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을이 떠나가고 있다. 올 가을은 그랬다. 붉은 웃음을 흘려 세상을 풍미하던 설악의 단풍 이야기를 만날 틈도 없이 가을은 참 매정하게 뒷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몇 해 전 가을 문경 주흘산이 펼쳐 놓았던 알록달록 고운 치마 자락을 반추해 볼 겨를도 없이, 떠나가는 가을의 손을 놓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산에서 계절을 만난다. 빨치산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지리산 자락 달뜨기 능선에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 있는 자태로 생명을 피어 올리는 진달래를 만나 봄을 이야기한다. 갈맷빛 등성이로 불덩어리 햇볕을 받아내며 제법 지조 높은 신하처럼 온갖 고통을 갈무리하는 만행산 작은 천황봉의 능선에서 여름의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백학봉 거대한 암봉(巖峰) 아래 질펀히 내려앉는 백양사 애기 단풍을 흔들어 살랑거리는 청초한 바람 줄기 따라 가을을 거닌다. 온 세상을 흰 눈으로 덮어 새들도 사람도 모두 잠들게 하는, 그래서 ‘천산조비절天山鳥飛絶 만경인종멸萬逕人縱滅’이라는 유종원의 ‘강설(江雪)’ 같은 절품(絶品)을 일깨워주는 소백산 칼바람을 안고 겨울의 멋스러움을 다소곳이 적어 놓는다.
산에서 만나는 계절은 늘 진솔하다. 나뭇가지 끝에서 세상과 작별하는 낙엽의 마지막 한 마디는 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산비탈, 가파른 사면(斜面)을 덮어 동면에 들어가는 작은 생명들에게 자신의 몸뚱아리를 기꺼이 내어 놓는 낙엽은 헌신적 사랑을 가르쳐 준다. 빽빽한 편백나무 숲을 거닐어 만난 여름의 속살은 힘겨운 세상 속에서도 늘 살아있는 의미를 촘촘히 이어준다. 그래서 나는 산에서 계절을 만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환희를 다독거려 왔다.
그런 가을을 올 해는 그냥 보내 버리고 말았다. 집안에 약간의 일이 있어 올 가을엔 산에 들지를 못한 까닭이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삶의 이야기를 붉으레하게 채색해주던 가을을 안아보지도 못하고 겨울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섭섭하고 안타까움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단풍이 봄꽃보다 곱다고 했던가. 작은 능선을 따라 걸으며 골짝을 타고 거슬러 오르는 오색의 화려한 단풍 숲을 발걸음을 세어가며 걸어 세월을 돌아보는 일의 즐거움은 가을이어야만 말할 수 있다. 마음까지 붉게 물들이는 단풍의 새뜻한 이야기가 가슴을 파고들어 몇 해 묵은 그리움까지 끄집어 내어 줄세우는 가을날을 놓치고 말았다. 비스듬히 짓눌러 오는 말간 햇살에 속살을 드러내는 단풍의 부끄러움을 흡족히 담아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그리고 나는 무엇인가를 잃었다고 눈물짓고 있었다.
새벽녘이었을까.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져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밖으로 나왔다. 이리저리 거실을 돌아다니다가 커튼을 걷고 문득 발코니를 바라보는데 가을이, 풋풋한 가을이 오롯이 앉아 있지 않은가. 황(黃)의 치맛자락에서 펼쳐지는 홍(紅)의 춤사위와 등(橙)의 노래가 흐드러지게 어울어지고 있다. 한 여름의 무더위를 온 몸으로 끌어 안아 몇 잎 떨구어 놓은 낙엽도 제법 굵어진 가지 밑에서 새날을 다독이고 있다.
벌써 20여 년도 지난 어느 가을, 백양사 백학봉을 돌아내리다가 발밑에서 마주친 단풍나무.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듯 실오라기 같은 몸뚱이에 여리디 여린 두 잎을 힘겹게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인연을 맺었다. 두 번의 강산이 변하면서 이제 제법 몸매도 어디에 내놓을 만해졌건만 한 번도 화려한 화장을 하지 않았었다. 여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푸른 옷을 다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뜨거운 여름을 견디어내기도 했다. 서릿발을 머금어 노랗게 세상을 덮어버리는 국화 옆에서도 그 앙상한 몰골로 부끄러움도 없이 겨울의 차가운 몸을 끌어안고 나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 처절한 20년 동안의 몸부림이 오늘을 향한 애절한 눈빛이었다는 것을. 화려한 부활의 콘서트를 마련하고 있던 숨죽임이었다는 것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풍성한 햇볕도 안아보지 못하고, 청아한 바람자락 한 번 제대로 감아보지 못하는 발코니의 척박함을 안고 온 몸을 던져 울고 있었을 한 그루 단풍나무의 가슴저림을 20년 동안 한 번도 헤아려 주지 못한 나는 무엇을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가슴저림을, 그 화려함을 의식의 심층부에 갈무리한다. 그런데 그 화려함 속에는 아직도 청(靑)이 남아 있다. 사악하지도 않고, 탐욕하지도 않은 수더분한 자신의 모습,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여린 두 잎도 바로 청(靑)이었다. 청(靑)은 황(黃)을 이기고, 홍(紅)을 이기고, 등(橙)을 이긴다. 청(靑)이 모든 화려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청(靑)은 황(黃)도 될 수 있고, 홍(紅)도 될 수 있고, 등(橙)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靑)은 청(淸)이다.
나의 작은 단풍나무는 단 한 번 화려한 옷을 입어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찾아다녔던 화려함이 얼마나 속(俗)한 것이었는가를 지긋이 말하고 있었다.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힘날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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