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斷想)

늙는다는 것

힘날세상 2015. 8. 18. 16:49

늙는다는 것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샛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 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 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 올 사람은 없을 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 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 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비가 짖궂게 내리는 날 오후 독특한 음색의 최백호가 부르는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듣는다. 눈을 감는다. 귓가를 맴돌아 가슴으로 파고드는 선율. 아늑하다는 느낌에 젖는다. 그때 나의 가슴을 두드리는 허전함. 그것은 최백호가 노래하고 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것일까. 내가 잃어버린 것이고, ‘다시 못 올 것'일까.

   자신을 떠나버린 여인을 향하는 마음. 그것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보고 싶은 마음이고, 그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는 짙은 색소폰 소리를 듣고,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듣는다. 값싼 화장을 한 시골 다방 마담과 실없는 농담을 건네 보지만 그는 그리움을 어쩌지 못한다. 밤늦은 항구에서 돌아본 세월은 서글픈 모습으로 서 있다. 자신을 두고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하는 까닭에 이제는 실연의 아픔도 없을 것이다. 그 여인으로 가득 차 있던 자신의 청춘은 다시는 돌려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잔의 위스키나 색소폰 소리는 더 이상 자신의 아픔을 달래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어딘지 처량해 보이는 자신을 그는 바라본다. 그는 다방을 나서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는 항구에서 한 마리 갈매기가 될 지도 모른다. 끼륵끼륵 자신의 지난날을 울어대는 외로운 갈매기.

   그러나 최백호는 그리움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굵디굵은 동아줄 하나를 찾아낸다. 자신의 아픈 상처를 싸매고 자신의 눈물을 닦아낼 참 아름다운 말을 찾은 것이다. ‘낭만.’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지난날과 그리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모두 낭만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낭만! 그것은 모든 것을 끌어안아 버린다. 들어보라! 짓궂게 내리는 빗줄기를 가닥가닥 쓰다듬으며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고 있는 최백호의 노랫소리를.

 

   비는 참 무심하게 내린다.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둠 속에 빗줄기를 세우고 있을 뿐이다. 빗줄기 속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짙은 메타포가 담겨 있겠지만 나는 나를 꽁꽁 묶고 있는 허전함에 맞서지 못한다. 아니 허전함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낭만이라는 말을 끄집어 낼 수 없다.

   최백호는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진다며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럴까. 허전함은 가버린 세월일까. 세월과 함께 내가 쥐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하나씩 등을 돌렸던 것일까. 처연하기까지는 않았지만은 제법 날카로웠던 삶의 각도에 맞서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또 놓쳐버렸던 것일까. 그렇다면 늙는다는 것은 내가 지니고 있던 것들이 나를 떠나고, 또는 내가 잡고 있지 못하고 놓쳐버렸던 것일까. 나는 놓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놓쳐버린 것들이 늙음일까. 자기합리화의 시선 위에서 스스로 강하게 부정해보지만 부정되지 않는 바로 그 늙음이란 것일까.

   늙는다는 것은 낡아가는 것이다. 쥐는 힘이 약해 무엇을 손아귀에 쥘 수도 없고, 사고와 논리가 흐트러져 예리한 판단도 하지 못하고, 또렷한 논리를 전개하지도 못하고, 젊은이들의 언어 세계에서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작은 일에도 서운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늙으면 가진 것을 놓아야 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고, 쉽게 말하지도 말아야 하고, 젊은이들의 세상에서 슬며시 눈길을 돌려야 하고, 좀 바보스럽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늙는다는 것은 허전함의 실체를 온 몸으로 맛보는 것이다. 내 품에 안겨 재롱을 피던 자식들이 자신의 세상을 펼쳐내며 자꾸만 멀어져가고 자식들이 떠난 빈 방에 우두커니 앉아 눈이나 깜박거리고 있는 것이야말로 허전함의 실체일까. 그렇다면 이 허전함은 최백호가 노래하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것일까. 늙는다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그리워하는 하나의 낭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는 밤의 시간을 짙게 색칠하며 끝없이 내리고 있다.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위에, 내가 잃어버린 것들 위에, ‘다시 못 올 것들 위에 허전함을 더하며 멈추지 않을 기세로 내린다.                                                                2015.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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