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설악산(1,743m 2005. 09.23-24)

힘날세상 2011. 4. 22. 10:42

 

4. 설악산(1743M)

* 일 자 : 2005. 9. 23 - 24

* 동 반 자 : 아내

* 코 스 : 한계령 - 서북능 - 대청 - 희운각 - 천불동 - 비선대 - 소공원

* 산행시간 : 한계령(03:15), 서북능 갈림길(04:50), 끝청(07:20분), 중청(08:00), 대청(08:30), 아침 식사(09:10), 소청(09:30), 희운각(10:30), 비선대(13:20) 소공원(14:10)

* 찾아간길 : 호남 고속도로 전주IC - 경부 - 중부 - 영동 - 중앙고속도로 홍천 IC - 44번 국도

1. 설악을 위하여

설악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담겨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설악은 내 마음 속에서 언제 분출할지 모르는 마그마처럼 살아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정말 무지몽매(無知蒙昧)의 극치를 보이며 어렵고 힘들게 파고 들었던 이래, 설악을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좀처럼 옮겨지지 않았다. 한 동안 지리산에 미쳐 싸돌아다니던 시절에도 설악을 향한 살가운 그리움은 희미했지만 끊어지지는 않고 있었다. 임걸령에서 쏟아져 내린 달빛이 목통마을의 가랑이를 벌리고 운우(雲雨)의 정(情)을 나누며 여름의 시간을 속삭이고 있는 풍광(風光)에 젖어 있었을 때, 그들이 희멀겋게 흘리는 묘무성(猫撫聲)에 숨을 할딱이며 지리산 능선에 몸을 누이고 산자락을 훑어 오르는 산의 숨소리에 나의 숨이 멎어갈 듯 빠져 있을 때, 삼신봉으로 한꺼번에 떨어지는 별빛에 젖어 천왕봉의 세련되고 날렵함에 한눈을 팔아 시골 아낙의 넓적한 엉덩이 같은 반야봉의 수더분함을 버리고 눈도 감고 귀도 막은 채 내달리던 지리산 능선의 야반도주를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을 때, 뱀사골을 깊숙이 찔러대며 붉은 웃음을 미친 듯이 흘려 반야봉 자락에서 한바탕 분탕질을 하고 피아골까지 넘어가 그 진하디 진한 색깔로 타오르다가 하늘까지 휘덮으려던 가을의 성큼한 발걸음에 짓눌려 있을 때에도, 설악은 언제나 자신의 머리를 내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향한 애틋한 연정(戀情)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을 뿐, 한 번의 사랑도 나눌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설악의 치마폭을 들춰 보려는 마음은 키워가고 있었지만, 대학생의 젊은 혈기로 아무것도 모른 채 단 한 차례 덜컥 범해 버렸던 대청의 나직한 울음만을 간직한 채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2. 아! 한계령

9월 23일 밤, 5시간 30분을 달려서 도착한 한계령은 새벽 3시의 두꺼운 어둠 속에서 추적거리는 가을비에 짓밟히고 있었다. 거기에다 동해를 거슬러 오면서 발끈한 바닷바람의 일그러진 발걸음까지 더해 참으로 음산하기까지 한 기운이 점령군의 기세로 다가들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을비는 늘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가온다. 그것은 차분함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처량한 느낌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오늘처럼 바람이라도 더할라치면 차가운 기운까지 몰려 들어 제법 겨울 기분까지 흘리며 눈을 흘겨댄다.

희미한 등불을 밝히고 있는 포장마차가 어둠 속에서 졸고 있기에 다가갔더니 몇몇 선착객들이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있다. 추위를 녹여볼 양으로 구겨진 비닐 처마를 들추는데 문득 양귀자의 <한계령>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은자>라는 3류 가수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서북능으로 오르는 들머리인 계단은 머리를 잔뜩 쳐들고 제법 가파른 기울기를 만들며 어둠을 뿌려내고 있었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모두들 선뜻 나서지 못하고 머쓱한 눈길로 신부를 쳐다보는 숫총각처럼 화장실 옆 계단근처에서 어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대체 설악산이 뭐가 그리 대단하기에 입구에서부터 설설 기고 있느냐고 쪼아댄다. 꼭 아내의 핀잔 때문만이 아니라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파른 계단에 첫발을 올려놓았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가는 해방감을 맛보며 상기된 마음으로 헤드랜턴의 불빛을 한 발짝 앞세우고 설악의 자락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3. 어둠으로 들어서는 산행

10여 분을 오르다가 우리를 뒤따라 온 다섯 분의 산객들이 강한 경상도 말씨를 두꺼운 어둠 속에 끼워 놓은 채 앞서가고 난 후 우리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어둠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새벽이라기보다는 한 밤중에 산으로 들어 백두대간을 밟아가던 어느 분의 산행기를 읽으며,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오는 어둠의 칼날을 어떤 초식으로 막아냈을까 하는 것이 가장 궁금했었다. 그것도 텅 빈 산속을 혼자서 걷는 그 호젓함은 분명히 두려움일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막상 맞닥뜨려 본 설악의 어둠은 결코 두려움이 아니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무서움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포근함이었다. 평화로움이었다. 문득 고은 시인의 <눈길>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 써 / 쌓이는 눈 더미 앞에 /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지금까지 이 시를 읽으며 고은 시인이 노래하는 어둠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의 화평’이라고 가르치면서도 기실은 그 ‘어둠’의 본질을 정확히 그려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와 둘이서 설악의 서북능을 감싸고 있는 어둠의 한 가운데를 걸어 오르며 어둠의 내면적 의미가 화평인 것을 새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헤드랜턴 불빛은 두꺼운 어둠의 살갗을 헤집고 손바닥만한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 내가 걸어야하는 산길이 점으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선(線)이 점(點)으로 다가올 때 나는 세상의 모든 속(俗)한 기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지러운 인간세계의 군상(群像)들이 엮어내는 혼탁한 패러다임을 모두 버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공간에 나는 고요와 함께 내가 걸었던 지난 세월의 이야기들을 촘촘히 쌓아 둘 수가 있었다.

자신을 키운 것의 8할이 바람이었다던 미당(未堂) 선생의 시구(詩句)가 아니더라도 나는 내 삶의 궤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던 가슴저림 같은 것들이 가난한 시간들의 비틀걸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지로 떠나는 열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면서 떨구었던 눈물쯤은 흐릿한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세월의 안쪽을 따라 이어지던 일련의 아픔들은 아금받스럽게도 미완의 젊음을 흔들어대었었다.

그 깊은 상채기들의 몸부림을 따라 일어서던 지난날의 묶음들을 떼어 던져버리면 어둠은 커다란 입을 벌려 낼름낼름 삼켜버렸고, 가느다란 무늬처럼 섞여 있던 빗줄기까지 마음의 창문을 열고 부패할 듯 부풀어 오르던 묵은 시간들을 씻어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화평이었고, 오늘밤 설악의 어둠 속에서 내가 찾아낸 삶의 내면적 가치였던 것이다.

 

4. 새벽은 끝청에서 있었다.

1 시간 40분 동안 어둠에 젖어 도달한 서북능 등허리에는 앞서간 산객(山客)들의 발걸음 위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고요와 적막의 물결이 있을 뿐이었다. 천하의 설악에 채 열 명도 넘지 않은 사람들이 헤집고 들었으니 어디 흔적이나 남았겠냐만, 대승령과 대청을 좌우로 나누며 우두커니 서 있는 이정표 한 허리에는 누군가 매어 놓았는지 붉은 리본이 하나 질끈 동여매여진 채 바람에 떨며 가녀린 모습으로 선객(先客)의 족적을 알리고 있다.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불쑥불쑥 저마다의 목소리로 일어서는 능선길은 오밀조밀한 암봉을 이루기도 하고, 어린아이 팔뚝만한 굵기의 밧줄을 늘어뜨린 채 깎아지른 듯한 직벽(直壁)을 내세우기도 하면서 새벽을 일구어 온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아쉬운 것은 이 정도의 시간이었으면 능선 좌우로 그림처럼 달려가고 있을 마루금의 야릇한 실루엣을 슬몃슬몃 고개를 돌려 마음에 담을 수가 있어야 하는데, 설악이 검은 치맛자락을 꼭꼭 여미어 입은 탓에 애꿎은 가슴만 두드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저 어둠과 살을 섞으며, 빽빽한 밀도로 감싸 오는 는개(霧雨)의 힘아리 없는 몸뚱이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끝청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을 즈음 헤드랜턴을 걷었다. 불빛을 치우자 불빛의 가장자리에 붙어 끈덕지게 따라오던 어두운 기운이 다시 밀려들었다. 다시 불을 밝힐까 생각하다가 내딛는 발걸음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고, 이제 제법 투명해진 어둠의 얇은 켜 밑에서 영역을 넓혀오고 있는 새벽의 흐벅진 살갗에 부벼보고 싶었던 까닭에 그냥 발길을 옮긴다.

끝청은 자신을 짓밟아 범해오는 뭇사람들의 발길을 피해 자꾸만 꼭대기로 달아난다. 억센 사내의 손길을 뿌리치며 미처 옷깃을 여미지도 못한 채 달아나는 아낙네마냥 끝청은 붉은 속살을 드러내 보이고 만다. 가을은 그렇게 끝청에서 단풍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설악산 지도를 처음으로 보았던 때, 나는 끝청이란 이름에 견딜 수없이 밀려오는 전율에 어찌할 수 없었다. 끝청이라는 이름은 사춘기 소년 시절 가슴패기를 흔들어대던 소녀들의 이름만큼이나 내 마음을 콩닥거리게 하였다. 누가 있어 이런 이름을 지었단 말인가? 대청, 중청, 소청의 형제들에게 밀려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끝청. 천왕봉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천왕봉이 아니라 제석봉이고 보면, 설악의 진면목은 끝청에서라야 온새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시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태도인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닫는 것은 삶의 곡선을 낮은 기울기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여유나 포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밟아가는 삶의 궤적에 대해 즉각적이거나 직선적인 대응보다는 반응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객관적인 자세로 대상을 주시해보면 조금이라도 더 현명한 답을 구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끝청은 짙은 안개를 끌어안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다.

새벽은 끝청에서 빗방울과 함께 추위에 떨며 서 있었다. 서북능을 밟아 온 많은 사람들이 방풍 자켓을 입으며 끝내 시야를 터주지 않는 설악의 산신(山神)을 향해 투덜투덜 발길질을 해대고 있다.

 

5. 아아, 설악이여, 대청의 하늘이여

출입을 금하고 있는 중청의 옆구리를 돌아드니 널찍한 안부에 중청대피소가 짙은 운무(雲霧)를 품고 동그맣게 서 있다. 대피소는 오색을 기점으로 하여 밤을 타고 오른 사람들, 희운각에서 하룻밤을 이야기하다가 서둘러 올라 온 사람들, 아예 중청에서 밤바람의 시나위 가락과 더불어 가을을 희롱하던 사람들이 어울어져, 온갖 빛깔로 물들어가는 산자락의 형색(形色)만큼이나 야단스럽다.

시장기에 지친 속을 달래려고 엉덩이 붙이고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을 찾아 대피소 안을 기웃거렸으나 밤새도록 비바람에 시달린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으로 몰려들어 그야말로 시장 속 같았다. 사람이 많은 것은 어떻게 견딜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진하게 배어버린 역한 땀 냄새에는 두 손을 들고 물러 나고 말았다.

아침식사보다는 안개에 갇혀 있는 대청의 봉우리를 탐닉해보자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너덜길을 오른다. 오르내리는 사람들과 옷깃을 스치며 이리 저리 몸을 비틀어 가쁜 숨을 쉬어야 할 즈음에 우리는 대청의 꼭대기에 섰다.

대청은 산악동호회의 이름으로 참여한 목소리 높은 여자분들의 약간 날카로운 수다와, 사진 촬영을 위해 ‘대청봉’이라고 새겨진 돌기둥을 선점(先占)하려는 재빠른 움직임, 혼자서 조용히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한 산객(山客)의 가느다란 외로움과, 이들을 향해서 냅다 불어닥치는 아침의 신선한 바람까지 한꺼번에 끌어안은 채 아무런 말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치렁치렁한 머릿결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문득 짙게 드리워져 있던 구름이 한꺼번에 걷히며 대청에서 조망되는 산줄기들이 찬란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그 짧은 시간을 타고 끝청이 흘리기 시작한 단풍의 붉은 웃음은 중청을 지나 대청의 정수리까지 이어지더니 산자락을 타고 희운각 지붕까지 단번에 내달아, 장엄하게 이어지는 공룡능선의 바위등허리에 매달린다.

그렇다. 설악의 지붕은 이미 가을이 벌이고 있는 호화로운 잔치마당이다. 가을은 이미 설악의 대청에서 붉은 빛으로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문득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산행(山行)’이라는 시를 떠올려 본다.

 

遠上寒山石徑斜 / 白雲生處有人家 / 停車坐愛風林晩 / 霜葉紅於二月花

멀리 한산에 오르려니, 돌길은 비스듬한데, /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있네.

수레 멈추고 가만히 늦은 단풍을 즐기니, / 서리 맞은 잎이 꽃보다 붉구나.

 

햇살이 안간힘을 다하여 구름을 걷어내고 순간적으로 드러낸 설악의 속살은 참으로 고왔다. 홍(紅)이 있었고, 황(黃)이 있었으며, 등(橙) 또한 청(靑)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산자락을 쓸어내리며 자신들이 질러댄 불길을 산 밖 세상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저 많은 색소(色素)들을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갈무리하였다가 일시에 뿜어내는 행위는 거룩한 신의 손길인가, 아니면 창조주가 내리는 분에 넘치는 선물이란 말인가? 시작이 저럴진대 한창 피어나는 설악 단풍의 한가운데를 들여다보다가는 온몸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다.

이제 저 불길이 백두대간 굵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 태백산 상상봉을 돌아 낙동정맥을 달려 가 금정산을 지나 태종대 바위벽을 불태우고, 영취산 봉우리들 아름답게 단장하고 호남정맥 길고 긴 산줄기를 덮어가 여수 앞바다에 한 점 붉은 빛으로 풍덩 빠져 들 것이다. 또한 산줄기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속세의 인간들의 찌든 마음까지도 깨끗이 씻어 내리라. 그래서 온통 말갛고도 향기로운 시간들로 되살아나리라.

대청에 섰다. 더 이상 올라설 곳이 없는 대청의 꼭대기에 서서 호화찬란한 춤을 추고 있는 설악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의식의 심층부에서 욕심의 덩어리들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해발 1743M에 올랐다는,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는 만족감보다는 웅장하게 뻗어나가고 있는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밟아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란 어디까지인가? 이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6개 명산들을 올랐으니 그저 심신(心身)을 열고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山河)을 걸으며 콧노래나 부르면 족할 것을 .......

1924년 에베레스트에 처음으로 올랐다고 하는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 1886~1924)는 “산이 거기에 있기에 산에 오른다”는 달관(達觀)의 경지를 보여주는 듯한 말을 남겼다. 두고두고 떠올려 볼 만한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잠깐 설악의 세상을 환하게 열었던 햇살은 떼로 밀려든 구름에 밀려 눈을 감고 말았다. 이내 천지(天地)는 구름에 싸여 버리고 시계(視界)는 다시 흐릿해졌다.

 

6. 공룡능을 곁에 두고

소청 갈림길을 지나 희운각으로 내려서는 길은 거의 낭떠러지 수준으로 이어진다. 만약 이 길을 올라서는 사람이 있다면 상당량의 체력을 내놓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간간히 뒤돌아 봤을 때 천양각색의 얼굴로 내려다보이는 공룡능선의 암봉들과 화채릉의 귀암(鬼巖)들의 부추김에 힘입어 무릎을 두드려가면서라도 오르기는 오를 것 같다. 희운각의 지붕이 손에 잡힐 듯이 내려다보일 때쯤 다시 한 번 구름이 걷히고 장엄한 산줄기가 드러난다. 희운각 지붕에서 시작하는 천불동의 들머리를 위압스럽게 내려 누르고 있는 거대한 바위벽에 눈길이 팔려 아내는 걸음을 걷지 못한다. 공룡의 등줄기로 이어지는 공룡능선을 가리키며 저기를 밟아가야 한다는 말에 아내는 지레 겁부터 집어 삼킨다.

 

희운각을 지나 무너미 고개에 섰을 때 마음과는 달리 우리는 천불동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하였으나 체력을 걱정하는 아내의 앙탈을 뿌리치지 못한 까닭이다. 사실은 은근히 화가 돋기도 했다. 밤을 달려 설악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룡능선의 비경에 빠져 보려는 심사(心思)였건만, 동행한 아내로 인해서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결기가 돋는다.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고 속삭이는 아내의 말을 듣다보니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다음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노라던 시구절을 되새기면서 공룡능을 밟아갈 때까지 설악의 공룡능은 내 마음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천불동으로 내려선다. 대청에서 구름 사이로 잠깐 동안 담아 두었던 설악의 환한 세상을 토닥이며,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데 눈은 웅장한 자세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공룡능의 암봉으로 자꾸만 돌아간다. 또 다른 산행을 위하여 공룡능선은 남겨 두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 신의 역작(力作)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천불동의 신비경(神秘境)을 향한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7. 천불동은 선계(仙界)인가

천불동을 내려서는 동안 오른쪽 옆구리에 바짝 붙어 따라 내리는 화채릉(華彩陵)의 웅자(雄姿)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아내는 천궁폭포의 폭포수를 만나자마자 아무런 미련도 없이 헌신짝처럼 화채릉을 내던져 버린다. 화채릉을 세상에 드러 내놓는 것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절벽의 공(功)이다. 더구나 바위틈에 독야청청한 자세로 뿌리박고 있는 청송(靑松)까지 거느리고 있는 오련폭 부근은 필설(筆舌)로 형용한다는 것은 차라리 죄를 짓는 일일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길가의 바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불끈불끈 솟구쳐 오르는 암벽에 눈길을 보내다가, 천길 아래 좁은 바위틈을 헤집고 무창하게 흘러내리는 폭포수의 빠른 가락에 추파를 던지기도 하면서 얼어 붙어버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느낌그대로 이야기하자면 천불동은 와룡생의 무협지에서 나오는 곳이라는 생각이었다. 흑무(黑霧)가 피어나는 으스스한 골짝이 아니라, 주인공이 기연(奇緣)을 만나 무공보다는 심지(心志)를 다지는 그런 곳 말이다. 10여 년 전에 대만에 가서 태로각이란 협곡을 보면서 어린 시절 재미나게 읽었던 와룡생의 <군협지(群俠誌)>에 나오는 주인공 서원평이 정신을 닦아내던 골짝이 바로 이런 곳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설악의 천불동을 보는 순간, 이곳이야말로 맑은 정신세계를 열어낼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대만의 태로각은 골짝은 더 깊을지라도 천불동이 연출하는 조화(調和)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바위가 있으면 그 위에 뿌리박은 소나무가 있고,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면 청아(淸雅)한 바람이 살랑거리는, 그래서 정신까지도 정갈하게 만드는 포근함을 천불동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칼로 잘라낸 듯하고, 붓으로 그려낸 듯한 천혜의 절경을 눈에 담을 만큼 담았다고 느껴질 즈음에 갑자기 눈앞을 막아서는 웅자(雄姿)한 암봉! 비선대였다. 신선이 어쩌고 하는 전설보다는 그곳 너럭바위에 빼곡히 앉아 대청에서 흘러내리는 거울 같은 맑은 계류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있는 사람들의 환한 얼굴과 설악을 오르내리며 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건너편 비선대 바위벽에 매달려 젊은 날의 가을을 딛고 오르는 클라이머들의 로프 자락에서 살랑거리다가 비선대 통제소 짙은 숲을 빠져 나오는 푸른 바람을 한껏 들여 마시는데 이곳이 바로 선계(仙界)였다.

8. 설악을 나오며

소공원을 향하여 이어지는 길은 더 이상 등산로가 아니다. 속세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한 켠에서 풍겨나오는 막걸리의 냄새가 휘감겨 있어 영롱한 빛깔로 마음에 갈무리해왔던 순수하고 말간 자연의 이야기를 다독여 보고, 또 다시 반추해 볼 수 있는 고즈넉한 산행의 마무릿길은 아니었다. 내려오는 산객(山客)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까닭도 이러한 기대감이 무너져 버린 속상함을 잊으려는 것이리라.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밟아가자고 아내와 손가락을 걸었다. 반드시 느릿한 걸음을 걸어야 한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자국에 탐욕과 집착에 빠져 있었던 지난 세월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이가 먹을수록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은 한 번 이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밤을 새우며 걸음을 걸으며, 늘 부족한 살림살이에서도 환한 얼굴로 곁을 지켜 준 아내와 잔잔한 이야기가 도란거리는 시간을 이어 보아야겠다. 물줄기를 나누고 삶의 풍습을 가르며 삶의 축(軸)을 이루고 있는 대간의 등허리를 켜켜이 묵은 세월로 두껍게 감싸고 있는 숱한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텅 비워 헐거워진 가슴에 담아 보는 일은 어떤 즐거움으로 다가 올 것인가.

50대(代)에 들어서면서 느닷없이 빨간색이 좋아진다. 선명한 핏빛이 강력한 생명력을 뿜어내기 때문이라는 나의 목소리를 아내는 잿빛으로 가라앉아 가는 노년의 삶을 화려한 빛으로 덧입혀 보려는 얄팍한 심사라며 사정없이 뭉개어 버린다. 그러나 산허리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홍엽(紅葉)의 노래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답답한 가슴이 환하게 뚫리는 것은 이유야 어쨌든 빨간빛이 고개 숙인 생(生)의 감각을 일깨워 주기는 주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산행에 나설 때 늘 빨간색을 지닌다. 하다못해 손수건이라도 빨간색으로 들고 나서면 발걸음이 가볍고 코끝으로 다가서는 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소공원 매표소가 보일 무렵에서 숲 속의 호수같이 정갈하게 가라앉아 가던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일파만파로 밀려오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세속의 깃발은 높이 솟아 있었고, 설악이 정성들여 다독여 온 가을은 내동댕이쳐지고 있었지만, 소공원 주차장에서 7번 버스를 타기 직전 되돌아본 설악은 그래도 후덕한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힘날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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