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우리는 대한민국 전의경이다.> 생활 체험 수기 공모 우수상 수상작
아들, 전경대에서 웃다.
눈물이 났습니다. 괜히 눈물이 났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돌아오겠다며 갈맷빛 산등성이까지도 녹여 버릴 것 같던, 그 앙칼스럽게도 뜨겁던 햇볕이 폭사되고 있는 연병장을 걸어 군복을 입었던 아들 녀석이 전투 경찰복으로 갈아입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록 전방 골짜기에서 근무할지라도 육군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엇인가 서러운 느낌이 허리춤을 붙잡고 늘어져 말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치 캠프 가는 것 같은 기분’이라며 여유로운 얼굴로 입소대대 연병장에 들어선 아들은 언제 거수경례를 해봤겠느냐만, 단 한 번의 연습으로 씩씩하게 거수경례를 하였습니다. 그런 아들을 보며 '경례 잘하는 것 보니까 군대 생활 잘할 것이로구만' 속으로 이렇게 격려를 보내기도 했었는데, 그 아들 녀석이 시위 현장의 맨 앞에 나서야 한다는 전경으로 차출이 되었다는 사실에 공연히 화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을 그렇게 쓰다보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밀쳐 내었던 지난 일까지도 가슴패기를 쥐어 뜯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육군훈련소에서 사격을 잘했다고 포상으로 전화를 한 번 할 기회를 얻었다는 편지를 받고 손에 전화기를 달고 다니다가 쓰레기 버리려고 나갔던 참에 온 전화를 받지 못해 안타까움에 마음 아팠던 일까지 떠오르며 괜히 심통이 났습니다.
중앙경찰학교에서 2주 동안 생활하면서 아들 녀석은 틈만 나면 전화를 하였습니다. 집을 떠나 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는 가뭄에 콩 나듯이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하던 전화를 수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좋았습니다. 육군으로 후반기 교육을 간 병사들의 부모님들이 그렇게도 기다렸을 전화를 매일 받는다는 것은 정말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경찰학교에서 아들이 전화를 하기 시작한 지 3일 쯤 지났을 때, 아내는 아들의 목소리에 눈물을 거두었고, 중앙경찰학교로 면회를 갈 때 쯤 해서는 밝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로서 애써 태연한 척하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서 걱정거리가 자라고 있는 것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새벽부터 서둘러서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충주로 차를 몰았습니다. 입대한 지 7주만에 아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아내는 소풍을 나서는 어린 아이마냥 들떠 있었습니다. 비가 제법 거세게 내리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악셀레이터 페달을 힘주어 밟고 있었습니다. 위험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아들에게 향하는 마음을 제어할 수는 없었습니다.
중앙경찰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면회 시간이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경찰관들(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모두 다음날 면회를 하기로 예정된 교육생들로서 아들과 같이 교육받고 있는 동기생들이었습니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면회 장소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있는 부모들도 우리와 똑같이 걱정 반, 기대 반이었습니다.
이윽고 감색 경찰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아들들이 줄을 지어 걸어왔습니다. 아들 녀석은 학급장의 직책을 맡아 맨 앞에서 동료들을 인솔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보는 순간 아내는 기쁨인지 반가움인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노랗게 염색한 긴 머리에 헐렁한 바지를 입고 게으름의 극치를 보이던 아들 녀석이 산뜻한 복장에 의젓한 모습으로 다가와 ‘충성’하며 거수경례를 올리는데 참으로 흐뭇하였습니다. 제법 절도가 있고 각이 잡힌 행동을 하는 아들은 예전의 느릿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경찰복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경대에 차출되었다는 서운한 마음은 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싸가지고 간 밥을 먹으면서 그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더운 여름날 훈련을 받느라고 고생을 했을 것이고, 예전 같았으면 제가 겪었던 고통을 줄줄이 푸념처럼 늘어놓았을 것이지만,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육군훈련소에서 보낸 시간들은 육체적으로는 고통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 보고, 자아를 성숙시킬 수 있었던 아주 귀한 시간이었죠.”
아들은 여유를 보였습니다. 정말 ‘이 녀석이 내 아들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들은 성숙해 있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육군이든 전경이든 어느 곳인들 다르겠습니까? 제 자신을 낮추고,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열심히 근무할 거예요. 저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아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었을까요. 참으로 실팍하고 건강한 사내가 되어 우리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입대일이 다가오면서 아들은 여러 가지로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제 나름의 생활에 젖어 있다 보니, 이미 만들어진 틀과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군대가 두려워지는 까닭인 것 같았습니다. 이런 아들을 보면서 과연 군대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사내는 누구나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 ‘군대 생활은 절대 헛된 세월이 아니라 내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다.’라고 설득을 했지만, 아들은 막무가내로 가기 싫다는 말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입대 전 날 머리를 깎고 들어와서는 ‘이제 마음이 편안해요.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하면서 편안한 속내를 드러내었습니다.
밝은 얼굴로 입소대대로 들어섰기에 어느 정도 마음은 놓았지만, 불과 두 달 만에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줄은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제는 어느 곳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되더라도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글아야,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 네가 대한민국의 전경대원으로서 부여받은 임무를 잘 수행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며 기다릴게. 알았지? 힘!”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아들의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처음에 전경으로 차출되었을 때 실망한 것이 사실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어디로 가든 상관 없어요. 제 몸과 마음으로 잘 할 자신이 있거든요. 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보니 전경대 생활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해요. 아버지, 어머니 지켜봐주세요.”
아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습니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 밤 늦게까지 앉아서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정리해가며 전경대원으로 나서게 될 아들에게 편지를 한 통 썼습니다.
글아야,
오늘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참 가벼웠구나. 불과 두 달 사이에 네가 이렇게까지 성숙해져 있을 줄은 정말 몰랐었다. 뜨거운 햇볕이 있어야 포도가 단맛을 높일 수 있는 것처럼, 너 또한 힘든 훈련소 생활을 통하여 내적인 성숙을 이룬 것 같아 아버지는 오늘 참으로 흐뭇하고 즐거웠단다.
글아야
너는 이제 전투경찰대원으로서 어느 곳에서 근무를 하든지 대립의 각이 날카로운 사회적 갈등의 선두에 서서, 시위현장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겠지. 물론 네가 말한 대로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높은 산, 깊은 골짜기에서 흘릴 땀방울이나 평화 방패의 끝에서 거두어들일 세상 이야기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해도, 네가 가야 할 길은 세상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글아야,
어쩌겠느냐. 너는 이미 경찰복을 입어버린 것을.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의 선두에 서 버린 것을 어쩌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아들아, 방패를 들고 있는 너와, 너와 맞서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적으로 보지 않고, 월드컵 축구할 때 너나 없이 껴안고 뛰었던, 이승엽의 홈런 한 방에 박수를 보내던, 박지성의 데뷔골을 안타깝게 기다렸던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80년대 대학이 시위의 중심지였을 때, 학교 교문에서 파견근무하고 있던 형사들과 사사건건 부딪치면서도 나중에 그들과 정이 들어 담배를 나누어 피우던 일이 불쑥 생각이 나는구나. 그런 거야. 사람은,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정을 가지고 있기에 시위의 깃발을 내리고 돌아서면, 방패를 내리고 복귀하면, 그분들은 너희들의 이웃 아저씨이고, 너희들은 그분들의 아들이요, 동생들인 것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시위를 하고, 또 시위를 막아야 하는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서로를 원수처럼 생각은 하지 말아주기를 아버지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글아야.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너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가야 할 젊은이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일일지라도 인생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생활하여, 삶의 역량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만들기를 바란다.
“충성! 아버지, 경북 경찰청 소속 2316 전경대로 발령 받아 왔습니다. 이곳에서 2주 동안 적응 훈련을 받고 나면 본격적으로 전경 생활이 시작됩니다. 아버지 편지대로 시위 현장에 나서더라도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고, 젊은이로서 해야 할 도리를 지켜가며 잘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9월 21일 밤 10시가 다 되어 전화를 걸어 온 아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질서가 잡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후후 녀석, 이제 제대로 갈 길을 가고 있는 모양이로군. 목소리를 들어 보니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자대 적응 훈련을 하는 2주 동안, 아들은 거의 매일 전화를 했습니다. 부대의 선임들이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조교들이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줘서 어렵지 않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같이 전입해 간 세 명의 동기들과도 마음이 잘 맞아 서로 격려해가며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대에서 2주 훈련이 끝나는 일요일에 면회를 오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영천까지 한 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는 2316 전경대는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었습니다. 친히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2주 동안의 적응 훈련을 잘 받았고, 선임 대원들이 형제처럼 잘 돌봐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소대장님의 말소리에 정이 듬뿍 흐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심이 되었습니다.
운동장 한쪽 나무 그늘에 자리를 펴고 앉아 조교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전경대가 단순히 시위 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방범 순찰, 치안 업무 등이 더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근무가 없는 경우에는 독서실에서 책도 읽고,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도 하면서 자기의 시간을 누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정기 휴가뿐만 아니라, 두 달에 한 번씩 3박 4일의 외박도 실시하고 있어 대원들의 사기도 충천해 있다는 설명에 ‘전경대 생활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로구나.’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경은 시위 진압이나 하는 아주 힘들고 위험한 근무를 하는 집단이라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습니다. 물론 시위 현장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어떤 가치관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합니다.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들로서는 경찰복을 입은 입장에서 다양한 인간상(像)과 사회상(像)을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고귀한 체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들의 가슴에 붙어 있는 경찰 휘장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습니다.
그 동안 적응훈련을 통하여 2316 전경대의 새 식구로 이끌어 준 조교들과, 아들의 동기들과 같이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돌아서는데 아들이 등 뒤에서 껴안았습니다.
“아버지, 절 낳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아들로서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늘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남을 비하하는 욕설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들이 참 대견했습니다. 역시 군대는 2년 동안 ‘썩는’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안 가야 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나태하고 무질서했던 아들의 몸과 마음을 이렇게 변신시켜 준 곳은 대학교도 아니고, 친구들도 아닌 바로 2316 전경대였습니다.
“글아야, 그래, 내 아들이 되어 주어서 고맙고, 이렇게 잘 자라줘서 고맙구나. 여기에서 생활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시간들을 갈무리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慧眼)을 기르기를 바란다.”
차를 타고 정문을 나서는데 조교들과 아이들이 일렬로 서서 거수경례를 하며 환송의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무슨 자랑스러운 일이나 한 듯 마음이 흐뭇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결 가벼웠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내가 불쑥 얘기를 꺼냅니다.
“경찰복을 입은 글이의 모습이 의젓해서 좋아요. 무엇인가 강직한 의지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남자들은 군대를 가야 한다고 하나 봐요. 아들이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전경대 생활에 대해 소상하게 말해주던 조교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네요. 아이들이 만능엔터테이너라고 하던 그 다정하고 깊이 있는 눈빛을 가진 조교말예요. 우리 아들도 훗날 그런 사내가 되겠지요?”
“글아가 휴가를 나올 때쯤에는 더욱 더 늠름한 사내가 되어 있을 거야. 이제 아들 걱정은 하지 말자고.”
아내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아들이 평화의 방패를 들고 사회 갈등의 한 단면에 서 있는 것을 계기로 우리 부모들도 세상을 조금 넓게 보고,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거야. 내 이웃을 가족처럼 껴안아 웃음으로 대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돌아다보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보자고. 뼈마디 쑤시는 고통을 안고 있는 농부들의 아픈 마음도 한 번 더 헤아려보고,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쓰라린 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거야. 우리 사회에 아름답고 보기 좋은 시위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미천하고 알량하지만 우리가 가진 역량을 다하면서 글아가 건강한 심신을 다져가기를 기다려보자고.”
차창으로 경찰복을 입고 빙그레 웃는 아들의 얼굴이 뚜렷하게 비쳐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아들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전경입니다. 2316 전경대에서 미래를 향한 날갯짓을 하고 있는 늠름한 대한민국 전경대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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