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한 달리기
참으로 오랜만에 달리기에 나섰다. 아직은 봄빛이 제대로 물들지 않은 오후의 삼천(三川)을 따라, 땅거죽을 헤집고 고개를 내밀려는 풀싹들의 웃음을 따라, 들녘에 느긋하게 내려 앉는 말간 햇살과 호흡을 나누며 아내와 동반주에 나선 것이다. 달리기를 시작한지 7년째. 달리기의 참맛을 느낄 즈음 허리의 통증으로 인해 거의 1년이 다가도록 신발을 벗어 둔 채 남들의 달리기만을 바라보며 안타까움만 다독거리고 있다. 이제 조금 회복이 되는 듯하여 달리는 흉내를 내보려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중인리 들녘은 달릴 때마다 새로운 얼굴로 다가왔다. 오른쪽으로 육중한 몸을 일으켜 우리들의 달리기를 빙긋이 웃으며 내려다보던 모악산이 우아한 모습으로 부드러운 자락을 펼치며 다가선다. 모악의 자락 가장자리에서 기지개를 켠 새뜻한 봄바람이 발끝에서 새실거린다. 이제 막 봄날의 연주가 시작되고 있는 논길을 따라 연보라의 그리움이 찰랑거리고, 문득 가슴으로 밀고 들어오는 묵직한 그리움 하나가 짙게 각인되어 온다.
아이들이 모두 서울로 진학하고 보니 든사람은 몰라도 난사람은 안다고 집안이 휑한 기운이 돌아 늘 적적하고 허전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자식들이야 어차피 우리의 품을 떠나 자신들의 날갯짓을 하게 마련이지만 막상 두 녀석이 박차고 나간 빈자리는 예상했던 것보다 크게 밀려 들어왔다. 사실 두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면서 우리는 많은 거리와 시간을 달렸다. 나란히 발걸음을 맞추어 가며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했고, 감동으로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라 야간자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도전 정신과 인내심을 심어 주기 위해 길고 긴 풀코스를 달렸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하여 자신들의 꿈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남은 것은 늘 서운한 느낌과 무엇인가 꼭 한 가지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을 짓누르는 .
한꺼번에 밀려드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는 달리기보다 좋은 것이 없다. 숨이 가쁘도록 발을 놀려 질펀하게 달리고 나면 가슴 속까지 밀려들었던 휑한 기운 봄바람에 눈이 녹듯 사라지곤 하였다. 특히 오늘같이 햇살이 다소곳이 내려앉는 오후의 달리기는 그대로 힘이 된다.
늘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던 아내는 오늘따라 내 마음도 모르고 앞서서 달린다. 그 동안 내가 부상으로 통 달리기를 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아내는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빨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 달리기에 나선 것은 아내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재삼 시인의 <추억에서>라는 시를 가르치다가 문득 홀로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나 한동안 흐르는 눈물로 인해 강의를 잇지 못했다. 웬일인가 하여 의아한 눈길을 보내는 학생들의 얼굴 너머로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사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 이던가. / 울엄매야 울엄매, // 별밭은 또 그리 멀리 /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 손 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 오명 가명 / 신새벽이나 별빛 에 보는 것을, /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박재삼, <추억에서>
박재삼 시인은 시 구절 마디마디에 어린 시절 보았던 어머니의 가슴 저린 한(恨)을 매달아 놓고 있다. 그 아픔을 읽다가, 그 뼈저린 눈물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삶의 아픔에 무겁게 짓눌린 채로 먼저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항상 아버지 곁에 계시고 싶다며 누구도 없는 시골에서 혼자 살고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는데, 문득 밀려오는 그리움에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을 모두 털어 통장에 넣어드렸다.
둑길은 맑은 삼천(三川)을 보듬고 느릿한 발걸음으로 이어진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아내와 달리기를 한 곳이 바로 이 삼천의 둑길이었다. 뛰어난 경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양 옆으로 감싸주는 모악산의 품안에서 아늑한 느낌이 들 정도의 넓이로 펼쳐진 중인리 들녘을 헤집고 흐르고 있는 삼천의 이야기는 그런대로 들어 줄만 하였다. 사계절을 따라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스러져가는 생명체들을 보면서 우리는 생활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 삶을 자아냈고, 굴절된 아픔을 나누기도 하였다.
아내는 언제나 옆에서 달렸다.
연초록의 이파리들이 은은하게 피어나던 지리산 화개동천의 함초롬한 새벽길, 발바닥을 간질이며 부드러운 흙으로만 이어지던, 문경새재를 휘감아 오르던 고요속의 길, 황금물결을 뒤흔들어 풍요로움을 내세우던 넉넉함이 넘실거리던 호남의 들녘을 감아 도는 원평천(院坪川)의 둑길, 하얗게 눈을 덮어 은세계(銀世界)를 이루고 있던 옥정호반의 여유로운 길, 한 여름밤 무더위 속에서 땀방울 뚝뚝 흘리며 치달리는 우리들에게 낭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전주대학교 교정, 늦은 가을 오후 산새의 걸음걸이처럼 신선하게 내려앉던 햇살을 끌어안으며 느긋한 마음으로 넘어가던 귀신사(歸信寺) 고갯길, 그 동안 아내와 달린 길은 그대로 우리들의 삶의 궤적이었고, 삶의 이야기였다.
나란히 달리며 아이들의 진로를 생각하였고,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내며 살아가는 굽이마다 부딪쳐오던 삶의 문젯거리들을 털어낼 수 있었다. 처녀와 총각으로 어색하게 이루어진 첫 만남의 분위기도 다독거려 보았고, 별로 내놓을 만한 이야깃거리도 없이 밋밋하였던 신혼여행의 빛바랜 시간들도 나누어 보며 세월의 등을 밟아 왔다.
달리기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서 좋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면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어서 좋다. 대화를 나누면서 즐겁고 희망찬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오늘은 저렇게 남의 속도 모르고 앞서서만 달리고 있는 아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금은 거북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어머니에게 돈을 보내드린 것을 아내가 알게 된다면, 꼬박꼬박 어머니의 생활비를 드리고 있는 아내의 마음이 편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사실 오늘 달리기에 나선 것도 이렇게 답답한 마음을 달리는 동안에 슬쩍 흘려 적당히 풀어보려는 얄팍한 심사였던 것이다.
아내는 이러한 나의 마음을 알고나 있는 듯이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왜 이렇게 아내는 달아나는 것인가. 이제 달리기는 끝나가고 있다. 중인리의 좁은 들판은 더 이상 달릴 길을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어떻게든 달리기를 마치기전에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어쨌든 미안하게 되었소. 당신은 순간적인 감정으로 돈을 보내드린 것이 아니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소. 그렇게 감정이 여려서 어떻게 하느냐고 질책을 할지도 모를 일이오. 그렇지만 느닷없이 밀고 올라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은 그렇게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소. 물론 빠지지 않고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있는 당신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아들로서, 곁에서 지켜드리지 못하고 있는 아들로서,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자라왔던 아들이고 보니 내 마음을 따라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달랠 수가 없었던 것이오.’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 나가는 아내의 뒤를 따라가며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을 스쳐가는 바람자락에 매달아 놓는 것으로 달리기를 마치고 말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씻어내던 아내가 돌아서며 웃음 섞인 목소리를 건넨다.
“오늘 기분 좋게 달렸네요. 당신이 부상으로 인하여 통 달리지 못한 탓에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길이 이끄는 대로 내 기분만 채우면서 달려서 미안해요. 그래도 마음만은 당신과 같이 달리던 시간들과 그 부드럽고 편안했던 주로(走路)를 생각하며 달렸거든요.”
“사실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
“알아요. 말하지 말아요. 당신 마음 다 알아요. 우린 어떤 길도 같이 달리는 부부잖아요.”
아내의 얼굴에 감도는 미소를 보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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