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100 명산 4]제 456 차 눈꽃 산행의 백미 바래봉(1,165m) 산행기
1. 일자 : 2019년 3월 16일 토요일
2. 동행 : 산정산우회 6명
3. 코스 : 운봉허브밸리 주차장(09:30) - 운지사(09:50) - 임도(10:50) - 바래봉 삼거리(11:23) - 바래봉 샘(11:31) - 바래봉(11:43) - 운지사 갈림길(12:20 - 12:31) - 운지사(13:11) - 주차장(13:25)
4. 거리 & 시간 : 9.51km 3시간 55분
5. 지도
등산은 빨간색, 하산은 초록색
6. 산행수첩
* 들머리 허브밸리 주차장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수퍼울트라급 초대형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비는 겨울이라서인지 받지 않았는데 다른 때에는 받는 것 같았다. 아주 깨끗한 화장실도 갖추고 있다.
* 주차장 옆에 있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운지사 입구에 도착하는데 왼쪽 임도를 따라 올라가도 되고,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 운지사 옆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갈 수도 있다. 다만 운지사 옆 산길은 2월부터 4월까지 산불 방지라는 이유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3월 16일은 눈이 많이 내려서 산불 위험이 없다고 판단하여 이용하였고, 내려올 때는 임도를 따라 하산하였다.
* 임도를 만나고 임도를 따라 걷는 산행이므로 힘들지 않고 조망도 좋았다.
* 바래봉 샘은 시원한 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7. 산길을 걸으며
산 아래에 비가 오면
산꼭대기는 눈이 오는 법
금요일 밤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급하게 산우들에게 통지를 했다.
바래봉 눈꽃 산행
8시 출발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콜한다.
모두들 산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
생각이 똑 같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서두를 것도 없이 느릿하게 걷는다.
지난 주
연석산 산행 이야기를 이어가며
다음 산행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어 본다.
결혼식이 있고,
집안 시제를 모셔야 하고,
사위가 남해 스쿠버 여행에 초대했고,
이래저래 날짜가 잘 맞지 않는다.
운봉 허브밸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산행 채비를 한다.
배낭 속에 넣어 온 먹거리들을 벌써부터 내놓는다.
석류즙
사과즙
초컬릿
오렌지
눈은 내렸지만
온도가 높아서인지 벌써 녹아내리기 시작이다.
초대형 주차장 끝에 아주 깨끗한 화장실도 있다.
화장실을 지나 운지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운지사까지 차를 타고 가는 분들도 있었는데 우리는 언제나 주차장까지만 차를 타고 간다. 어떻게든 더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운지사 앞에서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 운지사로 간다. 좌측 임도를 따르면 너무나 돌아가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번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아서 제대로 눈을 밟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덮혀 있을 산길을 걸으려는 속셈이다.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운지사로 향한다.
고요하기 그지 없는 운지사
운지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다.
눈을 맞고 있는 돌탑.
누군가가 간절한 소원을 담아 쌓았을까.
몇 백년이 지나고 나면 고색창연하게 낡아가면서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좀 받게 될까.
몇 걸음 걸었다고 준비해온 떡을 나누어 먹는다.
오늘 산행 후에 운봉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자주 먹는다.
기대했던대로 눈이 많다.
대체 얼마만에 밟아보는 눈인가.
오늘 바래봉에 오기를 잘했다고 모두들 웃음을 터트리고
앞으로 걷게 될 전북 100 명산 산행길도 유쾌하고 즐겁게 걸어보자고 다짐도 해보고
4월에는 남해의 봄을 맞으러 섬으로 가보자는 이야기며
서부능선도 걸어 줘야 하고
동부능선에서도 하룻밤 자 주어야 한다는 말들을 마구마구 털어내면 걷는다.
눈길은 눈 길을 만들고
그만큼 걸음은 느려지고
머릿속에 들어서는 상념은 깊어진다.
이쯤해서
블랙야크 100 명산인 방태산에서 만났던 지독한 눈이며
남덕유 황점골에서 허벅지까지 빠지며 걸었던 시간이며
방장산에서 허리까지 빠지던 눈길이 자꾸 떠올랐다.
느닷없이
옥룡설산에서 겪었던 칼로 에이는 듯한 바람과 눈보라가 생각나기도 했다.
땀이 송글송글 맺힐 무렵
운지사 입구에서 갈라섰던 임도와 다시 만났다.
눈은 세상을 가득 메웠으나
햇살까지는 어쩌지 못하여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까지 들었다.
또 다시 베낭을 풀고
온갖 먹거리를 꺼내어 먹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유명한 술 '수정방'으로 이야기가 옮겨가고
술을 좋아하는 오교수님은
입맛을 쩍쩍 다시고
천하에 좋은 술을 주어도 괴롭기만 하는 나는
우유 한 잔에 10배로 희석하여 마시던 양주의 향을 생각해기도 하고
별로 잘 마시지도 않는 이교수님은
막걸리가 당긴다는 등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실컷 떠들며 놀고 놀았다.
마지막으로 백두산 누님이 내놓은 메추리알 만한 초란을 두 개씩 까먹고 일어선다.
임도를 만나는 지점에 세워 놓은 이정표
운지사에 임도를 따라 오는 길은 3.2km이다.
내려가면서 보니까 제법 가파르고 길게 올라와야 한다.
운지사로 내려가는 방향의 임도
나뭇가지에 달라붙은 눈송이이가 아름다워서 한동안 눈을 붙여 놓고 바라보다가
고은 시인의 눈길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눈길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어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고은 시인이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세상의 손길을 받았지만
그래서 하루 아침에 몰락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가 써 놓은 시는 시로서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
세상을 덮어버린 눈을 바라보며,
온 겨울을 적막으로 덮으며 쌓이고 있는 눈을 바라보며
세파의 고뇌나
마음 속에 찌들었던 추악한 욕망들을 다 털어버리고
무념무상의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눈,
눈길.
오늘 눈길을 걸으며
나는 무엇을 그리고 있고
어떤 의미를 담아
시간을 조각하고 있는가.
갑자기 확 밀려온 눈부신 햇볕에
베낭에 넣어 온 선글라스를 끼면서
눈이 가져다 준 몇 가지 상념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써 본다.
느닷없이 눈 앞으로 펼쳐지는 지난 해의
황홀한 느낌의 황혼.
2018년 송년 인사를 드리러 부모님 산소에 갔다가 품어 놓은 황혼
눈길을 걸으면서
눈길을 버리고
엉뚱한 시공간으로 빠져들어가는 일
시험공부를 하다가
꼭
문학작품을 읽고 있었던 학창시절,
산을 걷고 있으면서
또 다른 산행을 그리고 있는 발걸음,
대만의 낯선 도시에 안겨 있는
객창감을 즐기면서
고비사막이나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를 떠올리는 나.
그래도
잘하고 잘한 일은
아내와 살면서
다른 여자를 생각하지 않은 일.
앞에서 걷고 있는 산우들을 바라보며
저들과 얼마동안을 같이 걸을 것이며
어떤 길을 같이 걸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하는 상념 속으로 빠져 든다.
소녀시대로 돌아가
눈밭에 드러눕는 놀이도 해보고
자신의 흔적을 들여다보며
쏟아진 햇살이 곱다며 파안대소를 지어보기도 하는데
산 아래 운봉읍이나 내려다보며
센치멘탈에 젖어보기도 한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
이것은 직접 해보아야만 그 즐거움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4 - 5 백미터급의 산꼭대기에 업드려
한 번
꼭 한 번만 세상을 내려다 보라.
이 사진 찍어서 대학신문에 올리려나
누가 이들을 보고 대학교수라고 하겠는가
산에 오면 모두 다 똑 같은 산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눈 밭에 앉아
무엇을 생각하든 즐거움이고
산에 들어섰으면
산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산과 하나가 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마라토너가 느끼는
'런너스 하이'와 같은 것일게다.
참 많은 생각을 하면서
임도를 걸어
바래봉 삼거리에 도착했다.
오른쪽 능선을 따르면
철쭉 군락지인 팔랑치를 지나
세걸산을 넘어
고리봉을 넘어
정령치, 만복대를 품고
노고단까지 서북능선을 걸을 수 있다.
오늘은 좌측으로 걸어
바래봉 샘에서 맑은 물 한 바가지 마시고
바람이 불어올 바래봉으로 간다.
가다가 가다가
나뭇가지 끝에 매달리는
아름다움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어보기도 하는데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슬몃한 욕심도 돋아난다.
눈
오직 눈이 지배하는 세상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그루 나무일까.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한결같이 솟아나는 바래봉 샘터.
약수(藥水)가 별 것인가.
서출동류(西出東流)든 아니든
물맛이 좋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바래봉으로 오르는 길은
오늘 참 아름답다.
어느 계절이 아름답지 않겠냐만은
내가 걷고 있는 오늘이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산꼭대기 가까이 내려온 하늘이
바람까지 차갑게 식혀 놓아
한 겨울의 맛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어
오늘 바래봉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겨울 눈 길을 그리워했던
산친구들 모두
즐거움이 무엇인지
은은하게 솟아나는 기쁨이 무엇인지
오늘
제대로 맛보았다.
노고단으로 달려가는 서북능선을 품에 안아보기도 하고
눈앞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서있는
언제까지 오를 수 있을까.
화대종주며
태극종주며
산등성이를 돌아다녀보는 일도 하나의 산행이지만
조용한 하봉에 앉아
밤을 새우며
달빛을 바라보는 일도
하나의 산행이 아닐까.
꼭 사람들이 많이 찾는 높은 산이 아닐지라도
달빛이 내려 앉는 고갯마루에서
나를 내려 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산행이 아닐까.
저 푯말 뒤로 이어지는 능선은
걸어서는 안되는 길이고
바래봉 뒤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따라
덕두산 지나 흥부골로 내려서는 길도
아껴두어야 하는 산길이다.
바래봉 정상석 홀로
남겨 놓고
돌아서야 한다.
하나의 미련도 없이
매정하게 내려서야 한다.
산꼭대기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고
매몰차게 내려설 수 있어야
제대로된 산행이라고
몇 년 전 하늘나라로 간
선배는 말했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내려서지만
미처 산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나는 산꼭대기를 다시 끌어 안고
스산한 마음을 다독인다.
내려가야 한다.
걸음은 산을 내려가지만
마음은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을 내려가야 한다.
다시 내려올 산을 무엇하러 올라가는가.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영국의 조지 맬러리가 그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어떻게 답할까.
20여년 전
스무살이되기 전부터 30년 넘게 올라다니던
산길을 버려두고
마라톤에 빠져 있을 때
어느 마라톤 잡지에 허접한 글을 연재하고 있을 때
편집장이 물었다.
'왜 달리는가?'
'내 안에 있는 나와 만나야 하니까'
처음에는 무엇인가 멋있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답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달리면 달릴수록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족저근막염을 심하게 앓고 난 후
런닝화를 벗고
등산화를 신었다.
그리고
똑같은 대답을 한다.
'내 안에 있는 나와 만나야 하니까'
산에 오르는 이유는
달리는 이유와 같다.
요즈음
마라톤이 그리워지고 있다.
바람이 날 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온 운지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의자 뒤로 운지사로 내려가는 길이 열려 있다.
와룡형님은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
불피워 물을 끓여야 하지만
산에 들어올 때 화기를 들고 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성능 좋은 보온병에 담긴 온수로
향내 꽤나 풍기면서
커피를 내려 놓는다.
실컷 눈을 즐겼으니
내려갈 때는 임도를 따르기로 한다.
올라올 때 눈길을 밟아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온 것을 반성하며
돌아가는 길
임도를 걷는다.
제법 가파르게 내려가는 길을 따라
운지사 앞으로 내려간다.
날씨가 푹해서
눈이 많이 녹았다.
임도가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러 보니
이곳이 바래봉 둘레길이다.
몇 년 전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보았던
바래봉 둘레길을 여기에서 만났다.
둘레길 안내판
내려오다가 옛날 종축장을 파노라마로 찍어 보았다.
예전에 바래봉을 올라올 때는 이곳 종축장을 가로질러 올라왔었고
이 부근의 철쭉이 참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다.
다시 돌아온 운지사 삼거리
조계종 17교구인 운지사 스님들이
나날이 좋은 날을 살아가라는 기원을 하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불도에 정진하셔서
성불(成佛)하시기를 바란다.
허브밸리 주차장 끝에 있는 화장실
정말 깨끗하고 좋다.
우리나라 화장실을 정말 세계 수준이다.
유럽의 어느 나라를 가봐도
우리나라 화장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야 할 일이다.
저기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애마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오늘 바래봉을 내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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