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참가기

2001 춘천마라톤대회 참가기

힘날세상 2009. 7. 28. 10:01

또 다른 走路를 꿈꾸며

작성일 2001-12-03 오후 8:12:14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맑은 하늘을 가리우고 추적추적 내리는, 낭만도 별로 없는 가을비가 그렇게 슬픈 얼굴로 가슴 속으로 내려 박히고 있었다.

삼악산 자락을 돌아 내리던 단풍의 노래도 뒤흔들어 버리고, 의암호 잔잔한 물결도 짓이겨 구겨버리며 비는 곧게 뻗은 도로 위로 속절없이 내리고 있었다.

길가에 늘어서서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내 자식인 양 안쓰러운 얼굴로 등을 토닥여 주는 춘천 시민들의 곱디 고운 손길까지도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 뜯으며 그렇게 비는 내리고 있었다.

3 시간 50분!

예정대로라면 감동이 넘쳐나는 얼굴로 의식의 심층부에서 솟아나는 희열을 느끼며 춘천 종합운동장의 트랙을 돌고 있어야 했다. 트랙을 따라 늘어선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숲 사이로, 그들이 보내는 축하와 환호를 보듬고 지나온 백 리 길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반추(反芻)하며 마라톤만이 가져다 주는 황홀감의 절정에 서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의 가슴속을 파고 들어오는 것은 오직 무거운 빗줄기만이 내려 박히고 있었다. 참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새벽 안개를 걷으며 춘천으로 들어섰다. 그저 묵묵히 우리들을 안아주는 춘천의 하늘과 도심을 바라보며 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새벽에 남이섬을 바라보며 가볍게 달려 보는데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시계줄에 매단 시간 계획표를 보며 나는 어느덧 새로운 기록을 떠올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클럽회원들과 기념 촬영을 한 후 운동장에 들어갔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대회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트랙을 따라 달리고 있는 많은 분들, 어린 아들과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다정한 부부의 모습, 스탠드에 앉아 무엇인가 애기를 주고 받고 있는 분들, 혼자서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분, 출발 시각을 조금 앞 둔 경기장은 수만의 인파가 뿜어내는 마라톤 열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이 달아 올랐다.

출발선에 섰다. 참가자가 많아서 자신의 예상 기록에 따라 배번을 부여한 까닭에 비슷한 실력을 가진 주자들끼리 모이게 되었다. 나는 4시간 페이스메이커 대열에 합류하였다. 처음으로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페이스메이커에게 무수한 질문을 퍼붓는다. 여유있게 마라톤에 대한 즉석 강의를 하고 있는 페이스메이커를 보면서 나는 내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 춘천댐까지만 같이 달리고 그 다음부터는 내 계획대로 달리는 거야. 그래서 기록을 갱신하는 거야.' 솟구치는 자신감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출발부터 나는 이미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에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먹구름이 나도 모르게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2년 전 처음으로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장을 던지고 나섰던 춘천마라톤. 그때의 겸허한 마음을 나는 철저하게 짓뭉게 버린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출발한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빨라지고 있었다. 5km를 지나면서부터 자만심은 극에 달했다. '춘천댐까지만 페이스메이커를 끌고 가는 거야.' 나는 페이스메이커를 앞질러 나가기 시작했다.의암댐을 건너며 그들과는 100여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삼악산 자락을 따라 내린 단풍을 바라보며 같이 달리는 마라니 이용현님과 전형근님과 감탄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울려 퍼지는 젊음의 함성! 커다란 물결이 되어 뒤에서 앞으로, 앞에서 뒤로 퍼져나가는 환희의 함성이 의암호반을 뒤흔든다. 주자들의 발걸음이 모두다 가볍다. 자연히 나의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있었다. 10km 지점을 지나며 몸을 점검해 본다. 제일 걱정이 되었던 뒤꿈치는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나 달릴만했다. 발목, 무릎, 종아리 모두 괜찮았다. 그러나 허벅지에서 약간의 묵직한 둔통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마냥 즐거웠다.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고, 주변에 늘어선 춘천시민들의 환호가 좋았고, 급수대에서 자원봉사하는 분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다가왔다. 주자들의 발걸음 소리도 가볍고 그들의 환호성도 젊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시계를 봤다. 계획한 것보다 훨씬 빠르다. 페이스메이커와 그를 따르는 군단의 소리가 가물가물하다. 틀림없는 오버페이스이다. 춘천에 오면서 3시간 50분의 기록을 목표로 세웠는데 그 속도보다 더 빠른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하프 지점을 통과하면서 시간을 보니 1시간 58분이다.이런 속도라면 목표했던 시간 안에 결승선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한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은근한 두려움이 일어난다. 이 순간 내가 취할 태도가 무엇인가? 너머지 레이스를 흐트러지지 않고 펼칠 수가 있을까? 그러나 머릿속을 온통 짓누르고 있는 것은 기록을 단축해 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25km 지점에서 급수를 하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허벅지에서 칼로 긋는 듯한 재빠른 통증이 느껴졌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통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달렸다. 더 빨리. 그러나 서상교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내 뒤를 따라오던 페이스 메이커와 그의 군단들이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목표시간이 3시간 55분이고 보면 어떻게든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허벅지의 통증이 다시 나타나면서 달릴 수가 없었다. 춘천댐을 올라서는데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더구나 발바닥에 붙인 키네시오 테이프 때문에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쓰리기 시작한다. 같이 가던 형근이 형을 먼저 보내고 신발을 벗고 테이프를 제거해 버렸다.

같이 달리던 백악관 형근이 형도 먼저 가버렸고, 마라니 이용현님도 쥐가 내려서 쳐지고 철저히 혼자서 달렸다. 102 보충대 앞을 지나면서 훈련병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하면서 여유를 부려봤지만 그것은 나의 아픔을 감추어 보려는 고식지계에 지나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8차선 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상처투성이 뿐인 올해의 마라톤을 돌아다 봤다.

부상으로 제대로 연습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전한 전군마라톤대회에서 4시간 10분의 기록으로 달린 후 이어지는 부상으로 올해의 마라톤은 정말 잿빛이었다. 발바닥의 통증으로 여름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9월의 변산하프대회는 최악의 대회가 되고 말았고(1시간 59분), 더 심해진 발바닥의 통증은 더 이상 달리는 것이 괴로울 정도였다. 거의 쉬다시피 하다가 춘천대회의 주로에 들어서고 만 것이다.

단풍이 고와서, 호반을 불어 오는 바람줄기의 끝이 상쾌해서 최고라는 춘천마라톤대회. 올해도 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몰려 들었다. 연습을 안하고 쉰 탓에 몸 컨디션이 좋아 3시간 50분으로 목표시간을 잡은 것이 오늘 우울한 마라톤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입으로는 항상 무리수를 두지 말자, 욕심을 부리지 말자고 함녀서도 막상 주로에 들어서면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양교를 건널 즈음에는 허벅지의 통증이 밀려 들었다. 그럴 때마다 여름 동안 먹었던 아카시아 꿀이 생각났다. 모두다 식이요법을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직한 연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땀방울을 흘리며 한걸음 한걸음 달리는 것이 최고의 준비인 것이다. 그런데도 식이요법을 했다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인 양 생각한 나 자신이 정말 미웠다.

40km 지점을 통과하면서부터 밀려드는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시내를 달리기 때문에 시민들의 눈길을 의식해서 걸을 수도 없었다. 무조건 참고 달리는 것이다. 속으로 다짐해 봤다. 그 동안 내가 달린 거리가 얼마인가? 그런데도 2km를 못달려서 주저 앉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힘이 나는 듯 했다.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이제 직4문을 통과하여 트랙을 한 바퀴만 돌면 오늘의 레이스는 끝이 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기록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처음에 4시간을 목표로 뛰었으면 충분히 4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한 계획은 초반의 오버페이스를 불러왔고 오늘의 경기를 완전히 흐트러 버린 것이다.트랙을 따라 돌며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그들의 함성을 온몸으로 받으며 생각한 것은 오직 하나 마라톤이라는 것은 언제나 외로운 경기이고, 바로 그 외로움이 마라톤의 참 맛이라는 것이었다. 4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과 같이 달리면서도 철저하게 혼자인 경기. 그래서 마라톤은 살아있는 것이다.

결승선은 온통 빗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무겁고도 잔뜩 찌푸린 모습으로 서 있는 결승선의 아치를 바라보며 조선일보가 마련한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잔칫상이 비에 젖어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리와 욕심이 빚어낸 벌칙인 것이었다. 남들에게는 즐겁고도 풍성한 대회가 준비를 하지 못하고 과욕에 빠져버린 나에게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누가 어떻게 말하든 마라톤은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경기이다. 그 징하도록 가슴 찡한 외로움을 철저히 즐기기 위해 다음 경기부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달릴 생각이다. 누구로부터도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서 만들어가는 4시간을 위하여 나는 또 다시 주로에 설 것이다.

 

 

 

아름다운 춘천 대회를 통한의 대회로 만들어 버린 중압감에 가슴 아픈 힘날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