고는 수평선을 넘어가 버렸습니다.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
둥둥 원구(圓球)가 검붉은 불덩이다.
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 듯이 접어든다.
큰 바퀴 피로 물들며 반 남아 잠기었다.
먼 뒷섬들이 다시 환히 얼리더니
아차차, 채운(彩雲)만 남고 정녕 없어졌구나.
- 이태극, 서해상의 낙조 -
진도는 이제 어둠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지력산 자락을 돌아내린 땅거미는 이미 지산면 들녘을 짓눌러 버리고 소포항 쪽으로 한꺼번에 달려갑니다. 그 어둠의 달음박질 틈을 비집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남도들노래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서둘러 차를 타고 소포리로 달려갔지만 이미 짙은 어둠에 쌓여 버린 마을에는 단 한 소절도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박한 시골 농가 같은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작은 음식점 아주머니가 푸짐하게 담아 내온 간재미회 위에 고명으로 얹혀 있는 넉넉한 입담에서 남도의 들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 그 때는 어쨌는지 몰라도 지금이야 어디 좋아서 부르는 노랜가요? 볼품없이 쪼그라져 버린 농촌 사람들의 꽉 막힌 마음을 풀어보려는 신세타령이지라우. 인자는 노래를 부를 사람이 없지라우. 어디 젊은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부를라고 해야 말이지. 그리서 우덜이 노래방을 맨들었지라우. 그렇게 해서라도 노래는 이어가려는 진도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랑게요."
Y형!
진도는 그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후세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이어받아도 진도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진도의 정신은 세찬 겨울 바람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울돌목의 거센 물결만큼이나 힘찬 목소리로 생생하게 흘러 꽃피는 봄날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봄기운에 취해 진도에 가면 남도의 들녘에서 피어오를 들노래의 장단에 맞춰 어설플지라도 '얼씨구 좋아'하며 추임새라도 흉내내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도 특산주라며 한 잔 가득 따라주는 홍주(紅酒)의 붉은 빛만큼이나 짙게 치밀어 올라오는 진도 사람들의 정(情)에 사로잡혀 우리들의 노랫소리는 어두운 하늘을 타고 끝없이 날아 올랐습니다.힘날세상2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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