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斷想)

[독후감] 무딘 가슴에 쏘아 박는 살

힘날세상 2015. 11. 3. 08:06

무딘 가슴에 쏘아 박는 살

                                                                                                                - 진동규의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을 읽고

 

 

통랑하게 익어가는 가을이 덜컹덜컹 내려앉는 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표표히 흐르는 전주천을 따라 걷는다. 쉬리가 살고, 수달이 햇살을 즐기는 전주천은 완산주(전주의 옛 지명) 사람들의 빛바랜 이야기를 가라앉혀 천년의 세월을 흐르고 있다. 전주천이 살아 있는 전주라면 전주와 전주의 사람들을 노래하고 있는 시인 진동규는 시대와 역사를 거슬러 살아가고 있는 초인(超人)이다.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진동규는 자신의 시집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에서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는다. 시인은 우리가 그냥 스치고 지나쳐버리는 하찮은 것들에 생명을 불어 넣고, 가치를 채워가는 마술사이다. 두드러진 사람들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순간순간을 포착하여 의미를 더해가는 제법 솜씨 있는 연금술사이다. 시인은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말하지만, 그가 창조해내는 의미와 가치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보편적이고도 객관적인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안고 살아야 하는 이야기라면 시인이 던지는 메타포는 결국 우리들의 삶이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인 것이다.

 

전주에서 생활하면서 시심(詩心)을 키워가는 시인 진동규는 늘 전주를 이야기하고 있다. 길가에서 피어나는 풀 한 포기, 완산칠봉 자락을 울어대는 새의 울음 하나, 어깨를 겯고 더불어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곁을 트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을 위한 시를 쓰고 있다. 굴절되고 고달픈 삶의 무게를 털고 일어서는 산까마귀 같은 사람(톱밥난로가 타는 방), 가족을 잃고 허탈함에 빠져 있는 사람(누님꽃), 이발료 올려받자고 투정하는 아들같은 종업원에게 게으르지만 않으면 충분하다고 다독이는 사람(통일이용원), 사랑도 내던져버리고 판소리에 영혼을 불사르는 사람(신재효), 삶의 고단함을 담아 두드린 농악 가락이 대보름 저 달에까지 뻗쳐가서 그 소리 되오게 쳐야 한다는 농악꾼(상쇠 양순용), 자신들의 모든 것을 덮어 누르고 있는 눈 덮인 겨울산의 어둠에 맞서 당당히 버티어 서 있는 사람(겨울산 어둠은), 첩에게 밀려 이혼을 당하면서도 설거지까지 끝내 놓고 나오는, 학교로 찾아간 아들이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더라고 눈물 흘리는 만복이 엄마(박꽃 피는 밤길)같은 사람들과 울고 웃고 부대끼며 살아간다. 진동규는 우리들 곁에서 수더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백제의 땅에서 살았던 민초(民草)들과 그들을 이끌었던 통치자들이 교감하면서 쌓아놓은 삶의 두께에 켜켜이 농축되어 있는 시간들이야말로 천 년의 도시 전주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처럼, 그들의 투박한 족적(足跡)들이 퇴적되어 미래의 전주를 세워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진동규의 시이다.

탐욕에 젖어 사는 사람들에게 가끔씩은 자신이 지닌 것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고 시인은 하소연한다. 애지중지 지니고 있어도 세월이 갉아먹고 망각이 짓이겨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털어내고 불태우면 후련해지는 참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버리다보면 눈물나던 세월까지도 버릴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불꽃) 정녕 진동규가 버리지 못하는 것은 따로 있다. 지금 우리가 발디디고 살고 있는 이 땅을 다져주었던 사람들의 마음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전주의 이야기는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솔 꽃가루 쌓인 / 토방 마루 / 소쩍새 울음 몇 / 몸 부리고 앉아 / 피먹진 소절을 널어 / 말립니다 / 산 발치에서는 한바탕 / 보춘화 꽃대궁 어지럽더니 / 진달래 철쭉 몸 사르더니 / 골짝 골짝 / 오늘은 /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 쌓인 송화가루/ 받은 기침을 합니다.

-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전문

하나의 생명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피먹진 울음을 울고, 어지럽게 몸을 사르고 있는 봄날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이라고, 그저 봄이 왔다고 무덤덤할 뿐인 우리들, 송화가루가 받은 기침을 해대지만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고통의 몸부림을 하고 있는 자신인 것도 모른 체 그저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는 무지몽매한 우리들에게 시인은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전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볼 혜안을 좀 가져보라고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서동이 심어 두었던 미륵사 연뿌리를 반월성 연못에 옮겨 심었던 야심찬 견훤 대왕님의 미래지향 정신과(눈썹 끝에 연꽃 피는), ‘이성계의 거동이 하 수상쩍어서 가슴엣피 등창으로 죽은 견훤왕, 견훤성에 올랐던 정몽주의 올곧은 충정심(누른 잎 지고 풍경 소리 깊습니다), ‘그때 그집 주인이 반역했다고, 그래서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북으로 흐른다고 소문내고 그런 속셈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며 정여립이 열고자 했던 대동(大同)의 세상(댁건너 대수리를 잡습니다)을 마음 속에 꼭꼭 눌러 담고 살아야 한다고 시구(詩句)에 힘을 싣는다.

 

휘어도 휘어도 꺾일 수 없는 활, 하루에도 몇 번씩 시위를 당깁니다. 수렁에 빠져도 사는 그 억척의 물소뿔을 휘어 쑤꾸욱 쑥쑤꾹 억겁의 세월 날고 풀어 시위를 당깁니다.

진안 곰티재 아기바투 목구멍에 쏘아 박고 만수산 드렁칡을 당기어 정몽주 뒤통수에 날린 살, 단풍보다 더 붉게 다가산을 덮어 흐르던 동학의 꽃붉은 함성, 타는 보리 모가지에 또 한 대 살을 날립니다.

금강 섬진강 만경강 황토땅 흐르던 파랑새 울음을 시위는 울어줍니다. 맨발의 견훤대왕 등창에 박히어 울던 살, 오늘은 그대 가슴의 찬 바위에 쏘아 박을 한 대 살을 재어 봅니다. 시위를 당깁니다.

- 파랑새 울음을 웁니다전문

세파에 짓눌려 삶의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그야말로 살아가는데 급급하여 자신들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땅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역사의 두께도 모른 체, 자신의 걸음만 내디디고 있는 우리들에게 진동규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활시위를 당기는 심정으로 시를 쓴다. 그가 쏘는 화살은 제법 날카롭기는 하지만 맞을수록 힘이 돋을 것 같다. 고도(古都) 전주에는 지금은 없는 백제의 미륵사 뜨락 늙은 스님까지 죄 나와 춤판을 벌이고 있(석류, 노을), ‘스물 아홉 젊은 장수 견훤은 저 기린 만나는 순간 의기투합하여서 참아비를 찾아내기도 하며(기린봉에 딸 오릅니다), ‘우금치 나갔던 동학군까지 다 모여들어 열무김치에 밥 비벼 먹던 아름다운 삼천(가라고 가랑비 있으라고 이슬비)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잿빛의 시가지를 감싸고 흐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최대의 가람이었다는 미륵사를 중심으로 피어났던 백제의 문화는 백제를 송두리째 이어받고자 했던 견훤으로, 동학군의 혁명정신으로 이어져 있어, 화살 한 대 맞고 나면 의식의 심층부에 가라앉아 있던 완산주가, 전주가 몸을 일으켜 어깨동무로 어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화살에 이끌려 역사의 능선에 오르기만 하면 전주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동규 시인은 붓끝이 부드러운 화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동규는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붓으로 시를 쓴다.

 

강물보다 먼저 맑아진 / 건넛산 / 깊어진 강물에 / 붓을 빨고 / 나앉았습니다 / 머리에 두른 삼베 수건도 / 벗어두고 / 물러나 앉았습니다 / 하늘이고 들판이고 / 휘젓던 붓자루를 / 던져두고 / 고요히도 / 물러나 앉았습니다

- 가을 도드리 1전문

 

시를 쓰고 있는 것인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가을을 말하려던 붓자루를 거두고 그저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를 읽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말갛게 익어가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 시인의 옆에 나란히 앉아 시인과 같은 눈높이에서 가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진동규는 그렇게 시를 쓴다. 그가 하는 작업은 망치 소리처럼 요란하지도 않고, 우뚝우뚝 솟아오른 회백색의 콘크리트 건물같이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소근거리는 이야기처럼, 캔버스에 다소곳이 앉아있다가도 가볍게 차고 날아가고 싶은 그 안자락의 울음을 다 울고는 내 창가에 앉아 다시 날개를 가다듬는한 마리 새처럼(종이학) 조용하고 나긋나긋하다. 진동규의 시는 구도가 잘 잡힌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인 것이다.

 

밤의 한가운데 / 어둠으로 깨어나는데 / 아내는 머리맡에 앉아 / 피리 구멍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 음계마다 짚어오는 것은 / 어둠이 아닌, 새벽이 아닌 / 연안의 잔물살같은 / 無彩의 찬란함이었습니다.

- 동지전문

 

진동규는 자신의 시를 읽는 독자들이 모두가 일을 멈추고 휴식에 젖어드는 밤에도 늘 깨어 있는 아내와 같은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의 삶의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사람, 또 자기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성찰하고 예견해 보는 사람, 그리고 이웃과 호흡을 나누며 전주의 뿌리 깊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 세월을 엮어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노도(怒濤)와 같은 거대한 존재나, 현란하고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소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그들을 연안의 잔물살 같은 無彩의 찬란함이라고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관념에 빠져 버릴 수도 있는 자신의 메시지를 우리들 앞에 구체적인 그림으로 내놓는 그의 시는 견딜 수 없을 전율이고, 영원히 살아 있을 감동이다.

 

견훤성 옛터가 바라다 보이는 전주천변 벤치에 앉아 시집이나 한 권 읽으면 좋을 가을날, 전주의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게 다가온다. 진동규도 휘어도 휘어도 꺾일 수 없는 활을 들어 무딘 우리의 가슴에 쏘아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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