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문학

[수필] 여보! 나 좀 데리고 가

힘날세상 2009. 7. 28. 14:30

여보! 나 좀 데리고 가.

 

2003-03-30 20:44:09,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모악산에 갔다.

날씨가 너무 좋아

황홀경에 빠져

하늘 한 번 올려다 보고 감탄 한 번 하고

땅 한 번 내려다 보고

생명의 신비감에 젖어 버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달리지 못해서 오는 스트레스야말로

세상에서 인간이 느끼는 가장 못견딜 스트레스가 아닐까?

이제는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정말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고

마라톤이 무엇인지 어디가서 말도 못할 정도가 돼 버렸다.

 

괜히

나 때문에

나 보기 미안해서

토요일도 일요일도 달리지 못하는

마눌님을 살살 꼬셔서

모악산에 올랐다.

 

걷는 것도 아픈 것은 똑같은데

그래도 봄기운을 타고 돋아나는 생명은

아픈 마음을 상당히 씻어 내려주었다.

 

그런데

도저히 아내를 따라가지 못하겠는 것이다.

다리가 아파서

허벅지가 아프고

종아리가 말을 안들어서

 

뒤에 따라 가면서

옛날 일을 떠올렸다.

늘 뒤에서만 따라오던 아내를

빨리 따라오라고 채근하며 휭하니 앞서가곤 했는데..

오늘 나는 산을 내려 올 때까지

그저 천천히 가자고

나를 좀 데리고 가라는 말만 했을 뿐...

 

 

그런데

도대체 봄 끝을 타고 피어오르는

파아란 생명들은

어디에 있다가 달려오는 것인지...

 

문득문득 만나는 소나무를 바라보다가,

겨우내 말라비틀어진 황량함으로 서 있다가 새파란 잎을 밀어내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든지 변한다는 것이다.

아니 변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죽어버린 것 같던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돋는 것처럼

마라톤 하면서

기록에서 여러 가지 기복이 있고

그래서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지만,

부상으로 오랫동안 달리지 못하여

영원히 달릴 날이 없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날렵한 발걸음으로

주로를 달리는 모습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날을 기다리며

혼자서 마음 속으로라도 마라톤을 생각하며

이미지트레이닝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고

혼자서 중얼거리고 산을 내려왔다.

 

바로 어제

꼭 그 순간에

구이에 있는 넓은 길에서는

평화동 미인 이정희 여사님은

서방님과 발맞추어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우리의 효삼군수님은

김진아님의 미소에 빠져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그 돈독한 부부의 정을 쌓아가는 두 부부는

여러 사람 기를 죽이면서

힘찬 데이트를 즐겼으니

 

아아, 그렇게 봄날은 가고 있었나 보다.

그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꼴찌부부 타령이나 하고 있는

평화팀장 김두홍님은

사랑에 젖어

이정희 여사님의 발걸음을 따라

꽃을 뿌리고 있었으면서...

 

달리지 못하는 사람의 심정은

여자들에게 예쁜 옷과 화장품을 주고

거울을 빼앗아버린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이라는 것을 헤아려주기나 할 건가?

 

언제

이 봄이 다 가기전에

부부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누가 더 이쁘게 달리는지,

누가 더 사랑스럽게 달리는지,

누가 더 이쁜 옷 입고 달리는지,

누가 더 황홀경에 빠져 달리는지,

누가 더 꼴찌인지

한 번 따지기나 해볼까나?

그러다가

못 참겠으면 풀코스까지 달려 버리고...

 

오늘 일요일

이 기가 막힌 아름다운 날씨에

발바닥이고 뒤꿈치고

확 뿌려치고

중인리 벌판을 달려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모악산을 오르는 심정이야 어디

누가 알기나 할 건가.

 

이제 주로에 나선다면

마눌님에게서

못 따라온다고 핀잔이나 받을 것이 뻔하고

이 길로 신발이랑 옷이랑

싼값에 팔아나 버릴까?

 

 

봄은 그렇게 왔는데

나는 아직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다.

 

모악산은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듬어 주었다.

바람도 한 자락

가엾다는 표정으로 나를 감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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