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참가기

2000년 동아마라톤 참가기

힘날세상 2009. 7. 28. 09:59

서울에서 핀 하얀 목련

 

                                                                                                ** 2000년 동아마라톤대회 참가수기 공모 당선작

 

 

광화문!

시인 서정주가 "종교(宗敎)"이고, "푸른 광명"이라고 노래하지 않았어도 우리 민족의 애환과 역사를 지켜 봐온 우리 민족의 정신이요, 우리의 소중한 유물인 광화문! 민족의 심장부인 광화문에서 시작하는 동아마라톤의 출발점에 노란 비닐을 뒤집어 쓰고 천 송이, 만 송이, 백만 송이 꽃으로 피어난 주자들은 어렵고 힘들었던 지난날의 모든 아픔과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흘려야 했던 그 많고 많았던 눈물도 지우고, 고향이 다르다고 이웃사람들을 흘겨 봤던 기울어진 마음도 바로 세우고,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슬며시 짓밟았던 공중도덕을 다시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낮은 기온과 거센 바람 속에서도 이제 잠실까지 42.195km 내내 화합과 사랑의 꽃길을 이루어 내리라.

 

2000년 3월 19일 오전 10시! 제 71회 동아마라톤의 출발을 알리는 포성이 울렸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도 남을 쾌거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젖으면서 나는 그 많은 인파를 따라 서울의 거리를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서울!

서울을 달리고 싶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오른 빌딩의 숲을 달리면서 배고파 허덕이던 어린 시절의 눈물을 지우고 싶었다. 도로 양편으로 끝없이 늘어선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서울에서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하고 너무나도 빨리 하늘나라로 가신 부모님들의 얼굴을 그려보고 싶었고, 서울로 이사가고 난 후 30년 넘게 소식이 단절된 "윤중원"이라는 친구의 족적이라도 밟아 보고 싶었다. 바로 이 서울, 우리의 서울을 달리면서 말이다.

한 해가 바뀔 때마다 온 누리를 감돌아 흐르던 보신각의 푸른 종소리를 떠올리며 종로를 지난다. 발걸음이 가볍다. 옆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밝고 편안한 얼굴이다. 흥인지문(興人之門)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조금은 추레하게 서있는 동대문을 지나 군자교를 건너 10Km지점을 통과하며 시간을 보니 56분 정도이다. 페이스가 흐트러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발에 힘을 준다. 오른쪽으로 돌아 잠실대교를 건넌다. 한강의 바람줄기가 몸을 감아 온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도도히 흐르는 한강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였다. 우리 민족의젖줄이요, 생명선이었던 한강! 바로 이 한강의 힘찬 노래는 우리의 잠재의식을 깨워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루어 냈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는 새 천년을 위한 도약의 발걸음을 내딛지 않았던가!

15km를 지나 오른쪽으로 풍납토성을 바라볼 때쯤 왼쪽 무릎에 이상 신호가 온다. 끝내 무릎이 말썽을 일으키는구나. 백제인들의 힘을 모아 세웠던 풍납토성, 한강 유역이야말로 우리 한반도 역사의 한 중심이었기에 더욱 힘차게 달려야 할텐데 무릎의 통증은 20km를 넘어서자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졌다. 더 이상 달린다는 것은 부상을 초래할 것이 뻔했다. 눈물이 났다. 3월 5일 서울 마라톤에서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달리고 싶어서 참가한 것이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주로에서 벗어나 주유소 화장실에 들어가 아픈 무릎을 만지면서 끝없이 추락해져 가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시간 39분이 지나고 있다. 하프만 뛰었으면 광양대회 기록을 10분 이상 단축한 것이라고 자위도 해본다. 앞으로 달려야 할 날이 더 많지 않은가? 아쉽지만 여기서 레이스를 거두자. 그때 문득 수능 시험을 앞두고 있는 우리반 학생들의 얼굴이 다가온다. "선생님! 힘내세요. 저희는 선생님을 믿어요." 그래 달리자. 달려야 한다.여기서 주저 앉고 말면 어떻게 아이들 앞에 설 것인가?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전주신흥고등학교 3학년 9반! 우리 11월 15일의 그날까지 멈추지 않고 달리는 거다. 절대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는 거다."

 

다시 주로로 들어서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25km 지점을 지나며 초코파이를 한 개 먹고 나니 힘이 나는 듯하다. 길은 들판을 가로지른다. 왼쪽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 남한산성이리라. 인조 임금의 쓰라렸던 심사를 돌아보며 의지를 돋구어 본다. 그러나 벌판을 내달려오는 바람은 뼈 속까지 찔러 온다. 살갗을 파고드는 칼바람에 맞서 달리는데 왠 군인들이 함성을 보낸다. 얼룩무늬 군복을 보니 갑자기 20년 전 단독군장에 소양댐을 뛰어오르던 일이 생각난다. 이마에 붙은 하사 계급장 때문에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달리던 무장구보! 그러나 지금은 맨 몸이 아니냐. 달리자 더 힘차게 달리자.

 

30km를 지나 약간의 오르막을 만났다. "흘린 땀과 기록은 비례한다"며 전주마라톤클럽 회원들과 한달음에 넘어 다니던 3km 가 넘는 거리에 표고차 150m에 이르는 금산사 고갯길이 생각난다. 작년 5월 처음으로 달리기를 시작하였을 때 초등학교 운동장 다섯 바퀴를 돌고 나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던 일이 떠올라 실소를 지어본다. 파랗게 펼쳐진 구이 들판의 농로를 따라 숱한 땀을 흘리며 마라톤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고, 9월 5일 처음으로 출전한 변산 하프대회는 1시간 56분 내내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빗물이 뒤범벅이 된 경기였다. 짜릿한 바닷내음으로 밀려오는 빗줄기를 손바닥으로 훔치며 달리던 고독의 레이스 후반에 즐거운 표정과 여유있는 자세로 나를 추월해가는 50대의 한 분(현 전주마라톤클럽 최병준 회장)을 따라 뛰면서 몇 마디 건넨 것이 인연이 되어 한마음으로 맺어진 전주마라톤클럽회원들과 같이한 새벽 훈련, 그리고 10월 16명의 회원 전원이 풀코스에 도전장을 낸 춘천 마라톤 대회에서 3시간 57분의 기록으로 첫 완주를 하고 난 후 흘렸던 눈물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힘이 솟았다. 인도에서 손을 흔들어 다독여 주던 시민들과, 어린 고사리 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달려 3시간 20분에 35km를 지났다. 무릎은 이제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았다. 남은 거리는 이제 7.195km. 4시간을 넘기지 않아야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다리에 힘을 주었다. 스피드를 내보았다. 괜찮았다. 됐다. 이제 평소에 다짐하던 대로 마지막을 즐겁게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마라톤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0개월! 그 10 개월은 45년의 내 인생 중에서 아주 값어치 있는 시간들이었다. 달리면서 깨우쳤던 주옥같은 사실들-- "마라톤은 절대로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마라톤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누구나 마음먹은 만큼은 달릴 수 있는 경기이다." "마라톤은 마지막을 즐겁게 달릴 수 있어야 한다."등등 --을 떠올리며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즐거웠다. 위장병도 디스크 수술의 후유증도 물리친 마라톤의 희열이 거대한 강물이 되어 가슴을 타고 흐른다. 기록이 문제가 아니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기쁨에 젖어 잠실 어디라고만 생각되어지는 4차선 도로의 한가운데를 힘차게 정말 힘차게 달렸다.

 

눈앞에 잠실 주경기장이 보인다. 이제 저 문으로 들어가 트랙을 한 바퀴 돌면 결승점이다. 결승점을 먼저 밟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또 나중에 달려들어 올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길을 막았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몇몇 사람들은 지금쯤 마음의 평정을 가라앉혔을까? 길가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북을 두드리며 힘을 돋아주던 그 많은 사람들은 또 누구를 향해 자신들의 힘을 나누어 주고 있을까? 광화문에서 잠실까지 달린 이번 동아마라톤을 통해 직접 달린 사람들과, 인도에서든 TV 앞에서든 마라톤을 지켜 본 많은 국민들이 한 곳으로 마음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나라의 미래를 밝혀줄 견인차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승점이 몇 걸음 남았다. 뿌옇게 젖어 있는 하늘에 하얀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하얀 목련과 같은 가정을 이루자고 언제나 다짐하고 다짐하건만 늘상 그 언저리만 맴돌 뿐이다. 아내와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거실에 걸려 있는 "마음을 열고 바르게 살자"는 우리의 다짐을 되새겨 보며 아내와 아이들과 같이 손잡고 풀코스를 달리는 그 날의 감동에 미리 젖어 보면서 하얀 목련꽃 속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시는 하나님의 포근한 품으로 파고 들었다.

 

4시간 37초! 오늘도 나는 인생의 한 획을 짙게 그었다

 

전주마라톤클럽 정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