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문학

[꽁트] 달빛 자르기

힘날세상 2009. 7. 28. 12:42

꽁트

 

달빛 자르기

정광모

 

 

벌판은 이미 아내의 생일상을 흐드러지게 차려 놓고 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은 투명하고 맑은 커튼을 드리워 우리를 감싸 주고 있고, 풀벌레들은 혼신을 다하여 축하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어차피 시작한 것이니 만큼 닭살이 돋더라도 영화 배우와 같은 목소리와 분위기를 잡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뜨거운 입맞춤을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며, 이제 막 마라톤에 흠뻑 빠져버린 초보마라토너인 나는 옆에서 달리고 있는 아내를 힐끗 바라본다. 잔뜩 굳어 있는 표정의 아내를 향해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 조금 후에 보라지. 당신이 얼마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가를! 영원히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을 기다려 보라구.’

 

퇴근하여 문을 열어 주는 아내의 얼굴을 보고서야 오늘이 아내의 생일이라는 것을 생각해낸 나는 정말 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문을 열어주는 아내의 눈길이 꽃다발이나 현란한 포장지로 싼 선물꾸러미를 찾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잊지 않고 생일을 찾아 주었으니까 지금 빈 손인 것을 보았어도 아내가 아직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의 이 위기를 어떻게든 넘길 좋은 방법을 찾을 수가 있지 않을까?’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을 때까지의 그 짧은 순간에 기가 막힌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안방에 들어가서 시간을 끌며 머리를 굴려 보았다.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하여 식은땀까지 날 정도였다.

“식사하세요.”

아내가 부르는 소리가 마치 빨리 선물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목소리로 들린다.

‘좋다. 깨끗이 백기를 들자. 그리고 처분만 기다리자’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그 순간 팍 내려 박히는 느낌!

‘그래! 그거야. 달빛!’ 분위기만 잘 잡으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식탁에 마주 앉아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한 아내를 향해 낮으막한 목소리를 건냈다.

“오늘밤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드리겠소이다. 이따가 같이 나가시죠. 사모님.”

“뭔데? 뭐 할려고?”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있지만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눈치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아내를 위한 환상적인 생일 파티를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나 좀 나갔다 올께.”

“그래 다녀와.”

다른 때 같았으면 '어디 가느냐', '언제 올거냐' 시시콜콜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했을 텐데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을 보면 아내는 내가 무슨 선물이나 사러 나가는 것인 줄 알고 있다는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한 시간쯤 후에 빈 손으로 들어왔어도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보이고 있는 것일 것이다.

 

9시 뉴스가 끝나기를 기다려 나는 음모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운동하러 나가지.”

순간 아내의 얼굴에 스쳐가는 실망스런 표정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오늘이 자기 생일인데 남편이라고 생일날에 어울리는 분위기나 언어는 한 마디도 안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운동을 나가자고 하니 아내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나의 선물은?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은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아내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웬 운동?”

아내는 마지 못해 따라 나섰다.

우리는 우리가 늘 달리던 중인리 벌판으로 나가 5km정도를 달렸다. 그 동안 나는 의도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도 묵묵히 달리고 있을 뿐이다.

내가 풀코스를 달리는 것을 보고 자기도 마라톤을 하겠다고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고 나섰던 지난 봄, 초등학교 운동장 한 바퀴도 못 돌고 주저 앉아 버렸던 아내. 그러나 그 끈질긴 근성으로 일 년만에 금년 봄 제5회 서울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를 완주하기까지 우리는 지겹도록 이 중인리 벌판을 달리며 서로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달리기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삶의 아픔들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오늘 아내의 환상적인 생일파티장이 될 들판 가운데 있는 조그만한 교차로에 다다를 것이다.

교차로 부근 비닐 하우스 속에 미리 준비해 둔 아주 소중한 상자, 오늘 아내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줄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나의 음모의 결정체를 찾아 내어, 질펀하게 쏟아지는 달빛의 환호를 받으며 46개의 촛불을 밝히리라. 그리고 달빛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러야지.

아내는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달빛에 촉촉이 젖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리라. 그저 울고만 있을 뿐, 한 마디 말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행복해 하겠지.

그 때 미리 써 둔 편지를 읽어 주는 거야.

‘ …… 마라톤!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소. 또한 우리가 달리는 발자국마다 아름다운 언어가 있고, 삶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오. 오늘 우리의 머리 위로 덮이는 달빛을 따라 당신의 사랑이 있고 나 또한 당신의 마음에 담겨 살아 가려고 하오. 우리의 마음을 모아 달려 봅시다. 지나온 많은 아픔과 애환을 모두 다 덮고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만 풀코스를 넘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주로(走路)를 말이오. ……'

그리고 케익을 잘라야지.

아내는 정말 감동을 하여 한 마디 하겠지.

'달빛 아래서 자르는 생일 케익,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달빛 자르기……. 여보! 사랑해.'

 

이윽고 교차로에 다라랐다.

“사모님! 잠깐만 멈추시지요.”

“왜?”

“오늘이 당신 생일이잖아. 그래서 내가 생일상을 차려두었거든. 조금만 기다려. 내 금방 가져올게.”

궁금해 하는 아내를 뒤로 하고 비닐 하우스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케익과 편지를 숨겨 둔 곳으로 가서 덮어두었던 파란 비닐을 걷어 내었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거기에는 내가 써 둔 편지 봉투만 뒹글고 있을 뿐, 내 마음과 내 사랑, 그리고 내 정열을 모두 담아 곱게 모셔 두었던 케익 상자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케익 잘 먹겠소. 생일잔치라는 것이 어디 케익을 꼭 먹어야만 행복이겠소. 부부가 같이 달리는 것만으로도 당신들은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겠소? 생일 축하한다고 부인에게 전해 주시오.’

 

비닐 하우스를 나서는데 쏟아지는 달빛 속에 일그러진 아내의 얼굴이 들판에 가득 차 있었다.

 

'마라톤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고요와 화평  (0) 2009.07.28
[꽁트] 여보 이러지마  (0) 2009.07.28
[꽁트] 아버지의 손바닥  (0) 2009.07.28
[꽁트] 아내는 모를거야  (0) 2009.07.28
[꽁트] 마라톤이 뭐길래  (0) 2009.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