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문학

[수필] 새가 준 선물

힘날세상 2009. 7. 28. 14:22

새가 준 선물

 

                                                                                                                                    작성일 2002-01-10

 

오늘 아침 출근 시간에 여유가 많아서 모처럼 아침 달리기에 나섰다.  날씨도 확 풀려서 달리기에 아주 좋다. 일단은 삼천에 나가서 몸을 풀고 스트레칭을 하였다. 여름과는 달리 사람들이 별로 없다.

 

삼천교를 지나 오랫만에 둑길로 올라섰다.

 

아직은 잔설이 깔려 있고 바람만 황량하게 불어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상쾌하였다. 몸이 풀리기 시작하여 땀도 나기 시작하고 달리기에 아주 좋은 몸과 마음이다.

 

지난 여름 부드럽고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 부르던 새떼들, 늦은 밤 끊임없이 교향악을 연주하던 풀벌레들, 그리고 길가에서 아름다움을 다투어 자랑하던 들꽃들 모두 어디론가 몸을 감추어 버리고, 얼어붙은 둑길에는 오직 그래도 제법 날카로운 바람만이 인터벌을 하는지 때론 뾰족하게 때론 부드럽게 얼굴에 부딪는다.

   

겨울이라고 이렇게 얼어붙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지난 여름 이 곳 둑길을 환상의 달리기 코스로 만들어 주었던 그 모든 것들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어쩌면 계절이 조금 바뀌었다고 이렇게 매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얼굴이 화끈거려오는 것을 감지한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에 나의 속마음을 들키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너는 어떤가? 너는 날씨가 차가워졌다고 달리기 생활을 접어버리고 잔뜩 움추리고 있지 않은가?' 느닷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말 부끄러웠다.

 

인간은 지혜가 있고 사고하는 능력이 있어서 만물의 영장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간사하고 치사하고, 그래서 남을 속인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 철저하게 속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둑길이 끝나는 곳까지 달려가니 30분 정도 시간이 지났다. 몸상태를 점검해 보니 다 좋은 데 오른쪽 어깨가 아린 통증이 심하다. 요즘들어 심하게 겪고 있는 아픔이다. 대체로 어디로 가야 이 통증을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돌아오는 길 내내 어깨 통증에 달리기는 즐겁지 못했다.

 

육체의 고통은 정신까지도 뒤흔들었다. 이젠 결코 즐거운 달리기가 아니었다. 마음이 흐트러지니 주위의 사물도 흐릿하게 보인다. 둑길이 더 삭막하고 황량해 보였다. 이젠 더 이상 이곳은 달리기하기에 좋은 환상적인 코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엔 오직 통증만 있었을 뿐, 아무것도 없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는 아주 획기적인 것을 발견했다.어깨의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멈추어 서서 어깨를 돌리고 허리를 굽히고 하던 중, 문득 발아래 푸른 색의 풀포기 하나가 돋아나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아! 그렇구나! 녀석들은 더 좋은 여름을 위햐여 잔뜩 웅크리고 있었구나. 어디선가 새들은 목청을 가다듬고 있을 것이고, 땅 속 깊은 곳 어디에선가 풀벌레들은 아름다운 합창을 준비하고 있겠구나.'

 

나는 무릎을 쳤다. 조금만 사고의 시각을 바꾸어 보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자신의 틀에만 맞추어놓고 얼마나 다른 사람을 향해 독한 화살을 퍼붓고 있는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속에 뭔가 간직해 두고 싶은 것을 하나 건졌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송구영신 예배때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조금은 화답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어깨의 통증도 많이 완화된 것을 느꼈다.

  

신일아파트 밑 공터에 와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게이트 볼장을 지나오는데 새 한 마리가 고기를 잡아 올린다. 새에게 붙잡힌 고기는 햇살에 하얀 속살이 드러나 은빛으로 빛난다. 그렇다. 저놈들이 저렇게 겨울 동안 열심히 먹으면서 여름날을 위한 목청을 만들고 있구나. 그래 어서 많이 먹어라.

 

계단을 올라와 효림초등학교 후문을 막 지날 무렵, 나는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줄기 생각이 있어 발걸음을 돌려 그 새를 다시 바라보았다. 새는 조금 전 고기를 잡아먹을 때의 공격적이고 잔인한 모습을 감추고 세상의 번뇌와 아픔에서 완전히 초월한 듯한 고귀한 폼으로 서 있다. 수면에는 눈길하나 주지 않고.

 

새가 이러고 있을 때 새를 본 사람은 고귀한 자세만 바라보고, 온갖 찬사를 늘어 놓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언제나 다를 수 있다. 이제 그 새는 그 고기를 잡아 먹던 부리를 열어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율로 노래를 부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새를 보고 다시 순수니, 고귀함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면서 끝없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렇다. 모든 일은 본질과 현상이 같이 존재한다. 우리는 자칫 현상만 보고 본질을 본 것처럼 대한다. 그러면서 속고 속이고 숱한 삶의 애환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삶. 사실 이것이 언제나 모순 덩어리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거기에 힘을 더하는 것은 모든 것을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지독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우리 클럽은 지난 여름 심한 아픔을 겪었다. 서로가 상대를 바라본 시각의 차이와, 현상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했던 얄팍한 관찰력과, 모든 것을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던 아전인수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부드럼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그 입으로 잔인하게 물고기를 잡아 한 입에 삼키는 새처럼, 우리는 모두 이중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그일로 해서 우리 모두 성숙하는 새 해가 되기를 바라고 가치관이나처세관에 많은 성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모처럼 달리기에 나섰는데 쓸데 없는 생각으로 결코 즐거운 달리기가 되지를 못했다. 그저 그냥 주변을 바라보고 바람이 불면 부는구나, 햇빛이 비치면 비치는구나 하고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을. 달리면서 뭔가를 얻어오려는 욕심이 늘 발목을 붙든다.

   

그러나 나는 또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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