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문학

[꽁트] 아내는 모를거야

힘날세상 2009. 7. 28. 12:45

꽁트

 

아내는 모를거야

 

 

 

1.

아침부터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아내가 사다 놓은 싸구려 샴푸는 제쳐 두고 어제 화장품 가게에서 사온 ‘윤나리 허벌’ 샴푸를 아내 몰래 가지고 들어가 정성껏 머리를 감았다. 면도도 깨끗이 하고 아내가 가끔씩 사용하는 ‘폼클랜징’인가 ‘클랜징 폼’인가를 손에 묻혀 얼굴도 씻었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와 휘파람까지 불어 가며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번쩍번적 광(光)을 내었다.

전신을 비춰 주는 거울 앞에서 수건을 이용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던 아내가 묻는다.

“당신,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 아침부터 아주 신바람이 났네.”

 

아내!

언제나 그저 그런 모습인 아내 최명자!

그녀는 한 번 움켜 쥔 돈은 절대로 내놓지 않는 ‘짠순이’로 정말 지독할 정도로 구두쇠에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물론 그런 아내 덕에 그래도 조그마한 집이라도 마련했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아내에게 뭔가 권태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들처럼 향내나는 화장품도 좀 바르고, 속살이 비칠 듯 말 듯한 하얀 바지에 허리선이 드러나는 날렵한 옷도 좀 입으면 좀 좋아! 이건 정말로 시골의 아낙 마냥 늘 펑퍼짐하고 무릎이 나올대로 나온 츄리닝에 언제 미장원에 다녀왔는지 까치집을 지어도 몇 번씩 지었을 머리를 하고 있으니 어느 누가 그런 아내를 이쁘다고 하겠는가 말이다.

도대체 이런 여자들만 있으면 미장원이고, 옷가게고, 화장품 가게까지도 온통 보따리 싸고 말 것이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 판에 이렇게 가게들이 문을 닫고 나서면 나라 살림이 더욱 어려워 질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라를 망치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어쩌다가 아내에게 그런 말이라도 할라치면 현진건의 소설 <B사감 러브레터>의 B사감처럼 도끼눈을 뜨고 날카로운 시선을 찔러대며 덤벼든다.

“ 아 내가 어디가 어때서. 당신 나라도 만났으니까 이 정도로 사는 줄 알어. 내가 움켜 쥔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집도 샀고, 아이들 학원이라도 보내는 줄 알라고. 그리고 어머님이 칭찬하는 것 못들었어? 우리 집안을 이어 받을 훌륭한 며느리라고 말야. 감사한 줄 알라고. 알았어?”

맞다. 맞는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 어머니와 쿵짝이 잘 맞는지 고부(姑婦)간에 손발이 척척 맞는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아내에게 늘 하는 말이 하나 있다.

“ 영찬이 애비 잘 먹여라. 그래도 우리집 대를 이어갈 기둥이니께. 몸이 튼튼해야 가정이 행복한 것이여. 철마다 보약이라도 지어 줘라잉.”

그러나 우리 아내가 어디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인가?

“ 어머니, 밥이 보약이예요. 영찬이 아빠는 밥을 잘 먹어도 너무 잘먹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마라톤을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가족과 같이 놀아 주지 않고 날마다 마라톤만 하냐고 따지면 마라톤은 보약이라며 저더러 같이 운동하자고 하거든요. ”

이렇게 간단하게 넘겨 버린다.

 

마라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내가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자꾸만 늘어나는 ‘배둘레햄’ 때문이었다. 몸이 너무 무거워 직장 일로 사람들 만나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어떻게 살이라도 좀 빼야겠다는 생각에 삼천에서 달리기를 해보다가 세내교 밑에 붙어 있는 프래카드를 보게 된 것이 내가 마라톤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동기이다.

전주마라톤클럽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마라톤? 저걸 한 번 해 봐. 안돼. 내가 어떻게. 테레비서 보니까 이봉주도 온갖 고통을 안고 달리더만.’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가슴 속 어디선가 마라톤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프래카드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저, 프래카드 보고 전화하는데요. 초보자도 받아 주나요?”

“물론입니다. 이번 일요일 새벽 5시 30분에 삼천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나오세요. 친절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처음이라서... 그리고 달리기하고는 워낙 담을 쌓고 살아서...”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걱정하시지 말고 나오세요. 그런데 인터넷은 자주 접속하나요?”

“그런데요.”

“그러면 우리 홈페이지에 한 번 들어가 보세요. www. freechal.com/himnal입니다.”

인터넷이야 내 세상이 아니던가? 집에 와서 즉시 접속해 봤더니 ‘전주마라톤클럽’ 회원들의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였다. 무엇보다도 눈을 잡아 당기는 것은 ‘내둘내둘’이라는 말이었다.

‘내둘내둘’ 어떤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한다는 뜻이나, 철저히 하지 않고 대강대강 한다는 뜻 같은데 내 성격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오, 예! 이거 아주 좋구만. 나하고 딱 맞네. 한 번 가서 내둘러 봐야지. 내둘내둘, 히히 나하고 어쩌면 그렇게 딱 맞는디야. 내둘러 신사라는 분이 원조인가? 굉장히 핸섬한 사람 같구만.’

그렇게 해서 나는 전주마라톤클럽 회원이 되었고 마라톤이라는 환상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다.

 

2

마라톤의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환상적이었다. 색깔로 말하면 연보라의 흐름이라고 할까.

처음으로 회원들과 만났다. 그들은 모두 선수들 같아 보였다. 내 소개를 해주고 모두들 박수로 환영해 주었는데, 어느 한 사람은 박수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가슴이 울리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은 참 통이 큰가 보다. 어쩌면 저렇게 박수소리가 크다냐. 생긴 것으로 봐서는 부처님 마냥 순하고 선하게 생겼는데. 참 성실하고 얌전하고, 술도 안 먹을 것 같고, 그런데 달리기는 못하겠군. 저런 몸매로 설마 달리겠어. 하이고 근디 먼놈의 소리는 그렇게 질러댄디야.’

‘ 저 사람은 날렵한 몸매와 타오르는 눈길로 보아 고수인가 보다. 써브쓰린가 싹쓰린가한다는 그런 사람인가? 하이고 저 근육 좀 봐. 이봉주가 울고 가겠구만.’

‘아니 저렇게 나이가 많은 분들도 마라톤을 한단 말야? 오십은 훨씬 넘은 것 같은디. 그래도 허벅지가 탱탱한 것을 보니 수없이 달린 분 같네. 나는 언제나 저렇게 된디야.’

‘ 여자도 달리는 거야? 저기 키가 크고 멋있는 분은 누구다냐? 몸매가 처녀 같네. 우리 마누라 반절이네. 저기 머리 긴 여자는 처년가? 아줌만가? 풍겨나오는 인상이 한가락할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야코가 죽었다.

괜히 왔나보다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데

“자 모이세요. 오늘 코스는 금산사 삼거리에서 원평으로 새로 낸 길을 따라 달리다가 원평에서 다시 돌아 오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제 일진은 김갑수씨가 책임지시고, 제 이진 금산사 삼거리까지만 갔다가 돌아 오는데.... 제 삼 진은 독배 고개 정상까지만 달립니다 인솔은 ..... 자 그럼 스트레칭하겠습니다.”

근육이 제대로 발달한 사람이 나오더니 빙 둘러 선 사람들 가운데에서 직접 동작을 해가면서 시범을 보인다.

“ 무릎 잡고 가볍게 앞 뒤로 .... 허리를 완전히 살리고... 머리는 들고.... 거기 제대로 하세요. 발은 11자로 해야지요. ”

‘억지로 따라서 해보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 에라 적당히 흉내나 내고 말자. 다음부터는 나오지 말자. 나같은 초보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군. 뭐? 친절히 가르쳐 주겠다고? 순 거짓말쟁이들이잖아. 삼천이나 혼자서 달려야지. 외로운 늑대처럼...’

“자 이제 출발하세요. 독배까지는 천천히 가시고 ....”

모두들 힘차게 달려 나간다.

나는 엉거주춤하고 서 있을 수밖에.

그런데 그 훈련부장이라는 사람이 다가온다.

“처음 오셨나요?”

“녜.”

“ 그러면 오늘은 저하고 운동장에서 달려 보지요.”

아니 그럼 자기는 달리지 않겠다는 거여? 나 때문에? 이거 미안하잖아. 그럼 돈을 내야 하는가?

“ 자 가시죠.”

엉겁결에 운동장으로 따라 갔다.

“자 달릴 때는 뒤꿈치부터 바닥에 닿아야 해요. 손은 가볍게 쥐고 허리에 붙이고... 시선은 정면 15도, 상체는 곧게 세우시고.... 턱은 당기고.... ”

그날 두 시간 동안 나는 겨우 운동장 한 바퀴 돌았을 뿐, 온통 이론에 대한 강의만 받았다. 그래도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까 마라톤이 어떤 운동인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절대로 빨리 달리려고 하지 마세요. 또 조급해 하지 마세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제대로 달릴 수 있습니다. 무리를 하면 부상이 올 수 있는데, 가장 흔한 것이 족저근막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클럽에도 여러 사람이 고생하였고, 또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따가 원조 족저 한 분을 소개해 드릴 테니까 잘 들어 보세요.”

이러고 있는데 회원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놀라운 것은 두 시간을 넘게 달렸는데도 전혀 힘이 빠진 기색이 없었다.

‘하이고, 나는 언제나 저렇게 한 번 달려보나. 이거 괜히 시작한 거 아녀?’

“내둘러 신사, 이리 와봐요.”

내둘러? 내둘러라는 사람이 있단 말야. 홈페이지에서 많이 봤는데... 누굴까?

“왜? 왜 부르고 그래.” 하면서 다가서는 사람은 아까 그 박수 소리가 크고 고함을 질러대는 그 사람이었다.

“ 족저 원조답게 족저에 대해 이 분에게 설명 좀 해줘요. ”

그러나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이름도 이상한 족전가 죽잔가가 아니라 저렇게 커다란 몸매로 과연 달릴 수 있냐 하는 것이었다.

“ 잘 달리려면 스트레칭을 잘해야 해요. 특히 배 스트레칭을 잘해야 되죠. ”

하면서 배를 앞으로 쭉 내미는데 정말 가관(可觀)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나의 마라톤은 시작되었다.

 

3.

아내는 마라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는데 뭐할려고 그렇게 힘을 빼냐며 한사코 말렸다. 그런 힘이 있으면 밤에 좀 쓰라고 하면서 들들 볶는다.

마라톤이라는 게 마약과 같아서 중독이 된다고 선배 회원들이 말하더만 정말로 그렇다. 이건 사무실에서도 온통 마라톤에 대한 생각 뿐이다.

이제 겨우 10km 정도를 달릴 정도지만 그래도 즐겁다.

회사에서 어딘가 조금 먼 곳에 갈 일이 있으면 모두다 내 몫이다.

“어이, 마과장 서부지사에 이 서류를 갖다 줘야 하는디 갈 사람이 자네밖에 없잖아.”

“아무렴요, 국장님. 당연히 제가 가야죠. 감사합니다.”

“과장님, K상사에 납품한 제품에 하자가 생겼다고 보수 요청이 있는데요. 물론 다녀오시겠죠?”

박대리 이건 아주 명령조다. 누가 들으면 지가 과장이고 내가 대린줄 알거다. 이 능글맞은 놈, 너 언제 한 번 걸리면 죽을 줄 알아.

그래도 달려서 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만 기다린다.

더욱 더 좋은 것은 아내가 좋아한다. 아내 말대로 밤에 힘 좀 써줬더니 그런가 보다.

아, 정말 행복하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몰랐을까?

아내도 내가 마라톤을 하는 것은 인정했으니까 다른 선배들처럼 같이 달리자고 꼬셔야지.

룰루랄라 정말 기분이 째진다.

 

 

“여봇! 당신 도장찍엇!”

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서는데 아내가 뱀눈을 뜨고 험상궂은 인상으로 덤빈다.

“이 사람이 왜 이래? 근무 잘 하고 온 사람한테”

“당신 나 몰래 카드 긁었지? 뭐 이십 삼만 오천원? 뭔 놈의 운동화가 16만원이야? 16만원이? 응? 내가 못살아앗!. 못산다고. 7만5천원짜리 운동복은 뭐야? 뭐, 직장에서 격려 차원에서 사줬다고? 격려가 썩어 나던 모양이네.”

아, 올 것이 왔구나.

배스트레칭을 잘해야 한다던 내둘런인가 지둘런인가 하는 사람이 막걸리집으로 데리고 가더니만 마라톤은 힘이라느니, 마라톤은 약속이라느니, 마라톤은 투자라느니 하면서 꼬시는 바람에 내 생애 처음으로 16만원 짜리 운동화를 사고 만 것이다. 그래도 운동화는 신어보니 쿠션도 좋고 하니 그렇다고 해도, 7만5천원 짜리라는 옷은 한 주먹도 안 되는 것인데 그렇게 비싸다는 말인가?

아내 말 대로 쌍방울 상표가 버젓이 붙어 있는 하이얀 메리야스도 길거리에서 3장에 만원인데, 정말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더구나 나는 지금까지 아내 몰래 3만원 이상을 써본 적이 없다. 도대체 월급이라고 단 한 푼도 현금으로 주지 않고 무조건 통장으로 들어가 버리니, 부정한 짓을 하지 않고는 단 돈 10원도 만져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통도 크게 아내가 신주단지처럼 고이 모셔둔 카드를 몰래 꺼내다가 일을 저질렀으니, 아아 이젠 졸도 아니면 기절이다.

“ 클럽 선배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그 운동화를 신어야 부상을 입지 않고...”

“부상 좋아하시네. 16만원이면 영찬이 두 달 학원비여. 두다아아알! 아무 소리 말고 당장 물려 와.”

아니 어떻게 물려오라는 거야. 이미 신고 얼마나 달려 버렸는데.. 아무리 짠순이라고 해도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좋아. 23만 5천 원, 갖다 주면 될 거 아냐?”

“그래 당장에 가서 물려오든지 말든지 하여튼 23만 5천원 가져 오란 말야. 빨라앙.”

나도 다 생각이 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내가 이 마라토너 ‘마주서’가 그까짓 23만 5천원 가지고 기죽을 줄 알았냐? 흥, 최명자, 너 잘 걸렸다. 일주일도 안돼서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말 것이다.

 

“마주서 과장님, 어째 기분이 별로 안 좋게 보이는데요?”

그래 박대리 이놈아! 나 미치겠다. 어제 마누라한테 큰 소리는 쳤지만 사실은 앞이 캄캄하다. 어쩔래?

“가만 놔두게. 인생이 비참하니까”

“사모님께 한 방.....”

이 사람이 정말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명색이 지 상사인데.... 뭐라고?

“과장님 저번에 운동화 카드로 긁은 것 때문에 그러시죠?”

이 사람이 어떻게 알았단 말야? 하여튼 박대리 저것은 귀신이라니까?

“과장님, 좋은 방법이 있는데 알려 드릴까요?”

귀가 번쩍 뜨인다. 그렇지 않아도 큰 소리만 쳐 놓았는데.. 박대리 저것은 나이도 젊은 것이 잔머리 돌리는 것이 거의 신(神)의 경지에 달해 있으니까 좋은 방법을 내놓겠지? 좀 쪽팔리지만 저 드런 놈한테 신세를 질 수밖에....

“과장님,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어쩌구 저쩌구.... 속닥속닥.... 어떻습니까?”

정말 박대리 너 정말 이런데 있기 아깝다. 빨리 가정상담소 하나 차려놓고 소장 해라. 너 정말 엄청 인기 있을 거고 돈도 엄청 많이 벌거다.

“박대리, 고맙다. 눈물나게 고맙다. 이 일만 성공하면 내가 코가 삐뚤어지게 한 잔 산다.”

 

4.

퇴근하여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최명자!

자칭 ‘최고로 유명한 사람’.

그래 너 잘났다. 이제 너는 비참한 것이 무엇인지를 곧 맛 볼 것이다. 기다려라.

이것이 우리 클럽 내둘러 신사 말처럼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에는 별 영향을 안 미칠지 몰라도 너하고 나 사이에는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고, 이 일이 끝나는 날 우리 집안에서 칼자루를 쥔 사람은 나, 바로 이 마주서가 될 거니까. 두고 봐라.

 

“어디가?”

너 지금 나한테 어디가냐고 물어봤지? ㅋㅋㅋ 성공이다. 박대리가 이미 예언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될 거라고. 그래? 그렇다면 박대리가 시킨 대로 해야지.

“23만 5천원 벌어와야지. 그래야 나도 큰 소리 칠 수 있을 거 아냐. 안 그래?”

나는 박대리가 시킨 대로 최대한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응, 그으래? 좋아 한 번 벌어와 봐.”

흐흐흐 최명자. 어쩌면 그렇게 딱 걸려드냐? 하여간 박대리 이놈의 인간은 귀신이라니까? 마치 해답을 다 봐버린 것 같잖아. 아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다는 말이냐?

 

그날부터 저녁만 먹으면 돈을 벌어 온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건지산으로, 종합경기장으로, 완산칠봉으로 다니면서 신나게 운동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열 두시를 넘기고 서야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내 다리 근육은 퉁퉁하게 올라오기 시작했고, 웬만큼 달려서는 숨도 차지 않게 되었다.

 

“열두 시가 넘도록 벌었으니까 많이 벌었겠네? 번 돈 빨리 내놔. 근데 뭐해서 벌어?”

흐흐흐 그래 늦게 온 남편 걱정은 안 하지? 그리고 뭐 돈만 내놓으라고? 두고 보자 이거야.

“ 뭐해서 벌든지 그건 알 것 없고. 23만 5천 원 한꺼번에 확 갚아 줄거니까 기다려. 당신이 좋아하는 목돈으로 말야.”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운동을 하였으니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들 것인가. 나는 바로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

흐흐흐 최명자! 네 작은 소견으로 어찌 봉황의 큰 뜻을 알겠느냐?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나는 저녁 먹고 나가서 운동하고 집에 와서는 샤워를 하자마자 바로 꼭 아내 옆에서 코를 골고 자는 일을 반복했다.

“당신. 정말 이럴 거야? 내가 싫은 소리 좀 했다고 일주일 동안이나 벌레 보듯 해?”

그러면 그렇지. 최명자! 그렇게 나와야지. 암 그렇고 말고. 박대리 말대로 착착 진행되어가는구만. 흐흐흐 마주서! 이제 조금만 더 밀면 되는 거야 . 힘내라고. 힘.

“ 당신, 조금만 기다려. 이제 반절 정도 벌었으니까 곧 갚을 거야. 미안해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변함이 없어. 나라고 왜 좋은 시간을 갖고 싶지 않겠어. 그러나 내가 지금 너무 피곤해. 그러니까 당신이 이해해 줘. 당신도 잘 자.”

어떠냐? 독수공방하는 처지가. 괴롭기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사내가 한 번 먹은 마음을 어떻게 접을 수 있겠느냐? 내가 솜사탕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괜찮은 줄 아냐? 속에서는 펄펄 끓어 오르는 것을 참느라고 지금 죽을 지경이네, 이 사람아.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게 다 네가 긁어서 일으킨 부스럼인 것을.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용서해 주는 거지? 으응 여봉?”

정확히 보름이 지나고 퇴근하여 보니 아내가 풍성한 저녁상을 차려 놓고는 야양을 떤다.

그럼 그렇지. 오늘이 박대리가 말한 바로 아내의 항복이 있을 거라는 그날이 아닌가? 정말 박대리는 귀신이다. 고맙다 박대리. 장하다 박대리. 대한의 아들 박대리. 너는 다음달 ‘이 달의 최고 사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쁜 것. 박대리 이 고마운 것.

“ 아니 최명자 여사님! 용서가 뭔 용서여? 이제 5일만 기다려. 그러면 당신 손에 23만 5천 원을 꼭 쥐어 줄테니까. 응 알았지. 사랑해 여보.”

박대리가 말한 대로 확인 사살을 해야 한다. 완전히 초토화시켜야 한다. 이런 찬스가 어디 흔한 일인가?

 

아내 최명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다.

“여보 정말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다른 아내처럼 당신에게 잘 해줘야 하는데. 워낙 돈 쓸데가 많다 보니... 이해해 줘. 그리고 당신이 그 돈 갚겠다고 밤마다 돈 벌러 다닌 것 정말 고마워. 그 돈은 당신이 그냥 써. 앞으로는 잘 해 줄게.”

“무슨 소리. 내가 미안하지.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일부터는 안 나갈게. 그 동안 번 돈은 모두 2천원 모자라는 20만원이야. 그런데 이 돈을 내가 어떻게 쓰겠어. 어머니한테 사실을 말하고 내가 번 돈이라고 드려야지.”

어떠냐 최명자! 내가 퇴근하고 돈벌러 다녔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아시면 괜찮겠지? 어때 손들어야겠지?

감히 하늘같은 남편의 비위를 거슬려? 앞으로 조심해.

“아니 뭐, 어머님한테까지 말할 필요가 있어. 그냥 당신이 쓰라니까.”

OK. 최명자 이제 끝났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나온 것이 잘못이지.

거안제미(擧案齊眉)라고 몰라?

 

거안제미(擧案齊眉)!

옛날 중국에 양홍(梁鴻)이라는 학자가 살고 있었다. 이웃에 사는 맹광(孟光)이라는 여자가 ‘양홍같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면 시집을 안간다’고 우겨 양홍은 이 여자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양홍은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이에 양홍이 답하기를 내가 원하는 부인은 비단옷입고 화려한 화장을 한 여인이 아니라 누더기를 입고 깊은 산속에서도 살 수 있는 여자였소. 그러자 맹광은 두 말없이 남편의 말을 따랐고, 남편이 어려운 일을 당하여 산 속으로 도망가서 살 때에도 눈을 아래로 내려 깔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 올려(擧案齊眉)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덕분에 양홍은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명자! 나는 양홍이고 넌 맹광이야. 어디서 까불고 있어. 아내가 손을 들다니! 모든 것이 내 세상 같았다.

 

5.

마라톤은 정말 재미있는 운동이었다.

그 동안 클럽 훈련에 악착같이 참가하면서 근력이나 지구력뿐만 아니라 스피드도 어느 정도 붙어 있었다. 또한 배 스트레칭을 강조하던 그 회원이 자칭 내둘러 신사라는 것도 알았는데 회원들은 그를 부를 때 내둘런, 반담 리, 내둘내둘, 흑룡 등 참으로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아무튼 내둘러 신사가 사무국장이란 것도 알았고, 이름 그대로 모든 클럽의 일을 내둘러 버리는데 아무도 막아서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따를 뿐이었다.

또한 그는 전라북도 아마추어 마라톤 연합회 사무국장도 맡고 있는데 연합회마저도 그의 손아귀에서 사정없이 내둘려 지고 있었다. 전라북도의 쟁쟁한 클럽의 회장님들도 내둘런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내둘런의 칼날은 무지막지했다.

그는 어쩐 일인지 모랫재를 독하게도 좋아하였다. 느닷없이 전라북도 연합회 회원들을 토요일 오후에 화심온천으로 모이라고 방을 붙여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다 몰려 온 마라토너들은 다 뭐냐? 달리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사람들이 아닌가? 이백여 명이 넘게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일장 연설을 퍼붓는다.

“ 이런 일이 날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고갯길도 만만하지 않으므로 적당히 내두르시기 바랍니다.”

‘뭘 내두르라는 거야? 저 사람 몸 좀 봐. 옛날에 씨름 선수였다고 하더만. ’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내둘런은 사정없이 그의 입을 내두르고 있었다.

“ 춘천대회가 끝나면 국종달을 하게 되는데 여러분들 그 때 또 참가해서 힘차게 내둘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알았으면 박수 한 번 쳐 봅시다.”

‘아니 뭘 내두르라는 거야? 남자들이야 내두를 것이 있겠지만, 우리들은 뭐 가지고 내두른디야?’ 여자 선수들이 모여서 히히득거린다.

 

모랫재를 넘어 곰티재로 돌아오는 길은 만만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바로 오르막이다.

“나같이 몸이 허약한 사람도 뛰어 오르니까 여러분들은 걱정말고 사정없이 내둘러 버리쇼잉.”

그저 입만 벌리면 ‘내둘러’이다.

“근디 이 오르막이 얼마나 된데요?”

“아 5km가 조금 넘는디 잠깐만 내두르면 금방이지요.”

내둘런의 뒤를 따르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문득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 나오는 ‘이갑송(그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괴력의 소유자이다)’을 떠올려 봤다.

‘아마 이갑송이가 이렇게 생겼을 거야’ 하며 달리는데 그가 묻는다.

“어디서 근무를 내두르고 있으쇼?”

“예, P회산데요.”

“아 그러시구나. 힘!!”

아이쿠 깜짝이야, 대체 이 사람은 뭐 허는 사람인디 이렇게 목소리가 크다냐. 임산부는 절대로 옆에 가지 말어야겄네잉.

 

내둘런 덕분에 모랫재를 올라 곰티재로 돌아오는 훈련을 마치고 난 후부터 자신감이 생겼다. 그 자신감을 몰아 춘천마라톤에 출사표를 던졌다.

“여보, 나 춘천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데 당신도 같이 갈랑가?”

“당신이 뭔 선수여? 출전이라고 하게.”

아니 이 여자가? 남들은 남편 말이라면 깜박 죽는다는데 밤이나 낮이나 올라타려고 하네. 좋아. 최명자,너 한 번 죽어 봐라.

“ 참가비가 4만원이고 토요일에 갔다가 일요일에 오니까 경비로 10만원 해서 도합 14만원이니까 그런 줄 알어.”

“아니 뭐? 14만원이라고? 그 돈이면 우리 영찬이 학원비가....”

그래 좋아. 그저 입만 열면 영찬이 학원비를 들먹거리는데..... 알았다. 그래 나도 할 말이 있다.

“안 줘도 돼. 내가 벌어서 가면 되니까 그 돈 벌려면 아무리 못 걸려도 2주는 걸리겠네. 또 엄청 피곤하겠구먼.”

아내는 2주 동안 독수공방할 일이 무서웠는지 어쩔 수 없이 지출 승인을 해 주었고, 나는 정말 지독할 정도로 훈련을 거듭했다.

희한한 것은 그렇게 내달려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최명자 여사님도 마라톤이 자기에게도 좋다는 것을 느꼈는지, 아니면 23만 5천원 사건 이후로 나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났는지 춘천대회를 한 달 쯤 앞두고서 그 비싼 경기용 마라톤화 소위 이봉주 싸인화를 선뜻 사주었다는 것 아니냐. 그 지독한 구두쇠가 거금 18만원 짜리 신발을 선 뜻 사준 것을 보면 뭔가 마라톤의 효과가 아내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과장님, 요즘에는 사모님과 사이가 좋으신 모양입니다.”

박대리 요건 삼베빤쑤에 뭣 삐져나오듯이 꼭 나선단 말야. 지난 번 일로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냐. 인사평점도 다른 사람보다 높게 주었잖아 임마.

“암, 좋지. 요즘에는 내가 아주 황제다.”

“아니 과장님, 저에게도 비결을 좀...”

“간단해. 마라톤을 하라구. 아니면 밤을 없애버리든지. 밤에 이기는 자 그대는 황제가 되리라.”

“그런데 과장님, 혹시 사모님의 작전이 아닐까요? 무슨 꿍꿍이 속이 있지 않을까요?”

뭬야? 꿍꿍이 속? 아니 이 여자가 그런 음모를 피우고 있단 말야. 아닐거야. 아냐. 최명자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야. 어쩐지 잘 해주는 것이 뭔가 있지 않을까? 그 노랭이가 18만원 짜리 운동화를 사준 것을 보면.

“야 박대리 설마 그럴까. 요즘에 내가 힘 좀 써줬더니 날마다 홍콩으로 유람을 다닌다고 좋아서 팔짝 뛰고 다닌데...”

“여자들 속을 누가 알아요? 과장님 잘 살펴 보세요.”

얌마, 박대리. 게임은 끝났다네. 최명자 여사님은 완전히 두 손을 들었고, 다시는 덤벼들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니까.

 

6.

춘천의 가을은 참으로 환상적이었다.

토요일 오후 2시. 종합경기장을 출발한 버스는 팔복동을 빠져나가 고속도로에 접어 들면서 빠른 속도로 발길을 내두르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대회에 나가는 나는 수학여행길에 오른 아이들만큼이나 흥분해 있었다. 더욱 더 힘이 쏟아지는 것은 마라톤의 ‘마’자도 모르고, 또 돈에 대해서 만큼은 가장 확실한 노랭이인 우리 최명자 여사가 그래도 남편이 달리는 것을 응원하겠다고 15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면서까지, 그 이쁘고 이쁜 아들 영찬이를 혼자서 내팽겨쳐 두고(하기야 고등학생이니까 내팽겨쳤다기보다는 아들녀석이 부모로부터 해방감을 느껴 보려고 스스로 남았지만) 따라 나섰다는 것이다.

 

“ 우리 클럽에서 처음 대회에 출전한 것이 춘천마라톤대회였지요,” 요즘 딸아이 다이어트 땜에 괜히 밥을 같이 굶어 주고 있는 눈물겨운 부정(父情)의 소유자이신 회장님이 무용담(武勇談)을 펼친다.

“ 그 때 가족들과 같이 왔었는데요, 우리가 마라톤에 대해서 뭐 아나요? 아내들은 닭갈비를 실컷 먹고 있을 때, 우리는 찰밥에 김 싸서 먹었죠. 다른 것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죠. 그러나 오늘은 신경쓰지 마시고 많이들 드시죠.”

“참으로 이해가 안 된다니까? 마라톤하고 닭갈비 먹는 것하고 뭐가 관계가 있다는 거지? 잘 먹어야 잘 달리지. 그치 여보오옹.”

우리의 최여사 며칠 굶은 것 마냥 먹어댄다. 누가 보면 고기 한 번 제대로 못 먹어본 여자 같다. 여자가 어쩌면 창피한 줄도 모르냐? 저렇게 먹어대니 안찔 수가 있겠어. 지 돈 안 냈다고 막 먹어대는구만. 아주 살판 났네.

 

춘천 마라톤대회.

모두 만 이천 명이 출전했다는 우리나라 최대의 마라톤대회.

처음으로 풀코스에 나선 나로서는 사지가 달달 떨린다. 같이 달리기로 한 클럽 회원의 뒤를 유치원 아니 마냥 졸졸 따라다녔다. 행여 놓치기라도 해서 이 많은 군중들 속에 혼자서 달린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참 쪽팔리는 군. 내가 주인 따라 다니는 개새끼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자기가 경험이 좀 있다고 한 곳에 가만히 있지 않고 왜 이렇게 돌아 다니는 거냐고. 정말 아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아. 전국의 각 클럽 사람들과 다 아는 것 같고만. 그래 너 잘났다. 니 팔뚝 굵다. 니 똥은 칼라다. 아니 사각(四角)이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 그 좁은 트랙을 워밍업을 한다고 달리는 사람들. 스트레칭을 한다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대고 있는 사람들.

야이 사람들아, 꼭 그렇게 째를 내야 되겄어? 좀 가만히 있다가 뛰면 되잖아. 얼마나 잘 뛴다고.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 거다.

어? 클났다! 곧 출발일텐데. 어떡게 하지. 이게 긴장해서 그런가?

“ 저 화장실 좀 가야 하는데...... 어떡하죠?”

“ 처음이라서 그래. 얼른 같다 와요.”

그 친구는 경험이 많아서 인지 태평한 얼굴이다.

가만있어봐. 화장실 같아 오면 이 친구와 같이 못 달리잖아. 정말 미치겠네. 참 이럴 때 왜 오줌이 마려운거야.

“저기 꼭 여기에 있어야 돼요. 얼른 같다 올거니까”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두고 화장실로 달려가는데 갑자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것이 초보자의 비애인 것을.

 

편도 4차선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가 달리고 있다. TV에서 본 뉴욕마라톤 경기가 생각난다. 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리는구나.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달린다. 소위 황영조 공원이라는 곳에서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하면 풀코스이고, 오른쪽으로 돌면 10KM코스이다.

갑자기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내가 애송하는 시이다. 우리의 인생을 몇 줄의 시로 그렇게도 잘 표현할 수가 있단 말인가?

 

노오란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은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습니다.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 했으니까요.

그 길도 사람들이 걸어갔다면

마찬가지로 먼저 길처럼 되었겠지만,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다른 날 걸어 보리라 생각했지요!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져 있음을 알기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다니는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대체 시인들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고상한 생각을 못하고 길만 보면 달리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가?

나는 길이라는 시어(詩語)를 최명자로 바꾸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시야말로 내 인생을 노래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시는 좋은 것인가 보다.

 

의암호를 옆에 끼고 달린다.

군대시절을 보낸 곳 춘천.

우리 부대야 본부는 소양댐 가는 쪽이었고, 나야 군생활 전부를 비무장지대 내 GP에서 근무했기에 외출이고 외박이고 이런 것과는 담을 쌓은 채 비무장지대를 돌아다니며 살았으니까 사실 춘천하고는 별 인연이 없었지만, 그래도 전방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바라봤던 의암호.

그 의암호를 지금 달리고 있는 것이다.

 

같이 달리자고 굳게 맹세하던 울 클럽 회원은 출발부터 어디론가 없어지고 말았다. 처녀 출전인 나 때문에 레이스에 지장을 받을 것 같으니까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이 기회를 놓치겠는가하고 내 빼버린 거다.

마라톤은 역시 외로운 경기였다.

35KM 지점을 지나면서 거의 초죽음 상태로 접어 들었다.

“아저씨 힘내세요. 완주하세요.”

야 이놈들아. 니들이 지금 격려를 하는 거냐, 아니면 힘을 빼는 거냐? 내가 어디 아저씨냐. 좀 오빠라고 해 주면 안되냐?

이제는 아름다운 경치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넓디넓은 도로만 이어지는 시내길이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영찬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달렸다.

이제 40KM 지점이다. 거의 걷다시피 하고 있었다.

물을 한 잔 마시며 걷다가 그래도 아내 보기에 미안할 것 같아 죽을 힘을 다해서 달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우리 노랭이 아내 최명자 여사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여보, 거의 죽을 지경이네. 그래도 우리 살면서 어렵고 힘들었을 때마다 우리가 서로 의지하고 살았는데이네 나 혼자 뿐이네. 오직 내 힘으로 달려야지.

벌써 5시간이 훨씬 지났다.

 

“여보, 영찬 아빠, 힘내”

아 이제는 환청(幻聽)까지 들리는구나.

고개를 흔들어 보는데 아내의 얼굴이 보인다.

참, 미치겠군. 이제 헛것까지 보이는구나. 내가 이런 짓을 왜 하는 거야.

아내는 거의 울고 있었다.

“영찬 아빠, 다 왔어. 조금만 달리면 된다구.”

아니? 이 여자가?

아내는 40KM 지점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다른 회원들이 다 들어오는데 자기 남편만 들어오지 않고 경기를 마친 회원들도 못 봤다고 하자 내심 걱정이 되어 조금씩조금씩 마중 나온 것이 자기도 모르게 2KM를 걸어 와 버린 것이다.

 

아내는 내 옆에서 달리고 있다.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청바지를 입은 채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최명자, 너 정말 대단하다. 언제 이렇게 달리기를 연습했냐? 2km면 짧은 거리가 아닌데, 정신력일까? 남편을 사랑하는 정신력 말야.

그렇게 우리는 춘천 마라톤 대회를 달렸다.

결승선을 밟았을 때 아내는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짙은 감격의 포옹을 했다.

다음날 그 사진이 신문에 실리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다.

 

7

--- 꽃처럼 피어나는 화사한 글밭에 앉아

비 갠 새벽녘의 상큼한 마음을 열고

님이 쏟아내는 인생의 참맛을 음미합니다.

마라톤이라는

그 길고도 힘든 운동을

삶의 여정(旅情)으로 이어가는

탄탄한 붓끝을 따라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그리움의 실체를

오늘 바라다 볼 수 있었습니다. ---

 

아침에 출근하여 메일을 확인하던 마주서 과장은 자기 눈을 비비고

모니터에서 웃고 있는 한 여인의 글을 읽었습니다.

춘천마라톤 참가기를 춘천마라톤 홈페이지에 올렸던 적이 있는데 어느 누가 그것을 읽어 본 모양이다.

 

아니, 이게 뭔 일이디야? 으응? 대체 이게 누구란 말여어?

마주서 과장은 어쩔 줄을 몰랐다.

행여 귀신같은 박대리의 눈에 들어갈까 봐 얼른 이메일을 닫아 버렸다.

학생시절 연애편지를 받은 것 마냥 가슴이 콩닥거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퇴근시간이 되어 모두들 다 나가고 난 뒤 마주서 과장은 컴 앞에 앉았다.

이거 답장을 해야되는 거야. 말아야 되는 거야. 박대리한테 물어 볼 걸 그랬나?

에라 모르겠다. 한 번 써보지 뭐.

 

--- 어느 누구신지 모르나

제가 쓴 글에 대해 이렇게 화려한 반응을 보여 주시니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중략)

글이라는 것이 자기 마음을 그래도 드러내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허구가 담겨 있게 마련인데

님의 글은 진실만이 흐르고 있네요. (중략) 아름다운 글은 아니어도 서로의 마음을 느껴보는 연(緣)을 이어갈 수 있기를 ------

 

그 뒤로부터 그녀는 매일 아침 메일을 보내왔고, 우리의 메일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 마주서님을 한 번 뵙고 싶어요. 낙엽이 다 지기 전에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그리움의 실체를 한 번 들여다 보고 싶습니다. 연락 주세요. 자경.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자경이란 이름을 가진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구이며 무슨 까닭으로 만나자고 한단 말인가?

이제는 아내 최명자도 완전히 굴복하여 고분고분하며 말도 잘 듣기 때문에 우리 가정에 평화가 왔는데 도대체 누가 나를 흔들어 대는 것인가?

만날까? 만나지 않아야 할까?

 

“당신, 요즘 기분이 좋은 것 같아. 마라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는 최고인 모양이야. 하기야 당신 춘천에서 달리는 것 보니까 정말 멋있더라.”

아니? 이 여자가 어떻게 알았지? 내가 얼마나 표정 관리를 했는데..... 여자에게는 육감(肉感)이라는 게 있다더니 정말 그런가? 뭔가 냄새를 맡은 거 아냐?

설마 그럴 리가? 메일을 봤을까? 아냐. 처음 그런 메일이 오자마자 바로 비밀번호를 바꿔버렸기에 아내가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박대리 녀석에게도 이번 일은 전혀 말하지 않았지 않은가 말이다.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습니다만, 우리들이 만나서 펼치는 공간은 아늑하고 감미로운 선율이 흐를 것입니다. 12월 첫째 주 일요일 오후 3시 카페 <폭풍의 언덕>에서 뵙겠습니다.

 

그 여인은 누굴까? 대체 나를 만나자고 하는 그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8.

일요일.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클럽에서 실시하는 아침 운동에 참여하여서도 발걸음 가볍게 하프 코스를 달렸다. 날마다 이런 기분이라면 세상은 한 번 살아 볼만하겠다.

“당신 어디 가?”

우리 아내, 늘 후즐그레한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 아내가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다가온다.

“응. 뭐. 가긴? 동창녀석이 서울에서 왔는데 오후에 잠깐 만나자고 해서.”

“당신 혹시 바람난 것 아냐?”

아내가 수상쩍단 얼굴로 덤빈다.

이 여자 웃기고 있네. 내가 그런 정도로 넘어갈 것 같냐? 천만에 풀빵, 만만에 콩떡이다. 어림도 없지. 내가 얼마나 신중하게 행동해 왔는데. 미안하지만 최명자 여사님 오늘 기분 좀 내려고 하니 잠자코 있어 줬으면 좋겠소이다.

 

카페 <폭풍의 언덕>은 완산칠봉 자락에 앉아 있는, 시내의 조망이 좋은 곳이어서 특별히 예약을 하기 전에는 입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망이 좋고 조용한 곳은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는 차지하기 어려운 곳이다.

마주서 과장은 직접 폭풍의 언덕을 찾아가 주인을 직접 만나 소설 같은 이야기를 꾸며대며 하소연을 하여 최고의 자리를 예약해 두었다.

흐흐흐, 최명자 여사님, 오늘 어쩌면 내 생애 최고의 날을 보내게 될 것이오. 이것은 다 당신이 스스로 만든 일, 글쎄 자업자득이라고나 할까? 오직 돈만 생각하고 돈 앞에서 벌벌 떠는 당신의 이미지는 이미 내 사고(思考)의 범주를 넘어 가 버렸소이다.

하여 나는 오늘 당신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숨결을 느껴 보려고 하는 것이오. 어찌 23만 5천 원에 도장찍으라고 하는 당신 최명자의 가치관과 비교나 할 수 있겠소.

당신은 물론 가족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행동이라고 말하시겠지?

물론 인정하오. 그러나 인생은 돈만이 아닌 그 무엇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것이라는 것을 그대는 몰랐단 말이오. 또한 그것이 우리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들의 삶에 엑센트를 찍어 활력을 불어 넣는다는 것도 최명자 당신은 알았어야 했소.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맬 것만 강요하는, 당신이 펼치는 삶의 이야기는 듣지 않기로 했소. 당신은 언제나 이상보다는 현실을, 화려함보다는 수더분함을, 분위기보다는 실속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당신이 이끌어 가는 세상은 늘 회색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은 당신도 인정해야 할 것이오.

이제 나는 날개를 달고 싶소. 저 하늘을 표르릉표르릉 날아다닐 날개 말이오.

 

카페 <폭풍의 언덕>은 온통 하얀색이다. 실내 장식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하얀색이다. 그러나 오직 한 곳 은은하게 분홍빛을 발하고 있는 곳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에밀리 브론테의 이야기’라는 한 작은 방이다.

참으로 폭풍의 언덕이라는 이름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어디 그것이 문제이랴.

오늘 여기서 만나는 그 여인과 보낼 시간이 더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힘들고 어렵게 예약한 ‘에밀리 브론테의 이야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집에 있는 수더분한 아내 최명자가 생각이 났다.

참, 이상하다. 왜 갑자기 이 화사하고 아름다운 시간에 아내 생각이 난단 말이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그렇다면 이것이 도대체 무슨 감정이란 말인가? 내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아내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인가? 아니면 이 좋은 시간을 어지럽히려는 아내에 대한 나의 본능적인 반발이란 말인가?

 

‘에밀리 브론테의 이야기’에는 화려하고도 안락하며 푹신한 소파 두 개가 가운데 탁자를 사이에 놓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중 하나의 의자에 내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여인이 앉기를 바라면서 오른쪽 의자에 앉았다. 건너편에는 Catherine역의 줄리엣 비노쉬 (Juliette Binoche)와 Heathcliff 역을 맡았던 랄프 파인즈 (Ralph Fiennes)가 출연한 영화 <폭풍의 언덕>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 은밀한 눈길에 젖어 꿈길을 걷고 있는데, 정말이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마주서님이시죠?”

아! 올 것이 왔구나. 세상에 이런 목소리도 있긴 있구나. 보라. 최명자. 나는 지금 이러한 여자를 만나고 있다. 적어도 돈 23만 5천에 이혼을 말하는 너하고는 전혀 다른 여자를 지금 만나려고 한단 말이다.

가슴을 울리는 고동소리가 빗발치듯 몰아쳤다. 숨이 멎어가는 듯한 느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순간 나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오르가즘의 파도가 온 몸을 휘어 감아 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

 

9.

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더냐?

그녀는 30이 채 넘지 않은 듯한 한마디로 예쁜 여자였다. 이럴 때 자세히 묘사하려고 한다는 것이 죄악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아무런 수식어도 붙이지 않은 그저 ‘예쁜’ 여자라고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 눈구멍은 도대체 여자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나이 같은 것은 정말 모른다. 그랬기에 아내 최명자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뿅하고 가버린 것도 다 그놈의 내 썩은 동태같은 눈깔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 최명자가 정말 예쁘고 고운 마음씨에다가 낭만적인 분위기도 갖추고 있었다고 판단했었다. 어쩌면 이건 내가 바로 본 것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나는 정말 예쁜 여자를 보기만 하면 꼭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마주서는 자리에서 얼른 일어섰다.

“예, 제, 제가... 바로 마, 마주선데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깊고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럴까? 이렇게 이쁜 여자가 앞에 있는데 왜, 무엇 때문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수렁 속에 빠진 느낌이 들어야 한단 말인가?

정말이지 미치고 댄스할 일이다. 자다가도 팔짝 뛸 일이다.

 

“저 자경이예요. 윤자경!”

아! 이 여자가 그렇게도 분위기를 띄우던 윤자경이란 말인가?

“앉으시죠.”

칫, ‘앉으시죠’가 뭐야? 아니 마주서 이놈아, 그렇게 할 말이 없단 말이냐. 세상이 무너질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 두고 기껏 한다는 말이 겨우 ‘앉으시죠.’냐구. 이 바보 같은 인간아.

 

“마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아침 일찍 호숫가에서 피어나는 물안개 속에 싸여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생글생글 미소가 피어나는 목소리가 은은한 향내에 싸여 밀려 들었다.

이것이 소위 그 유명한 휴먼 페로몬향인가? 아니면 프랑스에서 만든 안나... 뭐라고 하는 향수인가?

코끝에서 맴도는 향에 취해 제대로 숨도 쉬어지지 않는 것이 영낙없이 사춘기 소년의 모습이다.

“마선생님은 늦가을의 쓸쓸함이 풍겨나는 게 어딘지 고상해 보이는데요. 전 어때요?”

“아, 예. 담록의 풋풋함이 묻어난다고나 할까요.”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라톤이 말예요. 그렇게 매력있는 운동인가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 있는.”

“그렇습니다. 적어도 달리는 시간만큼은 온새미로 내 시간이지요. 그래서 나는 달리는 그 시간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던져 넣어 버립니다. 그리고 환상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마라톤을 하면서 아름다움의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이죠.”

어떠냐? 윤자경! 이 마라토너의 상념이. 우리는 늘 이렇게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어?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치장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으려고 하는 것 아니겠어?

“마선생님은 현실을 대단히 환타스틱하게 바라보려는 것 같아요. 마치 연보라의 농무(濃霧)에 싸여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아요. 그러나 세상은 좀 더 현실적으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마라톤이라는 것도 사실은 육체에 가해지는 그 지독한 고통이 가장 현실적일 것 같아요. 그런데 마과장님의 글은 그 고통이라는 본질을 묘한 환상 같은 것으로 포장하여 피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아니? 이게 뭐야? 이 황홀한 시간에 이게 무슨 실연당한 17세의 소년같은 소리여?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 거냐고?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에밀리 브론테의 이야기’를 빌렸는데 말야. 네 눈에는 발밑으로 보이는 저 많은 군상(群像)들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야?

“본질이라는 것은 사실 지극히 주관적이 아닐까요? 마라톤의 본질이 꼭 고통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너무 심하지 않을까요?”

“그렇기도 하겠지만.... 선생님의 글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선생님은 인생을 그런 환상적이고도 무릉도원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삶의 여유라느니, 향기라느니 하면서 뭔가 뜬구름을 잡는 식의 태도인 것 같아요.”

참, 이 여자 웃기는구만. 뭐?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그리움의 실체를 한 번 들여다 보고 싶다’고 말할 때는 언제냐고. 왜 이렇게 태도가 돌변한단 말이냐고오오오.

뭔가 빗나가는 느낌이었다.

마주서는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만났는데 격조 높은 식사를 같이 하시지요. 그리고 이 ‘에밀리 브론테의 이야기’라는 방은 예약하기가 쉽지도 않습니다. 자경씨를 위해서 특별히 노력했지요. 품위라고나 할까 뭐 그런 것 말이지요.”

“참으로 고마운 말씀인데요. 제가 생각하고 있었던 분위기를 가지고 계시지 못하시네요. 이쯤해서 일어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윤자경!

그 여자는 도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또박또박 걸음을 옮겨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그리고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본다.

“마주서 과장님, 우리들의 삶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윤자경은 방을 나가버렸다.

마주서는 자신이 어렵게 확보한 ‘에밀리 브론테의 이야기’가 그녀의 알싸한 향(香)의 발밑에서 짓뭉게지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10.

 

마주서는 벌써 며칠 동안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육중한 힘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마라톤이 가져다 주었던 ‘ 그 황홀한 오르가즘’도 모두가 허공에서 갈갈이 찢어져 분해되고 있었다. 마주서는 암흑의 깊은 터널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신, 왜 요즘 힘이 없어?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응? 왜 그러는데?”

그래, 최명자. 살 맛이 없다. 어떤 여자가 나보고 삶은 현실이란다. 나보고 환상에 젖어서 산단다. 어때? 고소하냐? 그래 너 잘났다.

“여보, 스트레스에는 달리기가 최고라고 했잖아. 한 번 뛰어. 내가 써빙할게.”

“그래, 당신 말이 맞았네. 내가 당신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겠네.”

“아니, 이 남자가 왜 이래? 기운 좀 내. 도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이러는 거야. 내가 신발 샀다고 투덜대서 그러는 거야? 괜찮아.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잖아. 이제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운동화도 사고 멋있는 운동복도 사서 폼 나게 달려봐. 응? 여보오.”

그러나 마주서의 귓가에는 윤자경이 남긴 ‘우리들의 삶은 현실적인 것입니다.’라는 한 마디가 맴돌 뿐이었다.

 

술은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마주서는 퇴근길에 혼자서 술집에 들어갔다.

혼자서 마시는 술맛이 이렇게 쓸 줄이야.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그럴거야. 삶은 현실적인 거야.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재벌이라고 하루에 네끼 먹는 것 아닐테고, 째내지 말아야지.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역시 우리 아내가 최고야. 화장품 냄새도 풍기지 못하고,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아들 녀석의 학원비에 쩔쩔 매는 그 독한 우리 아내가 최고란 말이지. 흣흣흣.... 참 지랄 같은 게 마라톤이다.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마라톤,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마라톤,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정말 엿 같은 마라톤.....

쭈우욱...... 크으으으으으....... 탁.

 

마주서는 눈물을 닦고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술집을 나왔다.

<미더라 화장품, 우리 가게를 바라 본 당신은 이미 미(美)의 세계에 들어 섰습니다.>

눈앞에 화장품 가게라 어른거린다.

마주서는 문을 밀고 들어 섰다.

“어서오세요.”

윤자경 같은 여인이 활짝 웃는다.

아니? 이거 윤자경이잖아. 어? 아닌가? 아니면 말고.

“윤자경이라고..... 아세요?”

“녜? 윤자경이라뇨?”

“그럴 거 없고. 이 가게에서 최고로 비싼 화장품 하나 주시오.”

“어머 사장님 사모님을 엄청 사랑하시나 봐요.”

주인 여자가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

아양 떨지마. 이 여자야. 당신이 알아? 이 찢어지고 무너진 사내의 자존심을 말야. 그래 치사하다. 윤자경. 내가 치사해서라도 아내에게 무릎을 꿇겠다. 오냐. 최명자. 네 멋대로 해라. 네가 하늘이고 내가 땅이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카드를 긁어 주고 정성스럽게 포장한 다음 가게를 나왔다.

“여보, 이거 당신 주려고 샀어.”

아내 최명자는 웬 선물이냐며 입이 쭉쭉 찢어졌다.

그래! 최명자! 너 잘났다.

 

 

“아니!!! 당신 미쳤어. 이게 얼마 짜린데. 이런 걸 사왓! 당신 도장찍고 싶엇! 빨리 가서 물러오란 말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얏!”

마주서는 아내 최명자의 발밑으로 끝없이 추락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끝.

 

재미없는 글 읽느라 수고하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 나 잘난 최명자요.

 

최명자 인생 참 쪽팔리네.

나 결혼하기 전에 누구보다도 허영심 많았고,

누구보다도 환상적인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었다고.

그런데 그꿈이 당신을 만난 순간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내 기분을 마주서 당신이 알아?

 

내가 어떻게 해서 살았는데, 당신은 그게 뭐냐고. 응?.

나 솔직히 친구들도 잘 안 만나면서 살았어. 나는 이렇게 살아도 내 자식은 이렇게 살게 하지 않으려고 나는 못 입고 못 먹어도 영찬이 만큼은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다고.

당신 출근하고, 영찬이 학교 가고 난 후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냐고..

1시간에 2300원 받아가며 하루에 8시간씩 죽어라고 일하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몸이 파김치가 된다고. 그래도 식구들에게 표 안나게 할려고 .......

 

그런데 당신은 아무리 마라톤이 좋아도 그렇지. 세상에 16만원 짜리 운동화에 한 주먹도 안 되는 옷을 7만 5천원이나 주고 사온단 말야.

어떻게 살자는 거야.

돈 들어갈 구멍은 많고 돈 들어오는 구멍은 없고.

정말 미치겠다고.

세상에 내가 도장찍자고 한 것 가지고 어디 그렇게 까지 나올 수가 있어? 우리가 그래도 명색이 부부인데 2주일씩이나 등을 돌릴 수 있단 말야.

그래 내가 져주는 것이 그래도 낫겠다 싶어 져 줬더니 아주 세상이 다 자기 것인 줄 알더군. 이게 다 그 박대리 그 자식 때문인데 너 언제 한 번 걸리면 죽을 줄 알어.

그래도 춘천에서 풀코스 뛴다고 나가서는 마지막에 초죽음이 되어서 달리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쓰럽길래 내가 같이 좀 달려 줬더니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난리를 떨더군.

흥! 난리를 떨면 뭐하냐고.

그 놈의 사진 한 장 때문에 깨진 돈이 얼만 줄 알어?

풀코스 한 번 달린 것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기고만장해서 난리냐고. 참 내 치사해서. 그렇게 콧대를 높이다가 큰 코 다친다고.

뭐 잘났다고 참가기는 쓰냐고?

그래. 상금 이십만 원 탔지. 근데 또 들어간 돈은 얼마였나고?

뭐? ‘그 황홀한 오르가즘’.

오르가즘 좋아하네.

 

나도 생각이 있다 이거야.

이 최명자를 그렇게 간단히 보면 안되지.

나는 뭐 사람 없는 줄 아나.

당신에게 그 알량한 박대리가 있다면, 내게는 윤자경이 있다고.

윤자경이가 어떤 인물인가는 만나보면 알걸!

 

 

당신 행복한 줄 알아. 내가 겉으로는 그래도 속으로는 하늘같은 남편으로 떠받들고 있으니까. 나는 뭐 화장품 좋은 것 바르고 싶지 않은 줄 알어. 좋은 입 입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당신 타고 다니는 차가 10년도 넘어서 그 거 바꿔 주려고 유난 좀 떨었는데...

내일 아침에는 새 차 타고 출근하는 기분이 괜찮을 거야. 사랑해. 여보.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난다냐.

 

 

전주클럽 회원 여러분.

항상 몸 건강하게 운동하시고 아내 사랑에 각별히 힘을 쓰세요.

우리 남편 마주서 과장같이 2 주일씩이나 아내에게 등돌리시지 말기를......

전주클럽을 사랑하는 독한 여자 최명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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