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斷想)

연애를 위하여

힘날세상 2019. 1. 2. 11:05







잠을 놓쳐버렸다.

따끈한 돌침대에 편안히 몸을 눕히고

달콤한 잠에 빠지려 했건만

야생화를 촬영하는 남자와

시를 쓰는 여자가

집시맨이 되어

캠핑카를 보듬고

관매도에서 달달한 듯, 담백한 듯 연애여행을 다독이고 있는 프로그램의 여운이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나를 밀치고

나의 잠의 세계를 짓밢아 버린 탓일까.

연애!

참 오랜만에 꺼내보는 말이다.

연애를 남녀가 벌이는 사랑놀음이라고만 단정짓기에는

연애의 깊이가 너무 깊지않은가.

연애가 뿜어내는 힘이 너무 세지않은 가 말이다.

힘은 우리들을 살아있게하는 원동력이다. 60대, 50대에 굴절된 삶의 궤적을 딛고 그들이 연애를 시작한 것은 아직 힘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까.

서가의 불을 밝히고 책장에 기대어 앉았다. 매정하게 달아난 잠이 두고간 미끈거림을 어떻게든 닦아내야 할 것이다. 서가에 꽂혀있는 수많은 작가들은 꼭 이럴 때마다 나에게 힘을 나눠주었다.

3천 종류 이상의 야생화를 촬영했다는 남자와 시를 붙들고 삶의 굴곡을 넘었다는 여자의 연애는 단순한 로멘스는 아니다. 그것은 미확인된 세계의 문을 여는 일이고, 그들이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무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견뎌낼 것이다. 음식을 나누듯이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향한 애틋함을 나눌 수 있다면, 그들은 연애의 힘을 놓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젊은 이외수를 봤다.

80년에 춘천의 명동 어느 다방에 앉아

자욱한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세상의 모든 고뇌를 끌어 안고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을 대신하여 몸부림하던

이외수는 분명 젊은이들의 힘이었다.

미스 강원이었던가

그녀는 이외수를 살아있게 한 힘이었을까.

<꿈꾸는 식물>에서 썩어버린 세상에서도 순수함을 놓지말라고 외쳤던 이외수는 <들개>를 풀어놓는다.무너져가는 폐교의 교실에서 들개를 그리고 있는 그 남자, 그 화가를 이외수는 왜 죽였을까. 20대 피끓는 젊음으로 마주친 이외수와 그가 풀어놓은 <들개>는 심야라디오 프로그램이 다 끝나고도 고뇌와 번민으로 잠들지 못하는 겨울밤을 하얗게 밝혀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들개를 그리는 그 남자화가는 이외수 자신이었다.

이외수는 소설가가 아니라 괴인이었다. 젊은이들의 가슴을 후벼파기도 하고, 그 아픈 가슴에 시원한 동치미 국물 한 사발을 들이 붓기도 하던 이외수는 삶의 지남차였다. 이외수의 소설을 돌려 읽으며 우리들이 만났던 그때 이외수는 신이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들개>는 누렇게 바래 있다. 야성을 잃지 않았을까. 30년전에 내 앞에 던져 놓았던

내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늙어버린 몸댕이와 낡아버린 사고만 남은 나에게 세상을 물어뜯을 야성의 불씨를 심어 줄 수 있을까.

"죽은 화가에게 마침내 남아 있는 것, 그것은 아마도 화가의 힘일 것이다.

인간은 힘을 잃으면 끝장이다. 어떠한 환난과 고통을 당하여도 인간은 힘을 지녀야 된다.

작가가 화가를 통하여 보여준 것, 그것은 힘이었다. 힘은 어쩌면 용기일 것이다.

이외수라는 괴인은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던간에."

1983. 4.30

교단에 첫발을 디디던 해 다시 몇 번을 읽고 난 후 책장에 적어놓은 감상이다. 60을 두 해나 넘긴 지금, 30년 전처럼 잠못드는 밤에 읽는 <들개>는 어떻게 다가올까.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도 자기가 목적한 바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사실, 그것은 인간의 힘이요, 생의 용기인 것이다.

책장을 넘기기가 두렵다. 낡고 낡은 책장이 바스라질까봐 두렵고, <들개>에게 물릴까봐 두렵다. 30년 전에 나의 삶을 매섭게 흔들어대며 완전하게 지배했던 그 남자 화가를 만나지 못할까봐 두렵다.

다 늙어서 연애를 시작하는 두 분의 삶이 아름다움의 표본이 되기를 갈망한다. 힘을 잃지 않기를 마음으로 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 속에서도 그 남자 화가는 그 모습 그대로 들개를 그리고 있기를 바란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야성의 힘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말이다.

연애도 야성이 살아있어야 참맛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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