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마라톤이 뭐길래
정 광 모(전주마라톤클럽 홍보이사)
이제 고개 하나만 넘으면 경기장이다. 경기장 입구부터 잔잔하게 이어지는 오르막이 있기는 하지만, 인도에 둘러 서 있을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어떻게든 달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본,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의 성실한 공무원인 박춘익씨는 지금 맞닥뜨린 이 고개를 도저히 넘을 자신이 없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뒤에 따라 오던 사람들은 무정하게도 추월해간다. 이까짓 10km을 못 달리고 이렇게 헐떡거려서야 되겠느냐고 자신을 추슬러 보았지만, 뜨겁게 내려 쏟는 햇살까지 약해지는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
끈적끈적하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에 절망의 한숨만 토해내고 있는 무렵, 같은 클럽 여성회원인 김여사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지나간다.
“힘내세요. 이 고개만 넘으면 되잖아요. 충분히 달릴 수 있을 거예요.”
작년 결혼기념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분위기 좋은 찻집에 마주 앉아 연애시절의 달콤한 순간들을 끄집어 내어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불쑥 아내가 말을 건넨다.
“자기야, 나 내일부터 마라톤 시작할 건데, 어떻게 생각해?”
“마라톤? 그거 아무나 하는 것인 줄 알아?”
“잘 아는 언니가 마라톤클럽에서 운동하여 풀코스까지 달렸는데 연습만 하면 누구나 달릴 수 있다네.”
“좋아, 당신이 달린다면 내가 길거리에 나가서 춤을 주지.”
그때만 해도 그는 설마 하였다. 마라톤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운동이냐 말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아내 강연희라는 여자는 도저히 마라톤하고는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인데, 어디 마라톤이 가당치나 하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그는 춤을 추겠다고 자신 있게 큰 소리를 쳤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열심히 운동을 하였고, 운동을 시작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하프마라톤대회에 출전을 하여 1시간 57분만에 달리더니, 마라톤을 시작한 지 꼭 일년만에 풀코스까지 완주해 버린 것이다.
서서히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그 여성회원을 바라보며 그는 이를 갈았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여자에게 뒤질 수는 없는 거야. 비록 저 여자가 달리기 경험이 많다고는 하지만 나도 학창시절에는 그래도 달리는 축에 끼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헬스클럽을 겨우 두 달 다닌, 담배로 망가진 50이 다된 몸을 이끌고 달리고 있는 그에게는 비록 10km지만 천 리 만 리나 되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마치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가는 여자를 보면서 그는 다리의 힘이 밀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감과 오기만으로 대회에 참가한 것이 후회가 되어 온 몸을 감싸왔다.
아내가 처음으로 제4회 전주군산마라톤대회 풀코스에 도전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온몸을 던져 아내를 말렸다. 그러나 아내의 의지는 딱딱한 돌멩이처럼 굳어 있었고, 클럽 회원들과 함께 새벽이든 밤이든 때를 가리지 않고 맹렬한 훈련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입만 열면 인터벌이니, 파틀랙이니 하는 전문 용어들을 토해내는 아내는 오직 마라톤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일요일에는 LSD인가 뭔가를 한다고 새벽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구입한 신발만 해도 몇 켤레인지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내의 마음 속에는 이제 자신과 아들 녀석이 들어 설 공간이 없는 것 같았다. 오직 마라톤만 있을 뿐.
모랫재를 넘어 곰티재를 돌아 내려오는 46km 코스의 지옥 훈련을 거뜬히 해내는 아내를 보면서 그는 순진하고 가냘팠던 쳐녀 시절의 아내를 떠올리고는 불쑥 실소(失笑)를 흘려 내었다. 마라톤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마라톤이란 것이 그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휘어 잡는다는 것인가?
그 때부터 그는 마라톤의 세계에 조금씩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아내가 풀코스를 완주하는데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동반주를 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므로 그는 자전거를 타고 아내와 같이 달리기로 마음 먹고 동네 헬스 클럽에 나가 사이클의 페달을 열심히 돌렸고 클럽의 훈련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조금씩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얻어 들은 바에 의하면 마라톤은 마지막 10km가 힘들다고 하니까, 그는 10km 지점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자전거를 타고 10km 지점인 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으로 갔다. 그러나 아내를 기다리는 마음은 조바심으로 바뀌어 조금씩 조금씩 주자들을 거슬러 갔는데 자신도 모르게 18km지점까지 가버리게 되었다.
아내는 여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물이 핑 돌았다.
첫 출근을 한 아내를 보는 순간 큐피드의 화살이 꽂힌 그는 자신의 사랑을 피우기 위하여 정말 어려운 산을 많이도 넘었다. 도도한 아내의 마음을 열기 위해 그가 퍼부은 사랑의 공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 편의 드라마 이상의 갈등과 아픔을 겪으면서 그는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 줄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
언젠가는 아내와 나란히 달리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는 페달을 열심히 밟으며 아내의 옆을 지키며 준비한 음료수도 따라 주었고, 파워젤이라는 것도 입에 넣어 주며 시중을 들었다. 엉덩이가 벌겋게 부어 오르는 것도 모르면서 오직 아내를 따라 인도며 갓길이며 가리지 않았고, 때로는 진행요원들과 다투기도 하면서 그는 힘들어하는 아내의 마음 위에 자신의 마음을 얹어 주고 있었다.
4시간 4분 37초만에 결승선을 밟은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는 아들을 부등켜 안고 울고 있는 아내를 위해 뭔가 말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클럽 회원들이 아내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전해주고 분위기가 누그러졌을 때서야 그는 겨우 한마디 말을 건넸다.
“여보, 사랑해. 다음엔 내가 당신 옆에서 달릴 거야."
‘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된다. 아내와 같이 풀코스를 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고개를 걷지 않고 뛰어서 넘어야 한다. 하프코스에 참가하고 있는 아내도 조금 전에 달려 넘어 갔지 않은가! 그래 나도 반드시 넘어야 한다.’
그는 클럽에서 오르막 훈련을 할 때 ‘오리 -꽥꽥’하며 장난삼아 외치던 구호를 생각하고는 마음 속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오르막을 달려 올라갔다. 힘겹게 내딛는 발걸음마다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고, 아들녀석의 개구쟁이 몸짓을 튼튼하게 이어 보았다. 비 오듯 땀이 흘러 내리고, 숨이 턱에 찰 정도로 가빠왔으나 그는 오직 이겨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작을 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나는 반드시 아내와 같이 풀코스를 완주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이제 시작이라고 외치리라.’
고갯마루다. 그러나 길은 다시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 되고 있었다. 앞에서 달리는 사람들도 힘겨운 발걸음이다. 갑자기 다리의 힘이 빠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아내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그는 힘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마라톤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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