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21 동해의 힘찬 물결에 문무대왕의 마음을 얹고

힘날세상 2009. 7. 30. 11:15

마라톤 기행21

 

동해의 힘찬 물결에 문무대왕의 마음을 얹고

 

Y형!

동해의 푸른 물결에 마음을 얹어 보았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환희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지금 이 순간 세월의 흐름도 멎어 버렸고, 지난 겨울을 지나면서 내내 가슴 속에 터를 내리고 있던 필설(筆舌)로는 다하지 못할 강박관념과 가슴저림도 포구를 빠져 나가는 바닷바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흐르는 땀방울 안쪽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즐거움만이 슬몃슬몃 밀려드는 봄기운을 따라 온몸으로 퍼지고 있을 뿐입니다.

 

Y형!

천 년의 세월을 따라 은은하게 이어지고 있는 신라의 정신문화에 젖어 경주에 들어선 것은 아침해가 제법 고도를 높이고 난 후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을 때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은 것은 반월성과 그 옆에 다소곳이 자리잡은 국립 경주박물관이었습니다. 박물관부터 찾는 것이 경주 관광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일단 불국사를 먼저 가보기로 하여 자동차의 핸들을 우로 꺾었습니다. 불국사에 다 와 갈 무렵 우리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손으로 만드는 자장면집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어서 오이소마. 이리 앉으이소.”

친절하게 대해주는 아주머니의 환대에 우리들은 기분이 한층 좋아졌습니다.

“아주머니, 맛있게 만들어 주씨요이잉.”

“말씨를 들어보이 전라도에서 왔는갑네예.”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서로 반가워했습니다. 여행의 맛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Y형!

불국사(佛國寺)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날갯짓을 하고 있는 범영루의 처마자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습니다. 비스듬히 스며드는 투명한 햇살 아래서 일렁이는 신라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자하문을 오르는 청운교와 백운교에 손을 얹어 봅니다. 청운교 18계단을 오르면 다시 백운교 16계단이 이어지는데 어찌나 힘이 솟구치고 있는지 마치 길다란 용이 힘차게 승천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청운교 밑에 무지개처럼 둥글게 만들어진 홍예문은 그 옛날 맑고 아름다운 연못을 잃어버린 채 자못 쓸쓸한 모습으로 보여 왠지 허전한 느낌을 흘리고 있습니다. 연못의 수면에 내리비쳤을 자하문의 물그림자를 조용히 떠올려 보았습니다. 부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부처의 몸에서 피어나는 자줏빛 금색이 안개처럼 서리어 있다는 뜻으로 불국사를 들어서는 이 문을 자하문(紫霞門)이라고 이름지은 모양입니다. 아쉽게도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교와 백운교는 통행을 막아 놓아 디뎌볼 수가 없었습니다. 좌경루 옆으로 돌아서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이 좀 좁게 느껴지는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지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불국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불국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멋적기는 하지만, 불국사가 경내에서 유달리 눈길을 끌고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에 대해서는 눈길이 닿는 곳에서 느껴지는 이야기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국보 제20호와 21호로 지정되어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어린 아이까지도 알고 있는 유명한 석탑입니다. 사면에 놓여 있는 계단을 오르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사각모양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추녀가 있으며, 그 위에 팔면(八面)에 연꽃 모양의 창문을 드리우고 있는 팔각정까지 모두 3층으로 보이는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탑입니다. 마치 곱디 고운 소녀가 곱게 차려 입은 치마자락을 펼치고 수줍은 듯이 서 있는 모습인데, 석가여래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땅 속에서 솟아나 석가여래의 설법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 다보여래를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라는 이야기는 한동안은 마음 속에 간직해 두어야할 것 같습니다.

 

아주 단순한 사각 모양으로 3층으로 쌓아 올린 석가탑은 신라 3층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겉모습으로 보면 밋밋하고 좀 싱거운 느낌입니다. 그러나 석가탑은 아주 소중한 보물을 품에 안은 채 천 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었습니다. 1966년 보수공사를 하다가 석탑 안에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사달․아사녀의 눈물어린 사랑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석가탑은 그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고 해서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탑은 인간의 소중한 꿈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양이 화려한 다보탑의 모양이든 단순한 석가탑의 모양이든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기에 우리는 자신들의 소망을 은근히 드러내어 놓고 탑돌이를 하는 것인가 봅니다.

 

Y형!

석굴암으로 오르는 고갯길을 따라 혼자서 달립니다. 불국사를 구경하다가 문득 한 녀석이 옆구리를 찔러왔습니다.

“여기서 동해까지 달려갈 수 있겠냐? 불가능하겠지?”

동해를 따라 새벽녘을 달려 볼 요량으로 신발이며 복장을 갖추고 왔었고, 석굴암 고갯길을 달려보는 것도 잔잔한 재미가 있을 듯하여, 경주 박물관과 유적지를 돌아보는 일행들과 헤어져 동해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굽이굽이를 돌아 오르면서 마음 속에 담아 보는 것은 다가올 봄의 노래입니다. 길가를 따라 피어날 온갖 화초(花草)들의 여린 새싹을 떠올려보다가 가슴을 치밀어 올라오는 그리움을 하나 만납니다. 아사녀의 애절한 그리움 말입니다. 석가탑을 쌓기 위해 집을 떠난 사랑하는 남편 아사달을 생각하며 백제 땅에서 가시밭길을 걸어 찾아왔다가 ‘영지(影池)’ 푸른 물결에 몸을 던지고 말았던 아사녀의 심사(心思)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아직 우리의 가슴 안에 그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수면(水面)에 떠오를 석가탑의 그림자를 기다리다 지쳐 야릇한 미소로만 남아버린 아내의 모습을 주변의 바위에 눈물로 새기고 사라졌다는 아사달의 아픔은 아직도 영지(影池)의 물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신동엽 시인이 그를 향해 남긴 시 구절을 가만히 읊조려 봅니다.

 

너를 조각하련다. 너를 새기련다. /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 이 하늘 끝나는 날까지

이 하늘 다하는 끝 끝까지 / 찾아다니며 너를 새기련다. / 바위면 바위에 돌이면 돌몸에

미소 짓고 살다 돌아간 네 입술 / 눈물 짓고 살다 돌아간 네 모습 / 너를 새기련다.

신동엽, <너를 새기련다.>에서

Y형!

석굴암의 부처님은 동해(東海)를 향해 무언(無言)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보존(保存)을 이유로 입구를 유리벽으로 막아 버린 세속(世俗)의 어리석음을 탓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본존불의 사려 깊은 마음은 어떻게 해도 헤아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유리벽으로도 모자라 목조 건물까지 세워 본존불의 눈을 가려버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막아버린 무지몽매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석굴암의 내부를 봉견(奉見)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본존불 주위에 다소곳이 시립(侍立)하고 있는 제석천과 범천, 문수와 보현보살, 십일면 관음보살, 그리고 10대 제자들은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들은 안내 책자에 실린 사진으로나 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석굴암 석실에 가득한 부처님의 자비나, 세상을 향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가르침을 지울 수는 없는 것이지만, 석실에 앉아 동해의 푸른 물결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본존불을 모시면서 신라인들이 마음 속에 품었던 간절한 바람이 어딘지 모르게 막혀 버린 듯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본존불의 눈길이 닿는 곳은 문무왕의 수중릉이라고 하는 대왕암이라고 합니다. 정확히는 동짓날 해가 뜨는 동남 30° 방향이라고 합니다. 떠오르는 햇살이 본존불의 미소에 머물게 될 때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꿈꾸어 왔던 불국토(佛國土)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것이 통일신라의 뛰어난 문화와 과학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한 감회가 밀려옵니다.

 

Y형!

천 년을 이어오고 있는 불심(佛心)을 가슴에 안고 동해로 향한 발길을 내딛습니다. 길은 이제 제법 급한 경사를 이루며 동해로 달려듭니다. 오르막을 힘차게 올라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 속(俗)한 마음을 정화(淨化)하고 난 터라 발걸음이 참으로 가볍습니다. 내리막길은 깊은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며 참으로 길게 이어집니다. 양옆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따라오는 산줄기에 싸여 혼자서 달리는 길은 참으로 호젓합니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과 함께 멀리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버린 친구가 생각이 납니다. 스케치 여행을 갔다가 뉴질랜드의 풍광(風光)에 젖어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린 그는 화가입니다.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캔버스를 펼쳐보았으나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붓을 붙들어 매어버린 것을 그 친구는 ‘자유(自由)’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바로 그 ‘자유(自由)’에 마음을 얹고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달리기는 나에게 ‘자유(自由)’였습니다. 달리면서 나는 자유를 느낍니다. 경주의 유적에 발길이 매어버린 친구들과 잠시 떨어져 나는 퍽이나 자유로운 시간을 엮어가고 있은 것입니다.

문득 마라톤 기행을 시작했을 무렵 문경새재를 달리면서 맛보았던 ‘새벽 숲길의 고요’가 온 몸을 감싸옵니다. 감포로 향하는 한적한 시골길이 만들어 내는 고요 속에서 런너스 하이(Runner‘s high)에 빠져 든 나를 흔들어 버린 것은 햇살 가득한 담벼락에 앉아 있던 두 분의 할머니였습니다.

“어쩌자고 그리 뛰어 댕기노?”

나는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그 분들에게서 풍겨나오는 이미지는 어렸을 적 나를 퍽 예뻐하셨던 할머니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나는 뛰어 다니기를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집을 나서면 목적지까지 늘 뛰어 다녔는데 그러다가 넘어지기가 일쑤였고, 덕분에 무릎이나 팔꿈치에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늘 그것이 안타까워서 뛰어 다니지 말 것을 종용하셨던 것이지요.

“두 분이 앉아 계신 모습이 참으로 좋아 보이네요.”

“첨보는 사람인데 어디서 온기고?”

“아, 예 전주에서 왔는데요.”

“전주? 전주가 어디노?”

할머니들은 80이 넘으셨는데 두 분이서 어렸을 적부터 친구랍니다. 건강을 위해 일광욕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한다는 내 말에 할머니들은 쉽게 수긍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찻길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뒤로 하고 달리는데 바로 옆에서 따라오던 산자락이 갑자기 저만큼 물러나면서 손바닥만한 넓이의 논이 이어집니다. 논 가운데로는 대종천(大鐘川)이 한가롭게 기어가고 있습니다. 눈앞이 갑자기 훤해지면서 동해의 푸른 물이 와락 달려드는 곳에 두 개의 3층 석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정하게 서 있습니다.

감은사(感恩寺) 라는 절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은 대종천, 대왕암(大王岩)과 함께 문무왕의 호국(護國) 의지를 담고 있는 역사적인 곳이기도 합니다. 문무왕은 신라왕조가 무한히 번창하기를 바랐던 모양입니다. 신라의 사직(社稷)을 영원히 이어갈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했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를 하는 마음으로 감은사를 세우게 됩니다.

감은사에서 만난 문화 해설사 박덕순님의 설명에 의하면 감은사는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그대로 이어 받은 절이라고 합니다.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는 아버지가 대종천(大鐘川)을 거슬러 금당에까지 찾아 올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금당터를 발굴하고 보니 계단 아래에 동쪽으로 향한 구멍이 있었으며, 금당의 주춧돌이 지상으로 상당 부분 올라와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감은사 중문터에는 연못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감은사 앞을 지나 대왕암으로 흘러드는 대종천이 당시에는 감은사와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을 찾아 신라를 지키겠다는 호국의 불심(佛心)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게 하였습니다.

Y형!

감은사터에 앉아서 바라보는 감은사 3층 석탑은 참으로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많은 탑을 보아 왔지만 절을 잃어버리고도 동탑과 서탑이 우뚝한 모습으로 그 터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문무대왕의 호국의지가 아직도 살아 있는 듯합니다. 기운이 넘치는 듯이 장중하면서도 정교한 석공의 솜씨가 그대로 묻어나는 듯한 감은사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세세토록 이어가고 있습니다. 문무왕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천 년의 세월을 부등켜 안고 서 있는 동탑이나, 수레모양의 청동 사리함(보물 제366호)을 고이 품어 부처의 자비와 가르침을 속세로 전파하고 있는 서탑의 모습은 가슴 깊이 새겨둘만 합니다.

토함산의 정기(精氣)를 머금고 흘러온 물줄기가 함월산 기림사 골짝에서 발원한 시냇물과 몸을 섞어 양북면 일대의 넓은 들녘을 적시며 감은사 물그림자를 그리며 대왕암을 감싸 안고 흘러드는 대종천을 따라 동해로 달립니다.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까지 이끌어 주었던 대종천은 말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종천은 문무왕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몽고군들이 침입하여 황룡사 9층탑을 불살라 버리고 무려 100톤이 넘는 황룡사 큰 종(鐘)을 가져가기 위해 대종천을 이용해 운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면서 대왕암 앞 바다에 침몰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화신이 조화를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7번 국도를 따라 달리기를 시작하려는데 이견대(利見臺)가 발길을 붙잡습니다. 사적 제 15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견대는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 세상의 파란을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을 얻었다는 곳입니다. 또한 화려한 무덤보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동해의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그 모습을 보였다는 곳입니다. 이견대에서 내려다 보는 대왕암은 하나의 작은 점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문무대왕의 신라를 향한 마음만은 아직도 동해의 푸른 물결 속에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합니다.

이견대 옆에 우현 고유섭(1905 -1944) 선생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우리 미술을 학문적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는 미술사학자의 기념비 옆에 서서 대왕암을 내려다보는데 그가 지은 대왕암이라는 시 한 구절이 슬며시 떠오릅니다.

 

대왕의 우국성령은 / 소신(燒身) 후 용왕 되사 / 저 바위 길목에 / 숨어들어 계셨다가 / 해천(海天)을 덮고 나는 / 적귀(敵鬼)를 조복(調伏)하시고 // 우국지정이 중코 또 깊으시매 / 불당에도 들으시다 / 고대(高臺)에도 오르시다 / 후손은 사모하여 / 용당(龍堂)이요 이견대(利見臺)라더라 // 영령이 환현(幻現)하샤 / 주이야일(晝二夜一) 간죽세(竿竹勢)로 / 부왕부래(浮往浮來) 전해주신 / 만파식적(萬波息笛) 어이하고 / 지금은 감은고탑(感恩孤搭)만이 / 남의 애를 끊나니 // 대종천(大鐘川) 복종해(覆鐘海)를 / 오작아 뉘지마라 / 창천이 무섭거늘 / 네 울어 속절 없다 / 아무리 미물이라도 / 뜻 있어 운다 하더라

- 고유섭, <대왕암(大王岩)>

 

Y형!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동해 바다의 넉살좋은 웃음과 장난기 섞인 바닷바람의 막춤과 함께 해안 도로를 달리는 것도 가슴 속 어느 한 곳에 담아 둘만하였습니다.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간 역사를 달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는 걸음마다 밟혀오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쌓아 놓은 삶의 애환은 그대로 우리들이 살아온 역사이고, 우리들의 가슴을 타고 흐르는 살아있는 숨결이었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길을 따라서 떠나고 길을 따라서 다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지금 7번 국도를 따라 달리고 있는 나의 마라톤 기행도 어디론가 떠나가려는 나의 마음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달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길을 따라 어디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것은 짙은 역마살(驛馬煞)이 낀 까닭일까요? 아니면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風光)이 보내는 유혹의 손길 때문일까요? 끊임없이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굉음에 짓눌려 달리는 재미가 거의 가라앉아 갈 무렵 아늑한 분위기에 싸인 작은 항구 하나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Y형!

항구에 정박해 있는 뱃전에 이제 막 불빛이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감포항입니다. 방파제 안쪽으로 잇달아 늘어선 횟집에서 밀려 나오는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이제 막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을 가르며 이리저리 몰려 다닙니다. 그 사이를 비집으며 손님을 끌어 들이려는 아낙네들의 호들갑이 끼어 들어 작으마한 항구는 이래저래 부산합니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직 정(情)입니다. 하루의 긴 여정을 마치고 둥지로 찾아들어 깃을 접는 한 마리 새처럼 소리 없이 감포항의 적당한 어둠 안쪽에 늦겨울의 오후를 달려온 몸과 마음을 내려 놓아봅니다. 동해의 바닷물을 더듬어온 바람자락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마음을 열고 낯선 나그네의 심사(心思)를 감싸주어 그렇게 심한 객창감(客窓感)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맞아 주지 않는 비릿한 항구의 어둠은 식어가는 몸을 맡기기에는 어쩐지 거북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딪는 눈길마다 유서 깊은 역사의 혼이 담겨있던 호국의 여정(旅情)을 되돌아 보니 뿌듯한 느낌까지 스멀스멀 밀려 들었습니다. 꼭 그때쯤에 경주일대를 돌아보고 늦게 출발한 친구들이 타고 온 자동차의 불빛을 타고 건너온 친구들의 아늑한 마음이 어깨를 감싸주어 조금은 낯설었던 마라톤 기행은 즐거움으로 되살아 났습니다. 2005.2 힘날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