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동안 인간 속세를 떠났으니...
16일 토요일 오후 5 시.
따라오겠다는 마눌님을 떼어놓고
오직 혼자서 달려 볼 심사로 집을 나섰다.
밸트색에 매실차를 한 병 담아 허리에 차고
해성학교에 도착하여
제대로 해보자고
먼저 운동장을 한 바퀴 걷고
두바퀴를 조깅하고 난 후
스트레칭을 하자는 마음으로
걷기부터 시작했는데 ....
중학생 축구부 훈련하는 모습에 눈이 팔려
스트레칭이 너무 길어지고 말았다.
5시 40분이 넘은 시간에
출발을 한다.
어디까지나 천천히 달리자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6분 페이스로 맞춘다.
처음에는 동적골을 지나 태봉초등학교에서 좌회전하여 마을을 돌아 나오려고 했는데
중인리 입구 삼거리를 지나며
어제 훈련코스를 그대로 따라가보자는 마음이 일어
금산사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혼자서 달리는 길은
늘 자유가 있어서 좋다.
페이스의 자유,
코스 선택의 자유,
그리고
정신적인 자유.
복잡하게 얽힌 머리를 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 이쁜 딸 아이의 수시입학 원서 작성에 관한
골치 아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좀 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 보자고
온 정신을 거기에 모아 보지만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기에
자꾸만 눈이 높아져
도저히 해답을 구할 수가 없어
버리기로 했다.
독배 마을에 29분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6분 페이스를 유지한 셈이다.
밸트색을 차에 풀어 놓고 왔기에
급수가 걱정이 되었는데
마을 회관 옆에 수도가 있어서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갯길을 올라간다.
클럽을 창립하고
일주일에 두 세번씩 넘나들던 고갯길.
그때는 오직 이 길만 달려야 하는 줄로 알았다.
아픈 무릎을 쓰다듬으며
눈물로 넘어야만이
춘천대회 풀코스를 달릴 수 있다는 말에
그저 말없이 달렸던 고갯길.
그 뒤로 혼자서 달릴 때는
꼭 이 고갯길을 넘는다.
그러면
이상한 힘이 솟아나고
달린다는 사실에 취해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마라톤의 진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힘이 든다.
머리 속이 복잡한 때문이리라.
어제 합동 훈련이 떠오른다.
우리 클럽이 주관한 것은 아니지만
사전에 준비가 너무 안되었고(임원들의 책임이 크다)
특히 급수 봉사자는
출발 직전까지 아무도 나서지 않아
결국 임원이라는 죄로
억지로 떠맡게 되었다.
그 동안
이러한 장거리 훈련 때만 되면
나는 수도 없이 급수 봉사를 해왔다.
부상이 있었든 없었든 말이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결국은 임원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열은 무한대로 늘어지는데
혼자서 급수한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한 때는
미리 물을 가져다 놓고 달려 보기도 했었지만
급수 봉사라는 것이
꼭 물만 공급하는 것은 아니기에
누군가 봉사를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오르막을 오르는 발길이 무겁다.
즐겁게 달리자고 나섰는데
괜히 쓸데 없는 생각으로
기분만 흐리고 말았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42분이 지났다.
예전에 오르던 시간이다.
내리막길을 힘차게 넘어
벚나무 터널을 헤치고 달린다.
갑자기 마주 오던 차가 헤드라이트를 켠다.
깜짝 놀라서 몸을 움추리는데
대학 동창녀석이다.
"야 왜 너 혼자 뛰냐?"
"물은 있냐?"
하더니 생수 한 병을 내민다.
주유소에서 받아 왔단다.
친구와 헤어져서 달리는데
발걸음이 가볍다.
귀신사 입구에 도착하니 10분 정도 소요되었다.
시간을 보니 6시 30분 정도 되었다.
더 달리면 돌아올 때 어두워질 것 같아
도자기 공예방에서 돌아선다.
청심수퍼에서 포카리를 사서 마시는데
한 아주머니 하시는 말씀
" 멋헐라고 그렇게 뛰어 댕긴다요?"
"운동이고 취미활동이죠."
"어제도 겁내기 많이 뛰어 가등만, 근디 무신 여자덜이 그렇게 잘 뛴다요?"
"글쎄 그렇다니까요. 저는 죽어도 그 사람들 못 따라 갑니다.
돌아오는 길
오르막이 길게 이어진다.
늘 오르던 오르막이기에
힘차게 올라선다.
고갯마루까지 내려올 때와 거의 같은 시간이 소요된다.
전주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전주!
완전한 고을!
언젠가 신문에서 보았는데
전주는 가뭄, 홍수, 일조량 등에서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한다.
이런 도시에서 달리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리막길은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혹시나 모를 부상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굽이굽이를 도는데
그 옛날 눈물과 땀이 맺힌 곳이다.
사실 전주클럽은
바로 이 고갯길을 발판으로 성장하였지 않은가?
독배 마을에서부터 속력을 올려본다.
빗방울이 살갗을 간지럽힌다.
'비야 내려랴 괜찮아
바람아 불어라 괜찮아'
대학 연극반 시절 공연했던 작품의 대사가 생각난다.
영국의 톰존스의 희곡 "철부지들(fantastics)"
전북 연극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고 박동화(朴東和) 선생님의 정렬로 탄생한 기린극회와 창작극회!
학교에서 공연하면 기린극회요
밖에서 공연하면 창작극회였던 시절.
당시 전국 연극제를 쓸었다고 했었는데...
지금도 그 뒤를 이은 창작극회는
전국 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였고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대학시절
그 늦은 시간까지 연습에 몰입하다가
선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운동장으로 끌려가 수도 없이 운동장을 돌면서
외쳐대었던 말은
"연극은 사랑을 배우는 고된 작업이다."는 한마디였다.
그런가 보다.
나는 마라톤과 연극이 아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처음 시작할 때 어색하고
처음부터 주역을 못맡고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꾸만 어려워지는 것 역시
둘이 똑같다.
공연 후 관객들이 모두다 돌아가 버린 텅빈 객석에서 풍겨나오는
그 짙은 허무까지
마라톤은 꼭 한 편의 연극이다.
피나는 연습을 한 배우는
관객들의 찬사를 받는 것하며,
연기력이 좋은 배우는
아주 쉽게 연기를 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까지,
그리고
연극에도 꼭 도와주는 스탭이 필요한 것까지
어쩌면 그렇게도 마라톤과 똑 닮았는지.
연극을 통해서 인생을 배운다고
선배들로부터 들어왔는데
이제보니
마라톤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참맛을 맛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황소리를 지나면서
속도를 더 올려 본다.
시계를 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으나
참기로 한다.
그냥 몸이 허락하는 만큼 달려보자고 마음 먹는다.
숨이 가쁘지 않다.
허벅지도 괜찮다.
이제 달리면 되는 것이다.
발바닥에서 걱정되는 통증도 없다.
오직 달리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영광스럽게도 황홀경에 젖어들어가는 기분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와 같다.
하늘을 나는 기분.
정말 의식이 몽롱한 기분.
그것은 런러스 하이(Runners High)가 아니던가.
마라톤을 하면서
4년 동안 세 차례 느껴본 황홀감.
속된 말로 그 진한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달리는 것인지
길이 달리는 것인지
하늘이 달리는 것인지
도대체 구분하지 못하는 꿈같은 순간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크랙션 소리는
모든 것을 짓밟아 버렸고
나는 어느 덧 대순진리교 앞을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약 2km정도를 무아지경에서 달렸다는 얘기다.
해성학교 운동장을 서서히 돌면서
시계에 찍힌 랩타임을 보니
마지막 5km는 22분이었다.
운동장을 두 바퀴 돌면서
오늘의 달리기를 돌아다 본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더듬어 보며
오늘의 달리기를 같이한 신체발부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보낸다.
혼자서 달리자.
혼자서 달릴 때만 느끼는 오르가즘을 위해서라면
힘날들이여!
혼자서 달리자.
2003. 8. 17
무아지경에 젖어 한 순간 인간 속세를 잊었던 힘날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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