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문학

[꽁트] 여보 이러지마

힘날세상 2009. 7. 28. 12:52

 

여보 이러지마

 

1.

독한 년!

어떻게 여자가 저럴 수가 있어.

처녀 때부터 그런 면이 있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내가 이렇게까지 할 줄을 정말 몰랐다.

나미운 과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아내를 믿을 수가 없었다.

 

‘띠리리리리리릿’

일 주일을 고생하며 만들어 올린 기획안인데 과장한테 된 통 깨지고 나서 씩씩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미운아, 뭐하냐? 그래 회사는 다닐 만 하냐? 그래도 너의 능력을 인정받기만 하면 그게 좋은 회사다. 그러니까 열심히 근무해라. 오늘 저녁에 퇴근 후에 카페 ‘숲 속의 향기’로 나와. 기다릴게.”

숨돌릴 사이도 없이 자기가 할 말을 하더니 전화를 끊어 버린다.

자식 참 웃기는 놈이군. 이 자식은 꼭 이렇다니까. 지가 아쉬워 봐. 사정사정하고 난리를 쳐 쌓지. 뭔가 몰라도 지가 칼자루를 잡았다는 거겠지? 드런 놈. 그렇지 않아도 과장한테 깨져가지고 약올라 죽겠는 햇병아리한테 위로좀 해주지는 못하고 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이 치사한 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하고 나하고 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에서 알아주었던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게 뭐냐고. 드런 놈. 그래도 저는 윤리 성적이 거의 만점에 가까웠잖아. 그런 놈이 전화 예절도 모르냔 말이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공부 잘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그래도 철진이 녀석에게 투덜거리고 나니까 좀 시원했다.

다시 기획안을 들고 머리를 쥐어 짰다. 여기 저기 손 좀 보고 몇 군데 고쳐서 다시 올렸다.

“으응, 잘되었네. 이 사람아 아까 좀 잘하지 그랬어. 자넨 그래도 머리가 샤프하잖아. 처음이니까 그렇겠지만 신입 때부터 인물은 드러나는 법이야. 오늘 술 한 잔 할까. 좋아. 퇴근 후에 같이 나가지. 내가 좋은 곳을 알고 있거든.”

“저 과장님, 오늘 약속이.....”

“사람, 오늘은 나하고 같이 나가자고. 그렇게 알고 있겠네”

그러고는 의자를 휙 돌려 버린다.

오늘 참 치사한 사람 여럿 만나는구만. 더럽게 일진이 사나운 날이야. 별 수 없지 철진이 자식에게 못나간다고 말해야지.

“서철진 선생님좀 부탁드립니다.”

“지금 수업 중인데요.”

드런 놈. 꼭 이럴 대 수업을 하고 있냐. 잘 가르치도 못하는 자식이 수업은 무슨 수업이야. 실력 없는 선생한테 배우는 학생들이 불쌍하지.

“ 저 그러면 오늘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고 좀 전해 주십시오.”

 

 

“ 야, 미운아, 내가 사석이니까 말을 놓겠다. 괜찮지.?”

“그럼요. 과장님. 물론이죠.”

칫, 나도 30이 가까운 나이인데 반말이라니?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그래도 어쩌냐? 앞으로 지겹도록 모셔야 할 직장의 상사인 것을.

“ 너 말야. 내가 관심을 좀 가지고 있다는 것 알지? 열심히 해 보자구.”

관심이라니. 나를 인정한단 말야, 아니면 무능하니까 지켜보겠다는 거야. 어쨌든 술까지 사주는 것을 보면 좋은 쪽이겠지. 에라, 모르겠다. 인생의 비결이 아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좋아 아첨 정신으로 내둘러 보자.

“하이고, 과장님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저야 과장님 같은 분을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뭐든지 시키십시오. 분골쇄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 아무리 술 좀 먹었다고 해서 이런 자리에서 충성이 뭐야. 여기가 무슨 군대냐?

“미운아, 너 말야. 내가 좋은 여자 하나 소개하려고 하는데 어떠냐?”

과장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바라다 본다.

“ 저야 황송하지요.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다름입니다.”

 

그날 우리는 떡이 되도록 마셨고 어떻게 해서 집으로 갔는지 거의 기억이 없다. 술을 마시면서 나중에는 과장에게 형님 어쩌고 한 것도 같고, 술값을 서로 낸다고 우기기도 한 것 같은데 도대체 필름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또르르르르르릇

“총무과 나미.......”

“얌마 도대체 너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나를 무안하게 만들 수 있냐. 너 내 친구 맞냐? 너 같은 놈하고 친구를 한 내가 잘못이지. 하기야 고등학교 윤리 점수가 나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앞으로 어디서 만나면 형이라고 부르지도 마. 임마. 오늘로 우리 관계는 끝이다. 알았냐 이 드런 놈아”

철진이 녀석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쏘아대더니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철진이게게 전화를 걸었다.

“ 야, 그렇다고 그렇게 끊어 버리냐. 어제는 ......”

“시끄러. 이 바보 같은 놈아. 얘기하고 싶지 않아.”

이런, 웃기는 놈 봐. 뭔 얘기를 못하게 해. 사람이 약속을 어길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 가지고 그렇게 나오냐. 뭐 관계를 끊는다고? 자식. 그래 봐야 점심시간을 못 넘기고 전화하겠지. 내가 너를 자알 알지.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또르르르르르릇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을 무렵 전화가 왔다.

자식. 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 임마 오늘은 형님이 술 사주마.

“ 나미운씨죠?”

아니? 이게 무슨 조화여?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도대체 왠 여자가 전화를 다 하냐? 그것도 표독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야.

“그렇습.....”

“잔 말 하지 말고 오늘 퇴근 후에 ‘숲 속의 향기’로 나오세요”

철커덕.

전화를 끊어버리는 소리가 칼날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아프다. 이렇게 아플 수가 있을까?

참 미칠 노릇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정말로 미치고 댄스할 일이다.

 

2.

도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다짜고짜 ‘숲속의 향기’로 나오라는 거야? 참 도깨비한테 홀린 기분이로군. 미운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아무리 쥐어 짜 봐도 여자가 전화할 일이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지만 일단은 한 번 나가 봐? 아니 요사이 사기꾼들이 많다고 하던데... 이거 혹시 당하는 거 아냐?

그래, 철진이에게 물어 봐야지. 나의 어려움 앞에는 언제나 철진이가 있었다. 자식은 선생답게 머리가 명석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야, 철진아, 큰 일 났다. 어떤 여자가 글쎄....”

“누구시죠?”

철진은 능글맞게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장난 말고. 나는 지금 심난해 죽겠고만. 그러니까....”

“글세, 나가 누구냐니까요?”

“너 정말 이럴거야? 글쎄 어떤 여자가 말야....”

“누구신지 모르지만 전화 끊겠습니다.”

“야, 철진아, 얌마, 철....”

드런 놈. 그래 더럽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내 다시 너하고 눈을 마주치나 봐라. 치사한 자식. 그래 나도 나 혼자 살 수 있어. 임마.

 

카페 ‘숲 속의 향기’는 금천 저수지를 한 눈에 바라보는 곳에 앙증맞게 놓여 있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1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미운은 입구에서 일단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밀었다.

약간 두꺼운 톤으로 칠한 어둠이 실내를 더듬고 있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예스터데이라는 노래라고 생각이 되었으나 노래를 감상할 만큼의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저는 나미운인데요. 혹시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아뇨. 없었는데요.”

하기야 그렇겠지. 아직도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어떤 여자가 일찍 와서 기다리겠는가.

미운은 일단 호수가 잘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운은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기와 같은 성격을 참으로 싫어했다. 모든 일에 세심하고 철저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처리가 늦고 순발력이 떨어지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적극적이지 못했다. 말하자면 철저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바로 그래서 대학 때부터 여자 하나를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호감을 보여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미운은 여자를 리드하지 못했다. 여자 앞에만 서면 온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나미운씹니까?”

아! 올 것이 왔구나. 미운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당차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날렵한 몸매와 제법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데요.”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 남자닙까?

“예? 그게 무슨 소리....”

미운은 당차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 웬수같은 놈의 성격은 이런데서 금방 표가 나는 것이었다.

“당신이 뭔데 나를 바람을 맞히냐는 것입니다. 내말은.”

참, 기가 막힐 일이다. 아니 세상에 처음 본 여자가 밑도 끝도 없이 바람을 맞혔다고 몰아 부치니 이거야말로 환장할 일이 아니냔 말이다. 만약에 MBC 엄기영 앵커가 봤다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고 하였을 것이다.

“아니 바람이라뇨? 당신이 나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 무례를 하는 겁니까?”

미운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저항을 해야한다는 의무감같은 것이 들어서 일단 목소리를 최대한 높여서 대들었다.

“일단 앉읍시다.”

여자는 자리에 앉으며 어조를 약간 가라앉혔다.

미운도 자리에 앉을 수밖에.

그런데 이 여자 자세히 보니 괜찮게 생겼네. 성질이 괄괄하지만 않는다면 얼굴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였다. 어떻게 잘 꼬셔 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입은 탱탱 얼어붙은 동태마냥 열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어제 여기서 당신을 30분이나 기다렸단 말이예욧.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난 당신과 약속한 일이 없....”

“서철진 선생님 아시죠?”

철진이? 아니 이 여자가 어떻게 철진이를 알고 있지? 참 희한한 일이고만.

“아니 철진이를 어떻게 알죠?”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이예욧. 어제 여기서 당신을 소개해 준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당신은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고 나오지 않았잖아욧.”

“아, 그거요. 철진이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해버렸고, 내 의사를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는데... 갑자기 과장님이...”

“이보세요. 세상을 똑바로 살아욧. 알겠어욧. 남자가 그렇게 어리버리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욧.”

그리고 이 여자는 가을 바람에 낙엽이 날아가듯 휭하니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참 불같은 여자다. 어찌 저런 여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말이다. 철진이 자식은 어떻게 저런 여자하고 같이 근무하냐.? 그리고 저런 여자를 나에게 소개해 주면 어쩌자는 거냐? 나는 저런 여자하고는 절대로 같이 살 수 없을 것인데...

 

 

3.

정말 기가 막히다.

뭔 여자가 저러냐. 어찌 동방예의지국에 저런 여자가 살아서 돌아다닐 수 있단 말이냐? 하기야 나는 우리 어머니 외의 여자는 모르니까 그렇다고 해도 세상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나에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고.

띠리리리리릿.

철진이 자식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이 자식 일부러 피하는 거 야냐?

“서철진입.......”

“얌마, 너 이럴 수 있어.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구냔 말얏. 그게 어디 선생이냐? 조폭이지. 너 빨리 그여자가 누군지 말하고 전화번호 말해.”

“글세...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좋아. 너 내가 낼 너희 학교 가서 그 여자 가만 안 둘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흥분이 되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철진이 녀석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켁켁켁. 야, 너무 흥분하지 말고 낼 나하고 만나자. 만나서 자초지종이 뭔지 말해 보자고. ”

“시끄러럼마. 너하고 만나지도 않을 거야. 앞으로 더 이상 형이라고 부르지도 마.”

 

 

“야, 나미운. 무슨 일 있어? 왜 힘이 없어?”

결재판을 덮으며 이대로 과장이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예? 예. 뭐 그저... 별로 .... 아닌데요”

“자슥, 오늘 술 한 잔 사라. 너 벌써 며칠째 꼭 비루먹은 말마냥 맥이 탁 풀려 가지고는...”

 

 

“과장님. 세상에 일이 이렇게도 될 수 있습니까?”

술이 달아 오른 나미운은 과장에게 혀꼬부라진 소리로 찔러갔다.

“ 뭐야. 속 시원히 말해 보라구.”

“그러니까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요. 세상 천지에 이런 일이”

“얌마, 나미운. 도대체 뭔 일이 있었는가 말을 해보란 말야.”

참 웃기는 과장이다. 그렇게 쪽팔린 일을 어떻게 말하냐고? 부끄럽고 챙피한 일을 말야. 아무리 내가 술에 취했어도 말 못하지이. 암 절대로 못하고 말고.

미운은 세상이 참 웃긴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은 생각도 해 본적이 없고, 더구나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고 보니 정말로 미치고 팔딱 뛰겠다.

“야, 나미운. 넘마 힘 좀 내. 뭐가 그렇게 괴로운 일이 있냔 말야. 자식. 이게 다 여자가 없어서 그런거야. 여자가.”

아니 과장님, 지금 여자라고 했습니까? 여자? 여자 이야기도 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여자 때문에 죽겠습니다.

“아니 과장님, 여자는 무슨.....”

“자식, 좋아하는 것 좀 봐. 그래 좋다. 이번 토요일에 일찍 보내줄 것이니까 좋은 여자 한 번 만나보라구.”

 

 

“야, 나미운. 너 복장이 그게 뭐냐? 내가 지난 번에 여자 소개해준다고 말했는데... 정장을 하고 와야 할 것 아냐? 청바지가 뭐여, 청바지가.”

출근인사를 하자마자 과장이 쪼아댄다. 아니 술집에서 코가 삐뚤어진 상황에서 나눈 이야기를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자 만날 생각이 없으니까.

“아니 과장님, 저는 그냥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라서....”

“잔소리 말고 퇴근하고 옷 갈아입고 3시에 ‘블루 하우스’로 가. 가면 좋은 여자가 있을 거야. 잘해봐. 알았지.”

자식. 뭔 그런 것을 가지고 감동을 먹고 그래. 저렇게 순해 빠져가지고 도해를 당해낼까. 같이 산다면 볼만하겠는데...

이대로 과장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미운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과장 말을 따르자니 괜히 성질 내던 여선생 얼굴이 생각이 나 소름이 기치고, 안 따르자니 평생을 두고 과장한테 깨질 것이고. 미운은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문자로 진퇴.. 뭐라고 하는데 생각도 안난다. 그까짓 것 생각이 안나면 어떠냐. 지금 내가 그런 것 생각하고 있을 때냐. 그러나 성격상 꼼꼼하고 완벽한 것이 몸에 배어 있는 미운은 그 ‘진퇴..’ 뭐라고 하는 말이 생각이 안나 미칠 것 같았다. 이제 미운의 고민은 그 여자에서 그 ‘진퇴..’뭐라고 하는 한자 성어 생각으로 옮겨 갔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어쩌다가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 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단 말인가. 미운은 어느 코미디언 말처럼 어디론가 멀리 가버리고 싶었다. 지구를 떠나고 싶었다. 차라리 주민등록을말소하고 싶었다.

 

 

미운은 금강 하구둑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서 있었다.

금강 하구둑을 빠져 나온 탁류(濁流)는 도도한 몸짓으로 느릿느릿 서해로 흘러 들고 있었다. 일단은 여기까지 왔으니까 만나기는 하자. 과장 체면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놈의 청바지는 뭐라고 말을 하지. 실례가 될 것인데... 도도해라는 여자는 누구일까? 이름부터가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얼마나 도도한 여자일까? 아마 거만한 면이 있을까? 나하고는 정반대의 성격인데.... 에라, 모르겠다. 일단 부딫치고 보는 거지.

3시가 조금 지나서 미운은 블루하우스 문을 밀었다. 금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 블루 하우스는 토요일 오후를 즐기려는 연인들로 제법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도도해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종업원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그 여자는 창가에 앉아 아무 말없이 흘러 가는 금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이 손님이십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온 몸이 얼어 붙고 말았다. 도저히 한 발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은?”

바로 그 순간 낮부터 생각이 날 듯 말듯하던 말이 퍼뜩 떠 올랐다.

진퇴양난(進退兩難)!

 

4.

이것이 무슨 장난의 운명이란 말인가? 아니면 길 가다가 떨어지는 비행기에 맞을 일인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국민의 정부를 지나 참여 정부 시대에 말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세상에나 네상에나 푹신한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는 바로 그 여자가 아닌가?

 

‘이보세요. 세상을 똑바로 살아욧. 알겠어욧. 남자가 그렇게 어리버리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욧.’

바로 카페 ‘숲 속의 향기’에서 이렇게 쏘아 부치던 그 선생같지 않은 선생이 아니냔 말이다.

나는 엄청난 분노의 감정과 놀라운 마음과 조금의 공포의 기운이 온 몸을 휘어 감아 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거칠게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아니 ‘도도해’하는 이름도 특이한 그 여자를 날카로운 눈길로 찔러 갔다.

“나미운이요. 그 쪽이 도도해씹니까?”

나는 영화에서 본 무슨 조폭 같은 분위기를 풍겨 보려고 얼굴을 상당히 찌그러뜨렸다.

“이보세욧. 여전히 어리버리하군요. 깜냥에 조폭 분위기를 잡아 보겠다는 것인데 젖비린내가 진동을 하네욧. 괜히 폼 잡지 말고 앉으세욧.”

아니 이 여자가 사람이야? 어떻게 나의 마음을 이렇게 속속들이 다 들여 다 보냔 말야. 참 미치고 땐스할 일이 아닌가. 철진암마, 너 직장 옮겨라. 이런 여자랑 어떻게 같이 직장생활하고 있냐.

“참, 찬바람이 나는군요. 여자가 말야. 좀 다소곳한 분위기가 있어야지요. 다소곳한 분위기가 말야.”

“그래도 뭔가 폼을 잡으려고 한 모양이죠? 선 보는 자리에 청바지로 나온 것을 보면.”

아주 소설을 쓰고 있다. 그래 너 잘났다. 네 붓이 사각이다. 너야말로 베스트 작가가 되겠다. 웃기지 마 이 여자야. 내가 폼 잡으려고 그랬다고. 나는 여자라면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이야. (사실은 여자를 만나봤어야 진절머리가 나든지 말든지 하지.) 내가 숲 속의 향기에서 당신을 만난 이후로 그 카페를 가지 않는 사람이야. 처음 만난 여자에게서 그렇게 무지막지한 소리를 듣고 난 후 내 마음이 어땠는 줄 알아? 솔직히 말해서 무섭다고.

“그런데 서철진 선생님하고 동창이라면서요?”

하이고 수작을 부리고 있군. 불여우 같은 여자 같으니라구.

“고등학교 동창인데요.”

나는 도대체 이 여자와 어떤 운명이 맺어져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도대체 이대로 과장은 이 여자 도도해를 어떻게 안 단 말인가?

“이과장님은 어떻게 아슈?”

뭔가 좀 강한 인상을 보여야 될 것 같아 거친 말투를 사용하였다. 역시 영화를 많이 보아야 한다. 이렇게 아주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은가 말야.

“외삼촌이예요. 사실 전 결혼 할 생각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외삼촌이 하도 당신 얘기를 하면서 한 번 만 만나보라고 해서 나오긴 했지만....”

“그게 제가 할 소리올시다. 나야말로 여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수. 특히 당신과 같이 좀 드센 여자는 말이오. 서로가 힘든 시간 죽이지 말고 우리 각자 튿어집시다.”

나는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는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잠깐만요.”

오홋! 이 여자가 뭔가 할 말이 있구나. 그러나 나는 가야한다 이 말야. 미안하다 도도해. 거칠게 나갔던 내 작전이 들어 맞은 거라고.

나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블루 하우스를 나와 버렸다.

 

띠리리리릿.

“서철....”

“철진암마. 너희 학교 여선생 말야....”

“자식이 뭐가 그렇게 급해. 응 도도해 말이로군.”

철진이는 내 말을 짜르고 들어왔다.

“그 여자 괜찮은 여자야. 왜 만나고 싶냐?”

어? 철진이는 우리가 오늘 만난 것을 모르고 있구나. 그렇다면 오리발을 내밀어야지. 미안하다, 철진아 이러니까 요새 오리들이 물밖으로 나오지를 못하는 거야. 발이 있어야지. 다 잘라가고 말랴. 흐흐흐. 자식.

“야 너 한 번만 그 여자 얘기하면 나 금강으로 뛰어 든다.”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너 웃긴다. 네가 먼저 도선생 얘기를 했잖아. 그래 놓고선 왜 성질을 부리냐고. 너 도선생 만나고 싶은 거지?”

“아냠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갑자기 땀이 솟는다.

“자슥, 그래 언제 시간이 괜찮냐. 내가 자리를 만들어 볼게. 너는 그게 문제야. 네딴에는 뭘 감춘다고 하지만 그게 어설퍼서 그 모양이 아주 귀엽게 보인단 말야. 나는 그래서 네가 좋아. 그 어설픈 네가 말야.”

정말 미치겠다. 이것을 어떻게 말해야 한단 말인가. 오늘 일을 확 말해 버려. 좋아. 그래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은 철진이밖에 없으니까.

나는 미주알 고주알 오늘 일을 다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혹시 도선생인가 하는 여자가 내 얘기해도 네가 좀 막아 달란 말야. 알았지.”

 

 

“야, 나미운. 어제 아주 분위기가 좋았다며? 어때 도해 괜찮지? 사실 내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도해가 좀 거시기 해도 속은 안 그래.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 그렇데 당당한 것도 필요한 거야. 어때? 네 생각은?”

출근하자마자 이과장이 들이댄다.

“예?. 아, 예. 뭐 좋은 여자.....”

“그렇지. 너도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내가 딱 알아 봤다고. 아마 잘 살거야.”

과장님 헛물켜지 마십시오. 나는 그런 여자는 딱 질색입니다. 여자가 좀 부드러운 구석이 있어야지. 이건 꼭 선머슴애 같아가지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도도핸지 다다핸지 그 여자와 만났던 것도 벌써 한 달이 넘어 가고 있었다. 가끔씩 과장이 파고 들었지;만, 적당히 둘러대며 넘어 갔다.

 

띠리리리리릿.

“나미운입니다.”

“도도햅니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갑자기 밀려오는 무서움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왜? 무엇 때문에? 어째서? 무슨 이유로 도도해가 전화를 걸었단 말인가?

 

5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충격이라고 한다.

이럴 때 MBC 엄기영 앵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멘트를 할 것이다. 자다가 머리에 쥐가 날일이다. 아니 세상을 막 내두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온 몸이 갈래갈래 찢어져 터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여자는 지금 나를 희롱하고 있는 거야. 나를 가지고 놀고 있는 거라구. 맞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정말 미치겠다.

“지금 날 놀리시는군요.”

무슨 교향곡인 듯한 좀 싸구려 느낌이 드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나미운씨, 당신이 좋아졌다는 말입니다. 우리 결혼해요.”

미운의 가슴 속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북한의 양강도에서 일어난 폭발보다도 더 엄청난 위력을 가진 세상을 온통 무너뜨릴 것 같은 폭발에 싸인 미운은 자신의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도도해씨. 아니 도도해 선생님. 지금 당신은 ...”

도도해가 말을 짜르고 들어온다.

“나미운씨, 나는 말을 돌리거나, 마음에 없는 말은 못하는 성밉니다. 내 생각이 당신과 결혼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 말을 알아 듣겠나요?”

이런 제기랄, 틀림없이 이 여자는 불여우다. 꼬리가 아마 백 개, 아니 천 개, 만만만만만만 개는 달렸을 것이다. 나는 지금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확 깨어나버리면 된다. 미운은 볼을 사정없이 꼬집었다. 아팠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무지막지한 아픔이 가슴을 타고 흘렀다.

“나는 성질이 급하고 선머슴애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대학 시절의 나는 완전한 사내아이였지요. 남자애들과 술먹고 두드려 패고... 그 녀석들과 인사불성이 되어서 한 방에서 퍼질러 자고. 물론 녀석들도 나를 전혀 여자로 취급해 주지 않았지요. 나는 머리도 스포츠로 깎고 다녔어요. 혼자 남은 우리 엄마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것을 누가 데려 갈지 걱정이다’면서 한숨을 쉬곤 했죠. 그런 우리 엄마가 이 가을을 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그래서 요즈음 내내 나는 울고만 살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우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껴봤죠.”

아니, 이 괄괄한 도도해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투가 나온다냐? 그리고 저 울려고 하는 표정은 또 뭐고? 미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상심이 크셨겠군요.”

도도해는 카페의 창 너머로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를 한 번 바라다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를 타고 흐르는 그늘이 제법 두껍게 느껴진다.

“사실 전 혼자 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결혼 같은 것은 구속이라고 생각을 했었지요. 그래서 우리 엄마 속을 많이 썩여드렸죠.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장롱에서 곱게 싸둔 이 반지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

도도해는 반지 하나를 탁자에 올려 놓았다. 제법 큼직한 크기에 다이아몬든가 뭔가 하는 보석이 박혀 있는 것으로 남자 반지로서는 한 눈에 보아도 고급품이었다.

뭔가 말을 하긴 해야할 것 같은데 미운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반지를 보는 순간 엄마의 마음이 뭔가를 알았어요. 돌아가신 분에게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결혼뿐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으응. 그래서 만만한게 나였단 말인가. 내가 당신의 효도를 위한 제물이라 이 말이로군. 미운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큭큭, 우습네요.”

도도해는 가만히 눈을 치켜 들어 바라본다.

“그렇겠죠. 어찌 한심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당당하던 여자가 갑자기 꼬리를 내리고 있으니...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잖아요. 당신의 마음에서 솟구치고 있는 갈등이 뭔지 나는 다 알고 있지요.”

도도해,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당신 점쟁이야? 어떻게 내 속을 그렇게 들여다 보냐는 말야.

 

 

6.

나미운 과장은 룰루랄라 하면서 퇴근을 서둘렀다. 오늘이 열 다섯 번 째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국장님의 배려로 두 시간이나 일찍 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흐흐흐, 감동을 먹여 줘야지. 카페 숲 속의 향기가 지금까지 있었으면 거기가 딱인데... 그렇다. 하얀 마루도 괜찮을 거야. 그런데 이놈의 마누라가 그런 무드를 알아야지.

또르르르르르릇.

또르르르르르릇.

또르르르르르릇.

아니 이 여자가 왜 전화를 안 받지?

나미운은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 왔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중학생인 딸아이는 수학여행 중인지라 그렇다고 해도 도대체 이 여자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집안은 평소 그대로다.

미운은 일단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좋아, 그렇다면 오늘 즐거운 저녁식탁을 마련해 주지.

미운은 자신의 전매 특허 요리인 ‘연인들을 위한 발라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감자를 얇게 썰어서 볶은 다음 쇠고기를 다져 넣어서... 그리고 살짝 쪄 둔 대하의 껍질을 벗긴 다음....

미운은 하이얀 생크림과 녹차의 초록색이 잘 어울리는 케익과 와인도 한 병 사다가 놓았다.

철커덕,

문이 열리며 아내가 들어왔다.

투악, 투악

미운은 생일케익에 붙어 있는 폭죽을 연거푸 두 발을 터뜨렸다.

“아니 당신 언제 왔어? 그리고 웬 폭죽이야?”

아내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이대며 묻는다.

아니 이 여자가 지금 뭣하고 오는 거여? 웬 놈의 땀을 이렇게 흘리고 있는 거냐고.

“당신 무슨 일 있어? 그리고 복장이 이게 뭐야?”

아내는 잔소리를 말라는 눈초리를 보내며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아아아

아내가 샤워하는 소리를 밖에서 듣는 기분이 괜찮았다. 나미운 과장은 야릇한 기분이 온몸을 기어다니며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미운은 와인을 가득 따랐다. 촛불에 비치는 와인의 붉은 색이 타오르는 자신의 마음과 같았다.

“여보, 한 잔 하지.”

“이거 와인 아냐? 와인도 술은 술이지?”

“사람, 참, 와인이 무슨 술이야. 그냥 분위기 낼 때 쓰는 거지. 어때 러브샷 한 잔 할까.”

미운은 잔뜩 분위기를 잡아 갔다.

촛불에 비친 아내의 모습이 참으로 관능적이었다.

나미운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충분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해! 당신을 사랑해. 그리고 나와 결혼해 줘 정말 고마워.”

아내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호호호호. 당신 참 이쁘다. 아니 진짜로 귀엽다.”

옳거니. 분위기 좋고. 이 여자도 분위기를 눈치 챘군. 좋아 오늘 밤은 불타는 밤이다.

미운은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아 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 속에 희열이 넘쳐 오르는 것 같았다. 미운은 마지막 결정타를 한 방 먹여야 된다고 생각했다.

“도해! 촛불에 비치는 그대의 얼굴은 샤론스톤의 천만 배도 더 될 것 같소. 열 다섯 해 전 당신이 카페 ‘하얀 마루’에서 결혼해 달라고 하던 일이 생각나는군. 나는 그때의 당신 얼굴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거야. 그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달콤한 여자의 숨결이었거든.”

 

 

나미운은 죽고 싶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고. 나 같은 놈은 그저 죽어야 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단 말야. 그래서 사람들이 죽는 거로구나. 그래 죽다.

정말 웃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놈의 마누라가 그 좋아하던 술도 마시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그렇게 용기를 내어 영화 같은 분위기로 무드를 잡고 러브샷을 제의했건만 세상에 그렇게 단칼에 거절할 수가 있단 말이냔 말이다. 더구나 은밀한 내 손길을 홱 뿌리치고 등 돌리고 자는 것은 다 무엇이냐.

“여보, 나 말이야. 앞으로 석 달 동안 모든 것을 절제하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당신도 협조 해줘.”

“왜? 왜 그러는데? 무엇 때문에 석 달씩이나..”

나는 며칠 굶은 아이처럼 보채며 아내를 채근했다.

“나 사실 마라톤 시작했거든. 석 달 후에 풀코스 마라톤을 뛰려는 거야. 그 때까지 모든 것을 참고 금욕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응. 당신 협조해 줄 거지.”

이럴려고 내가 이 여자랑 결혼했냐. 도대체 무슨 마라톤이란 말여. 아니 자기가 무슨 이봉주여.

“아니 당신 제 정신야? 마라톤이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인 줄 알아. 아무리 요즘 마라톤 붐이 일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그게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하려는 거야. 아무나 할 수 있으면 나 도도해는 안하지.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 하는 거야. 알았지. 당신 내가 누군지 알지. 나는 도도해라고. 도도해.”

내가 어찌 도도해를 말릴 수 있을 것인가. 도도해는 자기가 한다고 마음 먹으면 하는 여자다.

그러기 때문에 그 여자가 나하고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내가 꼼짝 못하고 결혼하지 않았던가.

 

나는 아직도 도도해가 카페 ‘하얀 마루’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어찌 그 말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당신과 결혼합니다. 나 도도해는 한다면 하는 여자입니다. 이것은 우리 엄마를 위한 효도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당신과 같이 순진한 남자와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불현듯 떠오른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도도해가 나에게 한 말이다. 이게 어디 여자냐? 나의 삶을 강탈해 가는 조폭이지.

더 기가 막힌 것은 도도해가 우리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어머님, 미운씨가요. 좀 소극적이고 냐약한 듯해서 저 같은 여자가 도와줘야 하거든요.”

우리 어머니는 도도해의 한 마디에 홀딱 넘어가 버렸다. 아니 오해려 도도해보다 더 좋아했다. 두 여자는 짝짜꿍이 잘 맞어 가지고 일사천리로 혼사를 추진하여 버렸던 것이다.

 

도도해의 마라톤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석 달 후에 풀코스를 달리는 것으로 말이다.

 

7.

집안에는 오직 마라톤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니 도도해의 삶에는 오직 마라톤으로만 이어지고 있었다.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시간에 운동을 한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아내가 마라톤에 빠져 있다 보니까 세상이 온통 마라톤으로 보였다.

아내가 산 책만해도 부지기 수다. 마라톤. 마라톤 잘할 수 있다. 첫 마라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마라톤. 당신이 마라톤을 알아? 나는 달린다. 등등 단행본도 부족하여 이제는 런닝라이프라는 월간 잡지까지 구독하고 있다.

거실의 벽에는 외국 여자가 달리는 사진을 붙여 놓고 그 옆에는 훈련계획표에 뭔가 기록하며 난리를 피고 있다.

“아니, 이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지 않아. 이 집이 당신 혼자 사는 집이냐고? 당신이 마라톤 선수야.”

“선수가 아니니까 이러는 거지. 내가 선수였어봐. 아예 훈련 캠프를 차리지. 그리고 이 사진 건드리지 마.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이고 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 하니까”

뭐? 훈련 캠프? 이미지 트레이닝? 웃기고 있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처녀 때부터 꼬리가 달린 불여우라고 생각했었지만,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언제 잠잘 때 엉덩이를 다시 한 번 살펴봐야겠다. 분명히 꼬리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여우가 아니고서는 이럴 수가 없다.

아내는 완전히 돌아 버렸다.

오직 마라톤을 위해서 살고 있다.

부하직원이 잘못한 일로 상사한테 술 마실 기분도 안들 정도로 엄청 깨지고 나서 집에 왔는데 아내는 거실에서 새 운동화를 가지고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아니? 이 여자가 무슨 운동화를 가지고 이러는 거여?

“당신 인제 와. 오늘 힘들었지.”

그래 힘들어 죽겠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좋은 거냐?

“ 여보. 오늘 나 횡재했어. 글쎄 17만원 짜리를 12만원에 샀다니까? 마침 세일을 하더라고. 이것이 말야. 그 유명한 이봉주 마라톤화라는 거야. 어때 폼나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잘못들은 거로 생각했다. 설마 17만원 짜리 운동화가 있겠어. 7만원 짜리를 2만원에 샀다는 거겠지. 아니 그래도 그렿지. 무슨 놈의 운동화가 그렇게 비싸나고.

그날 밤 우리는 대판으로 싸웠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남남처럼 지냈다.

만약 중학생 우리 딸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정말 남이 되었을 것이다.

“아빠, 그래도 아빠가 이해해주세요. 풀코스에 도전하려는 엄마가 대단하잖아요. 그 용기가 다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 엄마의 영역이란 것도 있잖아요. 우리 힘껏 밀어 줘요? 녜?”

오냐. 그래 잘났다. 아주 모녀간에 살 판 났구나. 그래 둘이서 잘 해먹어라.

 

아내는 별 희한한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뭔 전주마라톤클럽인가 전마클인가 하여튼 전주에서 제일 가는 클럽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뭐, 마라톤은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나. 아니, 마라톤을 혼자하지 그럼 둘이 발 한 짝 씩 묶고 달리는 것인가?

파트랙이니, 지속주니, 크로스 컨츄리 등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해대기 시작했다. 물론 나하고는 안 통하니까 모녀간에 마주 앉아 난리를 피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까 딸년이 더 미워졌다. 아주 지 엄마하고 딱 붙어 히히덕거리는 것이 아주 한 통속이다.

그리고는 뻔질나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동호회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히히덕거리고 앉았는 것이다.

 

어느 날 아내가 그 잘난 여자 사진 옆 붙여 놓은 훈련 계획표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것은 경악이었다.

 

8.

마라토너 도도해 이렇게 훈련한다!!

 

1. 목표 대회 : 2004 춘천마라톤대회

2. 목표 시간 : sub-4

3. 훈련 캐치프라이드 : 나는 도도해다.

4. 훈련 스캐줄

월 소극적 휴식(가볍게 10km)

화 인터벌 800m * 3회 3셋트

수 적극적 휴식(이미지 트레이닝)

목 지속주 20km (5분 30초/km를 유지할 것)

금 크로스 컨츄리(모악산입구 - 금선암 10회 왕복)

토 소극적 휴식(파트랙 10km)

일 LSD 35km

5. 구입 장비

* 런닝복 : orae 160,000원

* 레이스화 : sortimagic 일본제품 220,000원

* 스포츠 고글 : 오클리 230,000원

6. 기대 효과 : 뜨거운 가족 사랑 정신

 

뜨거운 가족 사랑 정신 좋아하네. 지금 이렇게 해놓고 가족 사랑 어쩌구 할 수 있는 거냐. 해도 정말 너무 한다. 보십시오. 전주마라톤클럽 회원 여러분들 세상에 여자가 그것도 가정을 가진 여자가 이래도 되는 것이냐구요? 당신들 내 아내 돌려 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이게 죽기로 작정한 여자지. 응. 이 여자가 말야. 위의 훈련 계획표를 좀 보라구요. 내가 이런 말 안하게 생겼습니까? 이게 어디 마흔이 넘은 여자가 할 짓이냐고요. 회장님은 이런 여자를 당장 제명에 처하여 다시는 마라톤에 마자도 거내지 못하게 하십시오. 만약에 이 여자가 클럽에 계속 나가기만 하면 당신들을 모두 확....

나미운은 거의 미쳐가는 자신을 향해 발길질을 해댔지만 조금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국장님, 그래서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국장님은 조카니까 어떻게 좀 말려 주십시오. 제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가정을 이어갈 수 없다니까요.”

“이봐, 나과장.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잘 생각해 보자구.”

“아니 국장님. 이 대목에서 뭘 더 생각하냐고요? 좌우간 국장님이 소개한 여자니까 국장님이 책임지세요. 저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니까요.”

“자자자자 사람이. 그러지 말고 일단 한 잔 해. 자 ”

쭈우우우우우우우욱............ 탁

쭈우우우우우우우욱............ 탁

쭈우우우우우우우욱............ 탁

“구우욱장님. 이건 아니라고요. 이건 정말 아니라니까요.”

나미운은 국장이 잡는 손을 뿌리치고 술집을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

미운은 길가의 포장마차에 들어가 죽기로 작정을 하고 퍼 마셨다.

세상이 흐릿하게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그 흐릿한 세상 속으로 도해의 얼굴이 떠올랐다.

16만원 짜리 런닝복에 23만원 짜리 고글을 끼고, 22만원 짜리 솔티매직인가 뭔가를 신고 풀코스를 달리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흐흐흐 도도해. 그래 너 잘났다. 니 팔뚝이 굵다. 니 똥이 사각이다. 니 똥은 칼라다. 뭐, 마라톤. 웃기지 말라고 해.’

어머니.

어머니였다. 도도해를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노인네는 분명 어머니였다.

‘크크크 모두가 한 통속이로구나. 그래 조오타. 나만 빼놓고 모두 한 통속이로구나. 우리 어머니마저 도도해에게 걸리고 말았구나. 크흐흐흐’

 

하느님. 어쩌자고 이런 여자를 세상에 내놓으셨나요. 대체 이런 여자도 사람입니까?

지금 나더러 아내를 이해 못한다고, 마라톤을 왜 그렇게 모르냐고 욕하는 전마클 여러분들. 당신들도 똑 같은 사람들이오. 당신 같으면 멀쩡한 여자가 희멀건 허벅지를 다 내놓고 길바닥을 달린다면 좋겠소?

아내가 사다 놓은 런닝복을 본 나미운은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소위 탑이라는 윗도리는 완전히 브래지어였으며, 아랫도리는 완전히 수영복이었다.

“당신 지금 이것을 입고 달리겠다는 거야?”

“당연하지. 운동복인데...”

킄킄킄.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세상에 아무리 도도해라고 하지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스 올림픽 때 마라톤 하는 여자들을 보더니 이 여자가 회가 동한 모양이다.

그렇겠지. 천하에 도도해가 어디 남을 의식하겠나고.

그래도 미운은 싫었다.

여자 마라톤을 보면서 거의 다 드러난 여자 선수들의 몸을 보면서 얼마나 성적 쾌감을 느꼈던가. 그렇다면 도도해가 달릴 때 뭇 남자들이 그런 시선으로 바라볼텐데... 안된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내는 이제 밤에도 달린다.

이름도 좋다.

‘달빛 가르기.’

도대체 이런 요상스런 이름을 지어내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남의 아내를 꼬여 내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이냐.

아내는 완전히 미쳐 갔다.

그렇게 비가 내리는 날, 아내는 중인리로 달리러 간다고 했다. 빗줄기를 맞으면서 달리는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창피해서 같이 못 살겠다.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어라. 니 맘대로 해 먹어라.

 

9.

“여보. 이제 한 달만 참아. 알았지. 나도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한 달만. 부탁해.”

내가 무슨 홀애비냐.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나도 그렇지만 아내도 참 대단하다. 한 번 다짐한 것은 지켜야 한다며 술 한잔 입에 대지 않았다. 나의 유혹도 단호하게 뿌리쳐 버렸다.

“그런데 여보. 이왕 이렇게 된 것 나 한 번만 도와 주라. 응?”

“그래 뭘 도와 주는데”

“당신 이번 수요일에 쉬는 날이잖아. 그날 나 운암에서 달릴려고 하는데 차타고 따라오면서 써빙 좀 해줘.”

아니. 내가 무슨 술집 웨이터냐. 써빙이나 하게. 아주 지맘대로군.

“써빙 같은 소리하고 있네.”

“으응. 그러니까 급수 좀 해달란 말야.”

나미운은 차를 몰고 운암으로 갔다.

“오늘 달릴 거리는 40km야. 운암 중학교에서 시작하여 운암 호수를 따라 달릴 것이거든. 아마 쌍치가는 갈림길까지 가면 될 거야. 정산리라고. 경치도 좋아서 달리기 좋을 거야.”

운암 중학교에서 아내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도 쿨맥슨가 쿨맥준가하는 반팔 셔츠에다가 헐렁한 반바지를 입고 나선다. 미운은 그놈의 아슬슬한 옷을 입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으나 다행이었다.

“자 지금부터 당신은 내 뒤를 따라오면서 5km 마다 포카리와 물을 번갈아 가면 주면 되는 거야. 그리고 5km 통과하는 시간도 정확히 기록해야 해. 알았지?”

그래 알았다. 도도해 너 잘났다.

미운은 앞에서 달리는 아내를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았다.

언덕길이 만만치가 않았다. 자동차로 올라가는 것도 버거운 오르막을 도해는 잘도 달려 올라간다.

저게 어디 사람이냐. 하이고 저 땀 좀 봐. 저렇게 힘든 짓을 뭐하러 하냐고.

마운은 타코메타를 보면서 5km지점에 섰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봤다. 24분만에 아내는 도착했다. 그러나 전혀 힘든 표정이 아니다.

“괜찮아? 힘들지 않냐고?”

“지금 몇 분이야?”

아니 이 여자가 힘드냐고 물어보는데.. 그까짓 시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 24분이야. 나 우선 물부터 한 잔 마셔보라고.”

나는 시원하게 얼음에 채운 물을 한 잔 권했다.

도해는 아주 여유 있는 표정으로 물을 받아 마시더니 그냥 달려 나간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내가 지금 완전히 아내의 뒷바라지나 하고 있지 않은가?

앞에서 달리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차를 운전하는 미운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아내 뒤를 따라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내는 다시 오르막을 달리기 시작한다. 벌써 10km도 지났다. 시간은 22분. 그렇다면 아내는 더 빨리 뛰고 있는 것이다.

 

운암대교를 지나는데 옆으로 모텔이 보인다.

앞에서 달리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다가 미운은 불쑥 웃음을 웃었다.

 

10.

 

아내가 카페 ‘하얀 마루’에서 결혼하자고 말하던 그날.

나는 아내의 어처구니 없는 발언에 어안이벙벙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아내가 반지를 꺼내면서 그늘을 보였을 때 미운은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미운은 뭔가 도도해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도해는 차를 몰아 금강으로 달렸다. 금강하구둑 주차장에 차를 세운 도해는 아무 말도 없이 강변을 따라 걸었다. 미운은 어정정한 폼으로 도해를 따라 갔다.

탁한 강물에 비치는 가로등이 왠지 슬프게 느껴졌다. 바람이 한줄기 불어와 도해의 머리칼을 날렸다. 긴 머리가 바람에 날리자 도해의 하얀 목덜미가 불빛에 드러났다.

미운은 갑자기 성적 충동을 느꼈다.

 

“미운씨, 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 예. 뭐 그저. 그러니까”

갑작스런 도해의 질문에 미운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미운씨, 사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해요. 당신의 자신의 의견을 바로 드러내지 않지요. 물론 그것이 소극적 성격 탓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에게 실수를 하는 일은 드물잖아요.”

도해는 눈물을 짓고 있었다.

“저는 저의 성격에 아주 불만이 많아요.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은 아빠에게서 받았어요. 저의 아빠..... 흑흑. 그 불같은 성격 탓에 아빤 돌아가신 거예요.”

“도해씨..”

미운은 자기도 모르게 도해씨라고 불러 놓고는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다행이 도해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기에 자신의 표정을 들키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아빤 성격이 매우 급했죠.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는 분이셨어요. 목소리 또한 퉁명스러워서 남들에게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오해를 받는 일이 많았죠.”

도해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지었다. 나는 뭔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열어지지 않았다.

“그날도 아빠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는 젊은이를 훈계하셨는데그만 그 젊은이가 휘두른 흉기에.....흑 흐윽.”

“아 그랬군요.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까.”

미운은 도해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마치 자기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위로했다.

“저는 그런 아빠를 그대로 닮았어요. 한 때는 터프한 것도 하나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다녔으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세상에 나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정말이지 세상이 무서웠어요. 서철진 선생님과 만나기로 한 날도 엄마의 상복을 벗고 학교에 출근한 날이었는데, 서선생님이 위로해 준다고 마련한 자리였지요. 서선생님과 미운씨에 대해 애기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선생님 반 학생이 사고를 내는 바람에 급히 달려갔고, 저 혼자서 미운씨를 기다리고 있었죠.”

도해의 말끝에는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런 일이. 전 그때 도해씨 외삼촌이신 이국장님에게 끌려서 그 자리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죠. 철진이가 조금만 귀뜸을 해 주었어도......”

 

“미운씨 절 좀 안아주시겠어요.”

미운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온 몸이 그야말로 덜덜덜 떨렸다. 여자를 어떻게 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일단은 도해를 위로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운은 손을 돌려 도해의 어깨를 감쌌다. 알싸한 향기가 도해에서 묻어 났다. 미운의 가슴은 쿵쾅쿵쾅 날뛰기 시작했다.

“미운씨 절 좀 잡아 주세요. 저는 이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요.”

그날 미운과 도해는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도해가 면사포를 쓰고 걸어 들어올 때 미운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커다란 백합 한 송이가 자신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둘의 결혼 생활은 달콤했다.

도해도 그 성격이 남아있긴 했지만,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많이 중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도해가 갑자기 마라톤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석 달 만에 풀코스를 달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남편에게 써빙까지 시켜가면서 저렇게 고갯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10

미운은 도해를 이해하고 싶었다.

도해가 저렇게 달리고 있는 것은 분명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원래 운동하고는 담을 쌓고 있는 휴일이면 방에서 뒹글면서 TV나 껴안고 보내는 미운의 입장에서 보면, 아내가 운동을 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 이제 25km를 달린 거야. 시간은 2시간 49분. 이제 그만 달리고 쉬라구. 자 포카리 좀 마셔.”

도해는 다리를 두드리며 땀을 비오듯이 흘렸다. 미운은 자신이 숨이 가빠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 괜찮겠어?”

“괜찮아요. 내가 그래도 여고 때 좀 달렸었거든요. 그 땐 한 참 ‘달려라 하니’를 꿈꾸기도 했지요. 아직 연습이 부족하고 근력이 부족하여 그래요. 오늘 훈련은 대성공이예요. 거리가 늘어갈수록 다리에 힘이 없어 못 달리겠더군요. 그러나 걱정 마세요. 앞으로 한 달이나 남았으니까 충분할 거예요.”

돌아오는 차 속에서 미운은 도해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 도해는 완전한 선수였다.

미운의 적극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운은 자기과 부하 직원을 구슬려 토종꿀을 한 병 얻어다가 도해에게 주었다. 인터넷을 뒤져서 파워겔인가 파워걸인가 하는 것도 사다 주었다.

도해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때는 미운도 그 옆에서 운기조식하면서 아내와 호흡을 맞추었다.

도해는 무지막지하게 달렸다. 인터벌인지 뭔지 한다고 운동장 트랙에서 혀를 빼물고 달리는 도해를 보면서 미운은 차라리 자기가 그 고통을 겪고 싶었다. 고통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같이 달려 보았으나 100m도 못 가서 미운은 주저앉고 말았다.

햐아! 빠르다. 아니 여자가 이렇게 빨리 달린단 말인가. 미운은 도해가 달리는 속도를 측정해 봤다. 400m 트랙을 한 바퀴 도는데 대략 2분 정도 걸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1km에 약 5분, 이대로라면 풀코스는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는 말인데...

도해는 800m를 4분 정도로 달리고 다시 한 바퀴는 천천히 달리는 것을 3번을 하고는 멈추었다.

도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보. 괜찮아? 힘들지 않아?”

미운은 걱정이 되었다. 저렇게 숨이 가쁘게 달리고도 괜찮다는 말인가?

독하다. 정말 도도해 독하다. 내가 처녀 때부터 그런 줄 알긴 했지만 이렇게 독한 여자인 줄은 몰랐다.

 

미워도 자기의 아내이고, 좋아도 자기의 아내이기에 미운은 아내의 훈련장에 시간만 있으면 따라 나섰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서서히 달려 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100m도 못달리던 것이 이제는 400m 트랙을 세 바퀴까지는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주워 들은 풍월로 인터벌이니, 파트랙이니, 크로스컨츄리 같은 용어들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드디어 춘천마라톤대회가 열리는 전 날 미운은 춘천으로 차를 몰았다. 마침 춘천 세종호텔에 친구녀석이 근무하고 있었기에 숙소는 걱정하지 않았지만 도해와 미운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춘천까지 간 김에 청평사에 한 번 가보자고 도해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소양댐에서 배를 타고 10여분이 조금 지나면 바로 쳥평사이다. 청평사의 가을은 그야말로 환상 그자체였다. 멀리서 보면 온통 붉은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붉은 색만이 아니다. 황(黃),록(綠),등(燈)이 어울어진 색의 스팩트럼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당신, 나 사랑해?”

옷을 벗어 쥐어 짜면 붉은 물이 주르르 흐를 것 같은 숲 속을 거닐던 도해가 뜬금없이 말을 건넨다.

아니 이 여자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분위기를 타고 있나.

“응? 으응. 그, 그렇지. 사랑하지. 근데 갑자기 웬 사랑 타령이야?”

“나도 당신 사랑해.”

 

도해는 발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미운의 품에 안겼다.

“여보. 사랑해.”

미운은 가만히 도해를 안았다.

처녀 때부터 솟아나는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당신 내가 왜 마라톤을 하는 줄 알아?”

“글세.. 그러니까 나도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었지.”

 

 

11.

고등학교 1학년 때 도해의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나자 도해의 어머니는 도해 남매와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도해의 어머니는 섬유 공장에서 늦게까지 일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도해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는 고집을 부렸다. 어미니는 어떻게든 두 남매를 대학은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도해에게 취직이 빨리 되는 교육대학에 가라고 권하였다. 도해는 고민을 하였다. 자기의 꿈을 접고 어머니를 위해서 교대에 갈 것인가, 아니면 당장은 어려워도 자기의 생각대로 국문과에 갈 것인가. 도해는 며칠을 몸부림치다가 자기의 갈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도해는 가난 속에서 가슴저림을 하는 어머니를 놓아 두고 서울로 진학을 하였다.

도해의 서울 생활은 쉽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는 처지이고 보니 모든 것을 자기가 해결해야 했다. 도해는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은 온통 고난의 연속이었다. 술집 같은 곳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지만, 도해는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도해는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교직과정을 이수하며 또한 시나리오 작가의 꿈도 이어가려는 것이다.

도해가 전주에 내려와 교단에 선 지 2년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도해는 태평양 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흘렸다. 상을 치르고 나자 복학을 준비하고 있는 동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누나는 정말 지독한 사람이야. 누나의 꿈을 위하여 우리를 버리고 서울로 간 누나를 나는 무척 원망했지. 엄마는 그런 나를 질책했지. 그러나 나는 엄마의 눈물을 여러 차례 봤어. 그것은 어쩌면 누나가 만든 눈물이야. 나는 누나를 미워했어. 사실 지금도 누나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좋지 않아.”

도해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꿈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엄마는 추레한 옷차림으로 섬유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잘 살거라. 나서방이랑 너만 행복하면 나는 괜찮다.’

그리고 엄마는 허리를 두드리며 커다란 헝갚 뭉치에 싸여 버렸다.

 

도해는 잠에서 깼다. 땀으로 목욕을 한 듯하였다.

엄마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죄의식이 밀려 왔다. 엄마를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도해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도해는 어떻게든 속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해는 자신도 육체적 고통을 통해 엄마의 아픔을 느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한 것이 마라톤이었다.

여학교 때 도해는 달리기를 제법 잘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달리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한 번 달려보는 거야.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온몸을 흔들어 대는 고통을 느껴보는 거야.’

 

“그래서 마라톤을 시작한 거야?”

“응, 어떻게든 4시간 안에 달려보려는 것도 내게 가장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려는 거야.”

미운은 도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도해는 흐느끼고 있었다.

“여보. 그런 일은 당연히 나하고 의논을 했어야지.”

“말해봤자 당신은 못하게 했을 거잖아.”

“물론 그랬을 거야. 그러나 다른 방법을 찾아 볼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여튼 말야. 내일은 열심히 달려.내가 응원해 줄게. 그리고 그 고통에 나도 동참하고 싶어. 당신 마음 이해하고 싶어.”

청평사의 가을은 고요속에서 익어 가고 있었다.

 

 

11.

2만명이 넘는다는 사람들이 모여 든 춘천 종합운동장은 그야말로 마라톤의 메카였다. 우리나라 아마추어 마라톤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춘천마라톤대회. 그 인기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의암호를 끼고 도는 환상적인 코스와 가을에 대회가 열린다는 것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까닭이다.

도해는 출발선에 섰다. 말이 출발선이지 기록대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 기록도 없는 도해는 대열의 맨 끝에 서야 했다. 웬지 가슴이 두근거려 왔다. 갑자기 소변을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 화장실에 갔으나 그것은 느낌이었을 뿐, 도해는 소변을 보지 못했다.

‘아, 이것이 초심자가 갖는다는 심리적인 긴장이로군.’

도해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여보, 열심히 달려. 나는 당신을 믿어.”

 

 

출발신호가 떨어졌다.

마치 하나의 물결이 빠져나가는 듯이 거대한 흐름이 이어진다.

도해는 첫발을 내디뎠다.

도해는 달렸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이 달렸다.

허벅지가 바늘로 찔러오는 듯한 통증에 몇 번이고 그만두려는 생각이 들었으나, 도해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춘천댐을 지나고 소양교를 지나면서 도해는 자신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춘천종합운동장에 들어섰다.

트랙을 한 바퀴 돌면 이제 마라톤은 끝이 나는 것이다.

“여보, 힘내라고. 당신 잘했어.”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해는 눈물이 흘렀다.

트랙을 한 바퀴 돌면서 도해는 수 없는 시간들이 거슬러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자신의 대학시절, 미운을 만나던 날...

저 앞에 결승선이 보인다.

도해는 자신이 마음 먹은 하나의 일을 했다는 생각에 갑자기 다리가 풀리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도 남편의 목소리는 똑똑하게 들렸다.

“ 도해야 , 사랑해.”

 

도해는 울고 있었다.

미운은 그런 도해를 안고 같이 울었다.

미운은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울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 미운은 이를 물고 있었다.

‘독한 사람, 3시간 42분만에 달리다니... 그래, 도해 당신은 정말 무서운 여자야.’

 

미운은 핸들을 꽉 움켜 잡았다.

최대한 차를 조심하여 몰아 잠이 든 도해를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피곤에 지쳐 잠이 든 도해의 얼굴은 천사표였다.

‘도해, 사랑해.’

 

“여보, 나 또 달릴 거야”

언제 깨었는지 도해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넨다.

“무슨 소리. 이제 됐어. 그만하면 당신이 생각한 것을 다 이룬 셈이라구.”

“그렇지 않아. 춘천호반을 달리면서 생각한 건데, 인생은 어차피 달리는 거야. 달리고 또 달리고. 이제 우리 같이 달리자. 당신도 달릴 수 있어.”

“나는 싫어. 그 지독한 고통이 싫어.”

“미운씨, 오늘 마라톤을 하면서 부부가 나란히 달리는 것을 보았는데, 정말 아름답더라구. 당신의 가슴에 담겨 그 길고도 긴 레이스를 펼칠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일 것이고, 그것은 사랑일 거야.”

 

도해는 다시 잠이 들었다.

미운은 차를 세우고 도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참으로 예뻤다.

미운은 그런 도해의 입술에 살짝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사랑해, 도해. 어쩌면 나도 달릴 수 있을 거야. 당신과 함께라면’

 

그들을 실은 자동차는 어둠을 헤치고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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