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금구 명품길을 걸는다.
16호 태풍 '산바'가 몰고온 비구름으로 인해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던 일요일 오후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길이다.
비를 맞으며 산길을 걷는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
비옷 위로 느껴지는 빗방울의 감촉과 순식간에 빗줄기로 덮혀버리는 숲길의 몽환적인 분위기는 발걸음에 신비함까지 더해준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간 속살을 드러내고 숲은 세월을 이어가는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이런 걸음은 목표가 없다. 그저 길이 이끄는 대로 시간을 이어가면 된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은 늘 그리움으로 수렴한다.
비가 내리는 날 배깔고 엎드려 소설책이나 읽는 것도 시간을 보내는 비옥한 방법이었던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고등학생 시절, 교복 외에는 특별한 옷이 없었던 까닭에 학교 로고가 새겨진 체육복이 입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3년 동안 입어야 한다며 평소에는 체육복을 못 입게 했었다. 그렇지만 비오는 날은 기온이 조금 내려가므로 보온을 핑계로 그토록 입고 싶었던 체육복을 입고 방문을 열어 놓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책을 읽는 즐거움을 맘껏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같은 만족감을 만끽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의 그 기분은 어디에 적어 두고 싶을 만큼 소중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도 비오는 날은 약간 두꺼운 옷을 입고 업드려 책을 읽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비오는 날은 슬며시 솟아나는 재미가 있다.
1999년 어떤 이유로 마라톤을 하게 되었다. 동호회를 결성하고 마라톤이 인생의 거의 전부인 양 마구 내달리고 있던 때, 중인리 들녘을 달리다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흠뻑 맞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쾌감이었다. 근원이 깊은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은 비오는 날 일부러 들판에 나가 웃옷을 벗고 맨 몸으로 빗줄기의 감촉을 받아내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7년 정도 빠져 있었던 마라톤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족저근막염이라는 발바닥 부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산으로 들게 되었다. 산줄기를 걸으며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일도 한 주일 동안 회색빛 도시에 갖혔던 스트레스를 훅훅 날려 주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의 산행은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 자연히 비오는 날은 엎드려 책을 읽으며 보내는 것이 일쑤였다.
작년 여름 참 옹골지게 비가 내리던 날 느닷없이 위봉폭포가 생각났고, 위봉폭포에서 시작하는 임도를 달렸던 기억이 온몸을 사로잡아 버렸다. 아내를 설득하여 비옷을 가지고 위봉폭포로 갔다. 차에서 내려 비옷을 입는데 비는 정말 거창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임도는 온통 비의 세상이었다. 아니 나는 이미 빗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임도를 따라 걷다가 문득 어깨에서 느껴지는 빗줄기의 감촉이 마음 속으로 파고 들었다. 웃옷을 벗어버렸다. 그것은 황홀이었다.
그렇게 비오는 날 임도 걷기의 마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금구 명품길은 위봉폭포 임도처럼 고즈넉하지 않았다. 간간히 차량이 지나갔고, 달리기에 나선 사람들도 만났다. 그래도 비오는 숲길은 좋았다. 비오는 날은 대개 나들이를 걷고 TV 앞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비오는 날 밖에 나가 보라. 전혀 다른 세상을보듬을 수 있다.
빗 속을 걷는 즐거움은 잔잔한 즐거움이다. 어쩌면 자기 스스로 끄집어내야 하는 즐거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비오는 날의 숲길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토실한 시간들로 이어진다.
비오는 날 숲길을 한 번 걸어볼 일이다.
이정표를 만나도 그냥 발걸음이 가는대로 걷는다. 지난 번에 눈여겨 봐두었던 금구 명품길로 걸음을 옮겨 딛는다.
당월리 냉굴로 가는 삼거리.
비를 맞으며 걷다가 문득 폭설이 내린 날 걷고 싶었다. 또 하나의 즐거움을 예약한 셈이다.
오늘 걸었던 길. 귀신사에서 싸리재로 올라와 당월저수지로 이어지는 금구 명품길이다.
보물 제 826호 귀신사 대적광전. 대적광전뒤 언덕에 있는 3층 석탑에 기대 앉아 바라보는 앞 마당에 쌓여있는 고요가 일품인 참 좋은 절이다. 그러나 귀신사는 많은 건물이 들어서면서 예전의 귀신사가 아니었다.
비오는 날이 즐거운 힘날세상
'고요와 화평' 중에서
2001년 봄에 귀신사에서 느낀 감정을 적어 놓은 글이다.
정말 좋은 느낌의 부부였다. 걸으면서 쌓아가는 부부의 정도 마라톤 이상의 참 맛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을 뒤로하고 고갯길을 힘차게 오른다. 양쪽으로 도로를 감싸고 있는 산자락의 나뭇가지에는 벌써 성질 급한 봄바람이 걸터앉아 흔들거리고 있다. 봄날처럼 포근한 날씨에 땀방울이 흘러 내려 선글라스를 벗어 버렸다. 눈앞에 훤해진다. 발걸음에 힘을 실어 본다. 언덕을 오르는 기분이 정말 상쾌했다. 혼자서 이 고갯길을 여러 번 넘어 봤지만 오늘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은 많지 않았다.
어느덧 청도리 마을 회관 앞이다. 이제 낮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금산사 3거리이다. 불과 10여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청심수퍼 앞에 서 있는 ‘귀신사(歸信寺)’라는 안내판을 본 순간, 정말 느닷없이 양귀자의 <숨은 꽃>이라는 소설의 한 구절이 갑자기 떠올라 예정에도 없이 귀신사로 발걸음을 돌려 대적광전(大寂光殿) 앞에 섰다.
오늘 달리기에 나서면서 품었던 화두(話頭)는 ‘고요와 화평’이었다. 혼자서 달리는 때에는 늘 한 곳으로 생각을 모으곤 하는데, 그것은 늘 의식의 심층부를 관통해 가느다란 희열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래서 달리기는 짙은 인생의 맛을 풍겨 내고 있는 것이다.
귀신사는 정말 조그만 절이다. 여느 절과 같이 요란한 산문(山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청도리라는 동네 끝자락에 동그마니 앉아 있다. 그러나 청도리 마을 회관에서 귀신사까지 달려가는 동안, 물론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였지만, 단 한 사람도, 단 하나의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귀신사는 속세에 내려 와 있으면서도, 속세를 떠나 있는 것이다.
소설가 양귀자님의 표현대로 ‘신이 지친 몸을 쉬기 위해 돌아오는 자리가 아니라 이제는 병들어 옴쭉달싹도 못하는 신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위해 돌아오는 음산한 자리’와 같은 느낌을 받기에 충분한 적막에 싸여 몇 집 되지도 않는 청도리 마을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華嚴十刹)로 한 때 이름을 떨친 대가람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적광전과 명부전(冥府殿), 그리고 그 사이에 만들어진 아주 적절한 마당 하나. 이것이 귀신사가 갖고 있는 전부였다. 귀신사가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적막(寂寞)’ 하나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적광전 앞마당에 가득 고여 있는 고요와 적막은 비구니의 가느다란 숨결만 스쳐도 금새 흩어져 버릴 것 같은 분위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대적(大寂)’이라는 것이 부처님이 만들어내는 고요라는데 생각이 미치는 순간, 문득 부처님의 가르침은 절 앞마당에 쌓여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귀신사의 부처님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마당에 무슨 가르침을 베풀어 놓았다는 말인가? ‘염화시중의 미소’라고 부처님은 무언(無言)으로 가르치는 것이라는 말인가?
대적광전 뒤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3층 석탑을 등지고 앉아 대적광전 앞마당에 직육면체로 정갈하게 쌓아놓은 부처님의 고요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어리석게도 마라톤하고만 연결하여 생각의 가닥을 간추려 보았으나 단 한가지도 매듭을 지을 수가 없었다.
전주까지 돌아갈 일을 생각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대적광전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명부전을 옆을 돌아오던 어린 아이의 투정 소리가 고즈넉하게 가라앉아 있던 고요를 흔들어댔다.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가던 나의 생각도 심할 만큼 부서지고 말았다. ‘부처의 가르침도 별 것이 아니구나’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대적광전 앞에 쌓아 두었던 부처의 고요는 흔적도 없이 복원되어 있지 않은가.
귀신사를 나와서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이다. 점점 가팔라지는 오르막을 따라 달리면서 귀신사에서 맛보았던 고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비록 귀신사는 초라한 모습으로 업드려 있었어도 대적 광전 앞마당에 쌓여 있는 직육면체의 고요는 육중한 무게로 존재하고 있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숱한 문제들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거대한 바람에 우뚝 선체로 맞서는 거목(巨木)처럼, 조금 더 대범하고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부처님은 귀신사까지 찾아 와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요함으로 화평(和平)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고갯길을 오르는 발걸음이 훨씬 가볍다. 대적광전 앞마당에 직육면체로 쌓여 있던 고요를 한동안은 가슴속에 보듬고 달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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