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같이 죽으니 괜찮아
비오는 목요일.
시험기간인지라 일찍 퇴근하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내가 신호를 보낸다.
"비오는 날 모악산 마실길 걷기로 한 거 기억해?"
"콜~!"
작년 여름에 무지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었던
귀신사에서 시작하여 구성산 자락을 감고 돌아가는 마실길을 걷기로 한다.
반바지에 샌들. 비옷과 물 한 병이 전부다.
청도리 마을회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귀신사 옆길을 돌아 싸리재로 올라간다. 삼층석탑을 지날 무렵 비가 쏟아진다. 앞으로는 비만 오면 임도를 걸을 것이다. 우비를 입고 거세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널직한 임도를 걸어보라.
"지난 번에는 산딸기가 참 많았었는데..."
아내는 뭔가 아쉬운 모양이다.
"저기 저 동네가 선암마을이야. 김제시에서 전원마을로 터를 닦아 놓았는데... 어떤가? 저 동네에서 한 번 살아볼까"
발 아래로 선암마을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언젠가는 강원도의 어느 산골마을에서 살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그렇게 히히낙낙거리며 조용한 임도를 걷는다.
선암마을로 넘어가는 싸리재 정상에서 망설인다. 여기에서 금구 명품길을 따라 선암마을까지 갔다가 다시 귀신사로 돌아갈까하다가 생각을 바꿔 구성산 방향으로 걷는다.
구성산 갈림길까지 걷다가 상황을 봐서 구성산을 올랐다가 내려오거나, 동곡마을에서 청도리로 이어지는 계곡길을 따라 걸어볼 요량이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너무나도 고요한 임도를 걷는다. 문득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이리저리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본다. 두 달 이상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까맣게 태우며 모습을 감추었던 빗줄기가 세상의 생명체들을 기쁘게 울려주는 소리다. 초록의 나뭇잎을 온몸으로 껴안는 빗줄기의 사랑어린 몸부림이요 함성이다.
빗속을 걸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자식놈들 걱정이며,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며, 느릿하게 걸어 동곡마을에 내려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동곡에서 금산사로 가서 도로를 따라 청도리로 가는 길을 버리고 동곡에서 청도리로 이어지는 계곡길을 따르기로 한다. 10여년 전에 가본 길이기에 자신있게 들어섰다. 그런데 거기에 댐을 막아 저수지를 만드는 대형공사를 하고 있다. 되돌아서려다가 일단 진행을 해보니 시멘트도로가 있다. 한참 갔는데 더 이상 길이 없다. 기억을 바탕으로 지형을 참작하여판단해보니 조금만 가면 될 것 같다. 마눌을 세워놓고 우거진 풀밭을 헤치며 길을 찾아본다. 풀이 우거지긴했지만 희미한 길이 있다. 마눌을 데리러 갔더니 그 와중에도 다슬기를 잡고 있다. 길은 풀이며 갈대에 묻혀 없어지기도 한다. 마눌은 걱정스러운 눈치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스마트폰으로 위치를 보니 조금만 가면 청도리다.
결정을했다. 그냥 숲을 헤치고 돌파하자.
길은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이어지기는 하는데 풀이 우거져 길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비가 오는 관계로 반바지에 샌들 차림인데도 종아리가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산비탈로 희미하게 이어지던 길이 없어진다.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커다란 바위 위를 굴러 내린 물줄기가 커다란 담(潭)을 이루기도 하면서 시원스레 흘러간다. 길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계곡이 눈에 들어오고, 한 여름에 이곳에 와서 놀다가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식 실소(失笑)가 터져 나온다.
앞길을 막아버린 갈대숲을 헤치며 동물적 감각으로 나아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산에 다닌 경험으로 판단할 때 분명히 길이다. 다만 사람이 다니지 않았을 뿐 분명히 길이다. 원래 길이 없는 상태와, 길이 있었는데 통행이 없어서 희미해진 길은 걸어보면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자신있게 치고 나간다. 희한하게도 계곡을 건너가는 길도 찾아낸다. 하늘은 검은 구름이 잔뜩 몰려와 금방이라도 어둠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 같다. 숲 속을 헤치며 나가는데 음산한 기운이 돋는다. 마눌에게 물어보니 죽어도 같이 죽으니 괜찮다고 한다. 2년 전 늦은 가을, 대아 수목원에서 중수봉, 삼정봉을 거쳐 금남정맥을 따르다가 왕사봉, 칠백이고지를 지나 운암산 직전에서 날이 어두워 희미한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어둠 속에서 후레쉬 하나에 의지해 헤매면서 우리가 손을 잡고 했던 말이다. 만약에 나 혼자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상당한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이다. 옆에 아내가 있어서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둠이 짙어질 무렵, 계곡을 빠져나와 청도리에 도착했다. 하여튼 참 좋은 계곡이었다. 바위도 좋고, 물도 좋고, 그늘도 좋았다.
그리고 참 좋은 시간이었다.
2012년 7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