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동유럽 여행기

14. 폴란드 1 - 오시비엥침(Osweicim) 아우슈비츠 수용소

힘날세상 2018. 8. 24. 11:12

14. 폴란드 1 - 오시비엥침(Osweicim)  아우슈비츠 수용소

2018. 07. 26 목요일



프라하 외곽에 있는

TOP HOTEL에서 숙박을 하고

6시간을 달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간다.



유대인 학살.

쉰들러리스트.

홀로코스트

이런 말들이 막 떠오른다.

무엇인가

가슴이 떨려 오고

마음이 어수선할 즈음

버스는 어느 한적한 마을의 음식점 앞에 멈춘다.








정말 맛있고 아름다운 점심 식사였다.

동유럽 여행 중

최고의 분위기와

편안함을 주었던

시골마을의 작은 식당.

현지 가이드에 의하면

이 동네에서 유명한 식당으로

지역 주민들이 애용하는 곳이며

가족 행사 등을 많이 하는 곳이라고 한다.











식사를 하고

주변 마을을 둘러 본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정문 위에 써 있는 "ARBEIT MACHT FREI"의 의미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노동은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노동은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1940년 4월 27일 하인리히 히틀러가 첫번째 수용소 건립을 명령했으며, 같은 해 6월 14일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송되어왔다. 이 작은 '아우슈비츠 1호'에는 주로 폴란드와 독일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1941년 10월 인근의 브제진카(독일어로는 '비르케나우') 마을 외곽에 비르케나우라고도 불렸던 '아우슈비츠 2호'를 증축했다. 그뒤 나치 친위대(SS)가 아우슈비츠 2호를, 가스로 죄수들을 처형하는 데 사용한 바데안슈탈트('목욕탕'),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를 보관하는 데 사용한 라이헨켈러('시체보관실'), 아인에셔룽스외펜('화장막') 등을 갖춘 대규모 집단 처형소로 개발했다. 이는 모두 유럽 유대인들의 멸종을 위한 '최후의 해결책'이었다.

  1942년 5월에 세워졌고 후에 '아우슈비츠 3호'라고 명명된 드보리 마을 부근의 또다른 수용소는 부근 IG 파르벤의 대규모 화학합성고무농장에 노동자들을 공급해주는 강제노동수용소가 되었다. 1940~45년에 모든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의 명령권자는 친위대 대장 루돌프 프란츠 회스였다.

  유대인들은 화물차에 실려오는 대로 '선별'되어 젊고 능력 있는 남자와 여자들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지고, 노약자 및 어린이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은 살해되었다. 강제노동자들 가운데 과로·질병·굶주림 등으로 허약해진 사람들을 주기적으로 선별하여 제거했다. 수용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의학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의학실험의 예로는 값싸고 신속하게 불임을 시키거나 살해하는 방법, 아리안족의 수를 늘리는 방법을 찾기 위한 쌍둥이들의 시체검시 등이 있었다. 악명 높은 의사 요제프 멩겔레가 쌍둥이 부검실험을 지휘했으며 선별작업을 감독했다.

  소련군이 진격해오자 아우슈비츠는 차츰 폐기되어 갔고 생존한 대부분의 포로들은 1945년 1월 17일 다하우·마우트하우젠을 비롯한 다른 독일 집단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남겨진 7,650명의 포로들은 10일 뒤 이곳에 도착한 소련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여러 이유 때문에 아우슈비츠에서의 총사망자수는 보통 100만~250만 명이라고 할 정도로 그 추산 폭이 크지만 400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 이도 있다. <출처 DAUM 백과>





수용소 출입구.

들어갈 때 A4 크기의 가방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며

입구에서 가방을 열어보고 확인한다.




출입구를 통과하여 들어오면 저멀리 수용소 정문이 보인다.



위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이렇게 평화롭게 보이지만.....




수용소 정문




우리는 많은 수용소 건물 중에서

5, 6, 7 동을 중심으로 보기로 한다.


실제로 수용되어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실제의 모양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Osweicim 중앙역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

기차역에서 하차하여 이곳으로 끌려 왔다고 한다. 당시 기차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당시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것도 전시되어 있다.





유대인 학살에 사용되었다는 독극물.

이 통 하나면 250명을 살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의 유품.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반나치세력들, 그중에서도 여론을 이끌어갈 갈 수 있는 상위 집단 사람들을 처벌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많이 죽은 이유는 경제력이 풍부한 유대인들이 전앶자금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반나치세력으로 간주하여 처벌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수용소로 들어간다는 것을 전혀 알 지 못하고

새로운 곳에서 생활을 꿈꾸며 왔다고 한다.

이들의 유품을 잘 들여다보면

살림에 필요한 그릇이나 용품들,

깨끗한 옷등을 볼 수 있고,

멋진 신발들이다.

죽으러 끌려오는 사람들이 가져올 물건들은 아니다.

무엇인가 희망에 부푼 마음으로 이곳으로 왔을텐데

오자마자

노동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로 구분되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고

아니면

참혹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수용소는 갇혀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지키는 독일군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전기 철책으로 막아 나누어 놓았다.

우리는 자유롭게 오가고 했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살벌하였을까.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가스실앞이다.

가스실 내부는...

올리고 싶지 않다.

지금도 남아 있는 오시비엥침 중앙역



형언할 수 없는 마음으로 수용소를 나와

한 시간 정도 버스를 달려

크라카우라는 도시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