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일 다카야마 - 게로(10월 3일)
어젯밤 오늘 체크 아웃시간은 10시로 정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니 아내가 일어나 있었다. 산책을 나가자고 하니 피곤하다며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밖으로 나왔다. 비가 내렸는지 길바닥이 촉촉이 젖어 있다. 미야가와강변에서 열린다는 아침 시장을 구경하러 간다. 숙소 앞에서 강가의 방향으로 걸어본다. 비가 내린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프런트에 비치된 비닐 우산을 하나 들고 나왔다. 거리가 참 조용하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고, 바람도 한 줄기 없다. 빗줄기도 소리를 감추고 아침을 적시고 있다. 이렇게 고요한 아침이 있을까. 그래도 도시의 거리인데 정말 이렇게도 모든 것이 멈추어 있을 수 있는 걸까. 몇년 전 여름 오대산 주차장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 그 두껍고 두껍던 어둠과 적막,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고요와 적막이 생각났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 움직이는 것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나 혼자만이 살아있고, 나 혼자만이 움직이고, 나 혼자만이 굳어버린 시간을 흔들어 깨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설레임인가, 객창감인가, 또는 평안함인가.
걸음을 내디디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는 다카야마의 아침, 세차게 흘러가는 미야가와강물의 새뜻한 인사가 정적을 깨울 무렵, 커다란 도리이(鳥居)가 고요한 아침에 몰입되어 있는 마음을 깨운다.
숙소 앞 거리.
이 거리의 아침을 홀로 걸으며 속(俗)한 마음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미야가와강가를 걷다가 발견한 초대형 도리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신사의 입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워낙 큰 규모였다. 일부러 당겨 찍어봤다. 그만큼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마치 일본 열도가 덮쳐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광화문으로, 숭례문으로, 전주의 풍남문으로 맞서다가 지금 상황에서 걸만지 않다고 생각하여 익산 미륵사지에 우뚝 솟아있는 당간지주를 내세웠고, 법주사, 송광사, 금산사의 자랑스러운 일주문을 마주 세웠다.
다리를 건너가니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마치 수덕사 일주문을 향해 가는 것 같았다. 좌우로 늘어선 상가들과 강력한 흡인력으로 빨아들이는 신성한 분위기가 옷깃을 여미게 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선입견일까.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에 거부하고 1937년 9월 22일 스스로 폐교했던 우리 학교(전주신흥고등학교http://shmission.hs.kr/index.jsp?SCODE=S0000000707&mnu=M001)가 생각났을까. 어딘지 거부감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신사 입구에 섰다. 좌측에는 고산제옥태회관(高山祭屋台會館 Takayama Yatai Kaikan)이라는 표지가 걸려 있고, 우측에는 앵산팔번궁(桜山八幡宮 Sakurayama Hachiman-gū Shrine)이라는 표지가 걸려 있다.
여기에도 나무로 된 대형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돌로 된 도리이가 또 있다.
우리나라의 인줄을 연상하게 하는 줄이 걸려 있다.
도리이(鳥居)는 전통적인 일본의 문으로 일반적으로 신사의 입구에서 발견된다.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이 서있고 기둥 꼭대기를 서로 연결하는 가사기(笠木)로 불리는 가로대가 놓여있는 형태이다. 제일 위에 있는 가로대의 약간 밑에 있는 두 번째 가로대는 누키(貫)라 부른다. 도리이는 전통적으로 나무로 만들어져있고 대개 주홍색으로 칠해진다. 오늘날의 도리이는 돌이나 금속,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도리이는 불경한 곳(일반적인 세계)과 신성한 곳(신사)을 구분짓는 경계이다. 이나리 신사는 대체적으로 많은 도리이를 갖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종종 감사하는 의미로 도리이를 기부해왔다. 교토의 후시미 이나리 신사에는 이러한 도리이 수 천개가 있다.
도리이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고 몇 가지 다른 이론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앙 인도에 위치한 산치의 문인 토라나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토라나는진언종설립자 구카이가 신성한 의식에 사용되는 공간을 구별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학자들은 도리이가 중국의 패루(牌楼)나 한국의 홍전문(紅箭門)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도리이라는 단어의 기원 또한 불분명하다. 어떤 이론은 "닭이 머무르는 자리"를 의미하는 한자 "鶏居"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토에서 닭을 신의 전령이라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다. 다른 이론은 "통과해 들어가다"라는 뜻의 "通り入る(도리이루)"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도리이의 종류는 크게 신메이 도리이과 묘진 도리이로 나눌 수 있다. 두 형식을 나누는 기준은 기둥이나 가사기 등 주요 부재의 가공과 휘어짐의 유무이다. 신메이 도리이는 기둥의 광택과 가사기의 휘어짐이 없는 반면에 묘진 도리이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또한 묘진 도리이는 가사기 밑에 시마기(島木)라는 가로대와 중앙에 시마기와 누키를 연결하는 가쿠즈카(額束)라는 들보가 놓여있는 데에 반해 신메이 도리이는 그것이 없다.
- 출처 위키백과사전
신사에 대한 위키백과의 내용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82%AC_(%EC%8B%A0%ED%86%A0)
아주 커다란 우물. 이 물은 참배할 때 손을 씻는 용도이므로 마셔서는 안된다고 한다.
앵산팔번궁(桜山八幡宮 Sakurayama Hachiman-gū Shrine)의 본전(本殿).
앵산팔번궁(桜山八幡宮 Sakurayama Hachiman-gū Shrine)의 본전(本殿).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앵산팔번궁(桜山八幡宮 Sakurayama Hachiman-gū Shrine)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신사에서 있는 것만으로도 경건한 마음이 일었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경건한 마음을 가지려 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종교시설 앞에 서면 어딘지 모르게 경건하고 겸허한 마음이 깃들기 마련이다.
신사(神社)!
언론을 통해서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구니 신사를 참배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일로 인해 신사(神社)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 몇 번 왔지만 이렇게 조용한 아침에 신사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신사(神社)에 대한 선입견을 버렸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삶에 깊이 다져진 종교일 뿐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범(戰犯)들을 신으로 모셔놓았고, 그 전범들을 참배하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사실 이곳 앵산팔번궁(桜山八幡宮 Sakurayama Hachiman-gū Shrine)에 어떤 신을 보셔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신 앞에서 적아지는 존재라고 보면 오늘 내가 이곳에서 경건한 마음을 가져보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어디가지나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까지다. 나는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두 손을 모으고 참배하지는 않았다. 나는 독실하지는 않지만 기독교 사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본전 옆으로 길이 있기에 올라가려고 하니 계단을 청소하고 있는 분이 있다. "안녕하세요?" 목례를 하며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그분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자신에게 아침인사를 건넨다는 것은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한다. 아마 "오하요?"라고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인가 일본어로 한참 말을 했는데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이른 아침에 이곳을 찾아온 당신을 환영한다."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신사의 아침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때묻은 마음을 정갈하게 씻었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우리말로 말했다. 그분은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보였다. 외국 여행을 하다가 마주치는 외국인들이 외국어로 말을 해 올 때 나는 우리말로 대답을 한다. 물론 외국어를 모르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자기들 언오로 이야기하는데 내가 꼭 그 나라말로 대꾸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태국에 갔을 때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청년과 한참 동안 농담을 하면서 즐긴 일이 있었다. 그는 태국어로, 나는 한국어로 말했지만 우리는 서로 통했고, 서로 히히덕거리며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신사에서 내려와 마무 골목이나 막 돌아다녔다. 미야가와강의 방향만 잃지 않으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마치 우리 동네를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걷다가 보니 정말 작은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소형차인 마티즈나, 모닝보다 훨신 작았다. 일본일들은 이런 차를 타고 다니나 보다.
옆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차는 우리나라 레이 정도 되는 크기의 소형차이다. 둘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이 집 앞에서 대만에서 온 부부를 만났다. 아름다운 집에 매료되어 있는데 서투른 영어로 사진촬영을 부탁한다. 카메라를 받아 촬영을 해주는데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대화를 한다. 어설픈 중국어로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대만에서 왔다고 한다. 중국어로 소통이 안되면 영어도 하고 그것도 안되면 우리말도 해보고 하다가 하하호호 웃기도 하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은 나눌 수 있었다. 아침 분위기가 좋아서 흠뽁 즐기고 있다고 한다. 내가 갔던 신사 앞에서도 만났던 것을 생각하여 왜 가지 않았냐고 하니 거부감이 있어서 안갔다고 한다. 내가 가지고 있던 신사에 대한 선입관과 오늘 아침 신사에서 느꼈던 감정을 말하려고 했으나 짧은 중국어로 인해 소통이 되지 않았다. 여행 일정을 이야기하다가 시라카와고를 일정에 넣지 않았기에 설명을 해주니 꼭 가보겠다며 고마워했다.
길거리에 이런게 있어 자세히 보니 안에 불상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참 마음에 들었던 일본 집.
일본의 주택은 정말 작다. 넗은 마당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집에 눈길이 간 것은 딱 두 대 주차할 수 있는 공간과 그 옆에 있는 아주 작은 정원이다. 옆집과는 벽을 공유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 주택들은 이웃집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들이 얼마나 알뜰하게 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꼭 옳다는 것은 아니다. 좁은 집이지만 정원을 만들어 놓은 것은 여유로움일까. 일본 주택가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이지만 이들은 담장을 두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일본식 주택을 보면 역시 담장이 없다.
아침시장이 열리는 미야가와강변으로 왔다. 9시가 못된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직 장이 서지 않았다. 상가는 거의 다 문을 열어 놓았는데 천막을 치고 장사하는 노점상들은 아직 전을 펴지 않았다.
'궁천아침 시장'이라고 써 있다.
이 아주머니는 꽃을 진열해 놓고 앉아 있는데 물건 파는데는 관심이 없는 듯 가져온 책만 읽고 있다. 아주 매력이 있는 분이라고 받아들였었는데 나중에 다시 와보니 물건 파는데 열심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을 많이 진열해 놓고 있다. 이런 꽃은 관광객들이 사갈리는 없고, 아마 지역 주민들도 사러오는 시장인 모양이다.
강가에 늘어진 것은 버드나무일까. 이 부근을 돌아다니면서 맑은 물이 흐르는 데에 감동했다. 하기야 전주천도 아주 맑은 물이 흐르기는 한다.
시장을 빠져나와 단야교를 지나 또 다른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간다. 도중에 이런 시설이 있는데 종교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안내판에 무슨 보존구역이라고 써 있는 것으로 보아 전통적인 시설인 모양이다.
아주 커다란 양조장을 지나간다. 이것이 '사케'라는 일본 전통주를 제조하는 곳인가보다.
중교(中橋 Nakabashi)가 보인다. 인터넷에서 많이 보았던 빨간색의 그 다리이다. 다리 건너편에도 아침 시장이 선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중교를 건너게 된다.
다리 건너편 모습. 저 건물 뒤편 중교공원(中橋公院 Nakabashi Park)이고 그 뒤에서 아침 시장(陣屋前朝市)이 열린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이런 기념비가 있다.
중교공원(中橋公院 Nakabashi Park)은 교실 세 칸 정도의 아주 작은 공원이다.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것이 있다.
위 사진 좌측에는 이런 동상이 있다.
아래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나 일본어를 모르니...
중교공원 바로 앞에는 진옥(高山陣屋Takayama Jinya)이라는 거대한 저택이 있는데 그 앞에서 이루어지는 아침 시장이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과일과 마늘을 팔고 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빈 자리가 많았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보아도 시선을 끌어 당길만한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아침의 고요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든 시장의 소란스러움보다는 벌여 놓은 물건만큼의 소리만 오고갈 뿐이었다. 상인들이 아침을 먹으며 나긋나긋하게 나누는 말소리가 정겹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문득 '촌스럽다'는 말이 생각났다. 일반적으로 '촌스럽다'는
고산 진옥의 모습.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아침 시각이라서인지 문을 열지 않았다.
담장의 틈으로 들여다보았는데 정원이 잘 가구어져 있었다. 고산 진옥은 옛날 군주들의 사유지를 관리하던 관청이었다고 한다.
고산진옥 길 건너편에 있는 동상. 누구인지 알 수 있어야지....
아침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일본 라멘집. 아들이 찾아낸 맛집이라고 한다. 주차장 옆에 있는 작은 문이 출입구인데 정말 좁은 공간이라고 한다. 점심 때 찾아갔으나 문을 열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오니 아들은 아직도 자고 있다. 시간이 아까워 흔들어 깨웠더니 부시시 일어나며 한 마디 던진다.
"어른들은 자유여행의 참 맛을 몰라요. 여행 중에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곳이 숙소거든요. 그런데 그 숙소를 마음껏 이용하지 못해요. 비싼 숙소에서 실컷 자는 것도 의미 있는 여행 일정이거든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치관의 차이인가. 아니면 세대 차이인가. 없는 시간을 내어 여행을 왔으면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 보고 즐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숙소에 박혀 있느냐 말이다.
10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가방을 맡겨 놓고 숙소를 나왔다. 14시 38분 게로행 열차에 승차하기까지 일정은 내가 짜놓은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 미야가와강가에 열리는 아침 시장을 구경하고 팔번궁을 갔다가 점심 식사를 하고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동산유(東山遊步道)를 따라 걷다가 다카야마역으로 가는 것이다.
아침시장. 내가 돌아다닐 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설치해 놓은 노점이나 진열된 물건은 별 차이가 없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일본에 왔으니 타코야키도 사먹어 보고
계란으로 만든 것인데 빵도 아닌 것이 게란말이도 아닌 것이 맛이 있다.
아침에는 열어 놓지 않았던 다다미를 만드는 가게도 있었다. 다다미 만드는 것을 한참 구경한다.
팔번궁으로 올라가는 다리에 있는 커피숍. 단풍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집 거실에서 25년이 넘게 동고동락하고 있는 단풍나무가 생각난 것이다.
25년 전에 장성 백양사 뒤에 있는 백학봉을 오르다가 만나 인연을 맺은 이래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는 우리잡 거실의 단풍나무.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몸뚱이가 이제는 제법 엄비 손가락만한 굵기로 잘자랐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2011년 가을 화려한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써 놓았던 글이 생각난다.
팔번궁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세워 놓은 추엽사라는 작은 신사. 다카야마에서는 이런 구조물들을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팔번궁으로 올라가는 길.
팔번궁을 돌아보고 내려오다가 작고 앙증맞은 골목길을 만나 걸어본다. 바둑판처럼 갈림길이 많았으나 미야가와강의 방향만 기억하면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골목길을 따라 흐르고 있는 작은 수로에는 이끼가 끼어 있고, 물풀도 자라고 있다.
느릿느릿 걸으며 골목의 정취를 담아가면서 처음 출발지점인 단야교(鍛冶橋)에 왔다. 단야교 양쪽에는 이러한 조각상이 서 있다. 이 조각상은 족장상(足長像)이다.
이 조각상은 족장상 건너편에 있는 수장상(手長像)이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사전에 찾아놓은 라멘집으로 갔는데 문을 닫았다. 그래서 차선으로 찾아간 라멘집. 오사카에서 먹었던 라멘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일부러 라멘집을 찾아갔는데 결론은 폭삭 망했다.
참 소박하고 소박한 출입구. 주변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이 동네는 거의 모든 집이 이렇게 소박한 간판을 달고 있었다.
식당 내부. 4인용 탁자가 2개 있고 혼자서 먹을 수 있는 의자가 몇 개 놓여 있는 아주 작은 가게이다. 메뉴판에 사진이 었고 영어로 적어놓아서 주문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우리가 주문한 세가지 종류의 라면.
맥주도 한 잔 시켜서 분위기를 내보려 했으나 영 아니었다. 들어올린 면의 비주얼을 보아도 맛없게 생겼다. 덜 익은 컵라면 맛이었다. 오사카 라멘의 그 부드러움과 담백한 국물맛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덜 익은 듯한 면과 짭짤한 국물은 젓가락을 내려 놓게 만들었다.
아들 왈 "이 지역은 일본에서 음식이 가장 맛없는 동네라고 하네요. 그래서 라면맛도 그런 거예요."
점심을 먹고 동산유보도를 따라 걷기 위해 가다가 만난 기념물. 이런 형태의 기념품을 가게마다 팔고 있다.
걸어보고 싶지 아니한가.
뭔가 촬영에 열중인 아들. 서울에서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데 이 녀석이 결혼을 해야 내 마음이 개운할 것을.
동산유보도가 시작되는 불교 사찰 대웅사(大雄寺)광장. 뒤에 보이는 건물이 불교 사찰 대웅사이다.
절이라기보다는 가정집 같은 분위기이다.
이 계단을 올라가야 동산백산신사(東山白山神社)로 올라갈 수 있다.
중간에 있는 공동묘지. 이 묘지 좌측은 운용사라는 절이 있다.
뒤돌아본 시가지 모습
산곡대기에 위치해 있는 신사. 사용하지 않는 느낌이었고, 너무 호젓하여 무서움이 감돌기도 했다.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신사 한켠에 세워 놓은 동산유보도 안내판. 왼쪽 위 빨간 사걱형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이 현 위치이다. 이곳에서 빨간 선을 따라 한 바퀴를 도는 길이 동산유도보이다. 시간이 있다면 오른쪽 성산공원까지 돌아보고 싶었으나 게로행 열차를 타야 하는 관계로 중간 지점인 "천(千)카페"에서 멈추었다.
신사를 등지고 이렇게 내려오다 보면 '동산유보도'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안내판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곳곳에 이렇게 표시를 해 놓아서 길을 놓칠 염려가 없다.
이렇게 좁은 골목을 걷기도 하면서
천조사(天照寺)에 도착했다. 몇 개이 절을 지나왔는데 이 곳은 특별히 유스호스텔을 겸하기도 하였다.
단풍이 불들기 시작하고 있는 길을 지나
법화사(法華寺)종각. 우리나라 절의 종각 아래에는 공명음을 위해 커다란 구멍(위를 막아 놓았기에 보이지는 않지만)이 있는데 일본 절의 종각 아래에는 없는 것 같았다.
법화사의 전경
법화사를 지나서 만난 카페 "천(千)
라떼를 시켰는데
카페에는 2인용 탁자 2개와 6인용 탁자 한 개가 전부이다. 안 쪽으로 커다란 사각 테이블이 있기는 했지만 주인 할아버지이 공간인듯 했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이 자리에는 미국인 할머니가 혼자 앉아 있었다. 부인은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그대그때 느낌을 적는 모습이 여유로워보였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혼자 여행하는 할머니. 멋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금 후에 금발의 할아버지가 들어섰고, 주인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무잇인가 말을 주고 받더니, 아주 작은 디지털 카메라(요즈음 폰카메라에 밀려 나고 말았지만)를 가져와 노부주를 촬영을 해준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주인 할아버지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방명록 비슷한 노트를 내밀고 한 페이지씩 기록을 남겨줄 것을 부탁하고 있었고, 사진도 활영하여 그 페이지에 붙여 놓았다.
우리에게도 방명록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한다. 알량한 글솜씨지만 한 페이지에 감흥을 적어 놓았다. 사진촬영을 하고 카페를 나왔다.
21층에는 게스트하우스도 한다고 한다. 동산유보도는 카페 뒤로 이어지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멋진 소나무와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다카야마 도서관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일부러 찾아간 다카야마 도서관
도서관 이름이 우리나라말의 어감에는 이상한 <환장관>이었다.
벤치에 누워서 책이나 읽으면 딱 좋을 날씨다.
짐을 가지러 숙소로 돌아오다보니 이런 빵을 팔고 있다. 소고기를 넣어 만들었는데 특별하게 맛있지는 않았다.
다카야마 역에서 14시 38분에 출발하는 특급열차를 타고 게로로 행한다. 1번 플랫폼에서 승차하라고 표시되어 있다.
우리는 좌석을 지정받지 않는 자유석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아무 좌석이나 앉으면 된다. 자리를 잡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기존의 열차에 차량을 한 칸 붙여서 출발한다. 덕분에 좌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자유석 1호차라고 표시된 곳에 서 있으니 승차위치가 정확하다.
게로역에 세워 놓은 주변 등산 안내도. 실제로 숙소에 들어가서 보니 뷰가 정말 좋았다. 앞에 펼쳐진 능선은 가히 매혹적이었고, 시간만 있다면 능선을 따라 걸어보고 싶었다.
게오역에서 숙소인 수명관(水明館)까지는 걸어서 가도 10분이 채 안걸리는 거리인데 이렇게 셔틀버스를 가지고 와서 운전사가 <수명관>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댜. 앞으로 다가가니 리스트에 우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열차에서 내려 수명관으로 가는 손님은 우리 셋이어서 우리만 타고 수명관으로 갔다.
오늘 우리가 묵게 될 수명관.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한다. 한국에서 미리 숙소를 예약해 놓았고, 그때 카드로 결제를 했는데 실제로는 오늘 체크인을 하면 그때 결제가 된다.
로비에 걸려 있는 액자.
숙소에서 바라본 뷰. 백초산, 상암산, 고삼산의 산줄기이다. 시간이 있다면 저 산에 올라 능선을 걷고 싶었다.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하니까 여종업원 두분이서 안내를 한다. 방에 들어와서 일일히 설명을 해 준다. 영어로 하는데 온천은 세 곳에 있고, 각각 이용 시간, 이용 방법, 식사 시간 등에 대한 내용이다. 설명 후에 종이를 한 장 주었는데 거기에 그 내용이 다 적혀 있다.
오늘 숙소 내부. 한쪽에 소파가 있고
옆에 우리가 자게 될 다다미 공간이 있다. 식사는 이곳에서 하고 식사 후 온천을 하고 오면 그 사이에 자리를 펴 놓는다.
게로 시가지 모습
시가지로 나가보기로 했다. 걸어다녀도 도리만큼 아주 작은 시골 동네였다. 바람이 너무 불었다. 추워서 돌아다니기 싫었다. 찰리채플린 동상이 있는 다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놀다가 옆에 있는 편의접에서 간식거리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저녁식사를 7시 30분에 먹겠다고 해 놓아서 한 참을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식사를 방으로 가져와서 차려준다. 숙소 비용이 40만원(3인실 1박, 2식) 정도였는데 아깝지 않았다. 식사가 아주 좋았고, 온천물이 아주 좋아 피로를 완전히 풀 수 있었다.
유명하다는 이 지역의 히다규도 주었다.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는다. 사진 촬영을 많이 했는데 아들 카메라로 찍은 탓에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숙소 내부에 있는 대형 휴게실.
식사 하고 나서 9층 온천탕에 다녀왔고 자기 전에 1층에 있는 노천탕, 다음날 아침에 옆 건물 3층에 있는 온천탕을 이용했다. 늙었는가. 온천용이 참 좋다.
2017년 10월 3일 힘날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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