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을 달리며
작성일 2001-12-29 오후 8:34:30
12월 28일 금요일 오후 2시.
성탄절에 아내와 같이 하프를 달리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는데, 몸이 근질근질하다. 아내는 어제 모악산 등산으로 아파서 못 달린다고 한다. 사실은 나도 엉덩이 뒷부분과 고관절 부분이 아프기는 하다. 달리기와 등산을 할 때 사용하는 근육이 분명 다른 것이 확실하다.
밸트색에 포카리 한 병을 차고 우림교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뭔 미친짓인가하고 바라다 본다. 그래도 풀코스로 스트레칭을 다했다. 오른쪽 종아리가 무겁다. 그러나 달리기로 했다.
시원하게 뚫린 6차선 도로를 따라 달린다. 오늘 들고 달릴 화두(話頭)는 새해 설계이다. 박물관 앞을 달리면서 몸을 점검해 보니 오른 쪽 종아리가 묵직하고 오른쪽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은 흐르는 땀을 씻어주어 겨울의 위세가 아직은 날카롭지 않게 느껴진다.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금천 저수지가 황량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 흔한 겨울 새떼 하나 없이 텅 빈 그대로이다. 겨울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허무하기 일쑤다. 그래서 하얀 눈을 내려 잠시나마 자신의 초라함을 가리고 나타나 설경을 뽐내지만 조금만 지나면 추한 얼굴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또한 바람의 길고 긴 머리채를 붙잡아 자신의 것인 양 흔들며 애교를 부리지만 늘상 그 속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다.
2001년은 온통 부상으로 얼룩진 한 해였다. 달리기에 대한 지나친 욕심의 말로다. 언제나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고 스스로 채찍질을 하건만, 언제나 욕심은 나보다 한 발짝 앞서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늘 부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꼭 후회하는 것이다.
금구중학교 정문이다. 조그만한 시골 중학교. 방학이라 텅 빈 교정이 참 쓸슬하다. 활짝 열어 놓은 대문은 누구를 들어오라는 것인가. 그 누구하나 찾아 주는 이도 없는데. 학교에는 아무도 없다. 운동장에서 실컷 뛰어 놀았을 아이들. 그들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청운의 푸른 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분명 이나라를 이끌어갈 미래의 힘인데. 여기서 3년을 보내고 전주에 있는 우리 신흥고등학교에 와서 혼신을 다해 공부하여 성공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나라를 위해서 또는 자신을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포카리 한 모금 하면서 2001년을 훌훌 털어버린다.
풀코스의 기록도 그렇고 하프의 기록도 그렇고 올해는 기록이라는 것보다는 그저 풀코스를 두 번이나 달렸고 7번의 하프를 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래도 위안이 된다. 결정적인 때마다 부상으로 연습을 못하고 남들이 다 뛰는 서울마라톤대회는 참가 신청도 못해보고, 4월의 전주대회는 연습부족에다가 의욕만 앞선 오버페이스로 겨우 완주하였고, 가을의 춘천대회는 발뒤꿈치 부상과 어깨의 통증으로 역시 예상 기록에 훨씬 뒤진 기록으로 겨우 결승선을 밟았다.
그러나 두 다리 성하게 달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여 춘천대회에서는 사랑의 레이스 켐페인에 참여하여 점심을 굶는 학생들에게 자장면 한그릇 값이라도 보태 주었다. 노랗게 핀 유채꽃밭을 자랑하는 함평대회, 따가운 햇살아래서 하프 사상 처음으로 포기를 생각하였던 변산대회, 아내와 나란히 달리면서 아내의 하프 기록을 20여분이나 단축할 수 있었던 순천대회. 모두다 가슴에 남아있는 올해의 달리기 생활이다.
교내 단축마라톤에서 1등을 목표로 해성학교 운동장에서 늦은 밤까지 스피드 훈련을 하면서 뾰쪽하게 가다듬었던 흉한 욕심의 실체들. 그리고 막상 4등으로 들어와 허탈해하던 마음들도 이제는 모두다 버려야 한다. 김제 평야의 넓은 벌판에다 모두 다 버려야 한다.
금구!
이곳은 그 옛날 여립할아버지(조선 선조때 서인들에게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던 똑똑한 인물)가 왕후장상(王候將相)이 어디 씨가 있는냐면서 대동계를 조직하고 힘을 기르던 곳이 아닌가? 여립할아버지가 생각한 세상은 모두가 평등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모두다 즐겁고 편안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달리기를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모두다 즐겁고 편안하게 달릴 수 있는 세상이다.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고 달리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길을 찾기를 얼마나 간구하고 간구하였던가? 그러나 어느 곳에도 그런 곳은 이제 없다.
서울마라톤이 열리던 그 춥고도 무서운 날, 클럽 회원들이 서울로 모두 올라고 나혼자 남았던 그날, 어린 시절의 꿈이 뛰놀던 고향에 가서 흑백 텔레비전 같은 추억이 묻어나는 시골길을 달렸었다. 적당한 곳을 막아놓고 물을 다 품어내고 붕어, 메기, 뱀장어, 가물치,송사리 닥치는 대로 다 잡아내던 수리조합 뚝길을 달리고,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벼 이삭에 붙어 있는 메뚜기를 잡았던 논둑길을 달리고, 부러진 연필도막에 김치국물이 흘러 뻘겋게 젖어버린 책보퉁이를 매고 왁자지껄 떠들며 뛰어 놀았던 초등학교 운동장을 달려 보았다. 그리고 빛이 바랜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내가 얻은 것은 아무리 뛰어다니고 돌이켜봐도 그곳에는 지난날의 순수함이나 편안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들판도 그대로이고 서울가는 기찻길도 그대로이건만 그곳은 더 이상 그 옛날의 공간이 아니었다.
바람이 한자락 불어온다.
금구중학교를 나서 내리막길을 달린다.
새해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달릴 것이다. 얼마를 달리고 얼마나 빨리 달리는 것은 이제 생각 밖이다. 그저 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달릴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 감사하고, 달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같이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달리면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하고, 내가 달리는 것을 보아 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달릴 것이다. 멈추지 않고 달릴 것이다.
아직도 정립되지 않은 달리기에 대한 철학을 정립하기 위해 새해에도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으리라.
'왜 달리는가?'
이 물음에 대한 만족한 답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달릴 것이다.달리면 힘이 나는 생활, 그것이 내가 늘 가지고 다니는 달리기에 대한 화두이다. 언제나 그 모습의 실체를 보지는 못하면서도 말이다.
금천 저수지를 돌아드는데 지난 봄에 여기를 달리다가 복숭아 두 개를 주셨던 할아버지의 노점상이 있던 곳을 지난다. 어찌된 일인지 그 노점은 흔적도 없다. 경황중이라서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못드렸는데. 그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도 어렴풋하게만 떠오를 뿐인데. 할아버지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달릴 수 있는 동안은 절대로 그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누군가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오른쪽 종아리는 어느 정도 풀어진 듯하다. 그러나 오른쪽 어깨의 통증은 더하다. 못견딜만큼 아리기도 하다. 어깨에 신경을 돌리다보니 달리는 것이 어렵다. 오른 팔을 몸에 딱 붙이고 달려 본다. 통증을 잊기 위해서지만 소용이 없다.
달리기는 분명 즐거운 운동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아픔이 동반되기도 하는 것이 인생과 똑같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도 똑같고, 여럿이서 같이 달리지만 결국은 저 혼자 달려야 하는 것도 똑같다. 그래서 나는 달리면서 인생을 본다. 달리면서 많은 인간형(人間型)을 본다. 단순히 기분이 상쾌하고 육체를 짓누르고 있는 노폐물을 배출시켜 준다는 이유보다는 달리기 속에서 인간들의 세상을 볼 수 있기에 달리기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어느덧 박물관을 지난다. 이제 잠깐이면 우림교이다. 시계를 본다. 우림교까지 5분 안에 달리면 갈때보다 10분이 빠르다 .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직도 속도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속물이다. 그래서 나는 즐거운 달리기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늘 쫓기고 경쟁하고 치열한 삶의 세계 한 복판에 서 있는 속된 인물이다.
다시 한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
새해에는 정말 편한 마음으로 달리고 싶다. 달리기에 구속되지 않고 달리기를 즐기고 싶다.
우림교 교각에 매달린 바람줄기가 제법 길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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