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20 겨울, 인정(人情)어린 호반을 달리며

힘날세상 2009. 7. 30. 11:13

마라톤기행 20

 

겨울, 인정(人情)어린 호반을 달리며

 

 

Y형!

미칠 것 같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시간의 성(成)을 허물어, 바람은 옥정호(玉井湖) 수면을 밟아 현란한 춤사위로 흐릿한 하늘을 돌아 내립니다. 입춘(立春)을 향해 손짓하는 겨울 호수를 내려다 보다가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바람 자락의 안쪽을 들추고 짙은 은빛 밑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 것 같은 봄의 향기를 떠올려 봅니다. 그러나 이내 약간은 상기되었던 마음을 다소곳이 가라 앉혔습니다. 봄을 위한 노래를 부르기에는 아직 바람의 끝이 날카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저 부르지도 못한 체 마음의 심층부에 담아 두었던 못갖춘마디의 사랑 노래가 꼭꼭 여미어 둔 마음을 풀어 헤치고 그 진한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두려움이 더 컸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Y형!

어느 시간이든지 그리움은 살아납니다. 들판에 가득 담긴 보드라운 달빛이 두려워 수없이 많은 빗기둥을 세우며 들녘을 건너오는 여름의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가 가슴치며 솟아오르는 그리움에 얼마나 눈물을 지웠으며, 좀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은 현란한 단풍으로 감싸여 오만한 자세로 일어서던 내장(內藏)의 산봉우리가 토닥이고 있던 잊지 못할 시간들을 바라보며 가슴 조였던 그 많은 날들을 두부 자르듯이 딱 잘라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움은 뾰족한 바람으로 사정없이 찔러오다가 끝내는 눈보라로 세상을 뒤덮어버리는 동장군(冬將軍)의 호령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아 있습니다.

주로(走路)에 들어서기만 하면 나는 왜 이런 그리움에 휩싸여 버리는지, 그래서 왜 눈물짓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달리기가 좋습니다. 클럽 회원들과 팀을 이루어 달리다가도 나는 슬며시 발길을 늦추어 혼자서 달립니다. 바로 그리움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서 달리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아예 혼자서 주로에 들어섭니다.

 

Y형!

전북 임실군 운암면에 위치하고 있는 운암대교 위에 그리움 하나로 섰습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고 긴 다리를 한 발 한 발 걸어서 건너갑니다. 짙은 외로움의 선율이 매달리는 난간에 기대어 진초록의 살결을 드러내고 있는 수면(水面)을 내려다 봅니다. 강태공들마저 낚싯대를 거두어 돌아가 버린 겨울 호수는 고요함만이 가득할 뿐, 나를 맞아 주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1989년 8월 31일 준공된 총연장 350m의 운암대교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옥정호반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이른 새벽 이곳 운암대교에서 바라보는 물안개는 신선의 세계 그대로입니다. 인간세상의 속(俗)한 기운을 모두 휘어 감아 거두어 가는 듯이 물안개는 그 너른 팔을 한껏 펼치며 우리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물안개는 피어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벌써부터 물안개에 싸여 도회지의 복잡하고 혼잡스러움을 하나씩하나씩 벗어 던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의 달리기를 시작한다면 옥정호반을 달리고 났을 즈음에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리 건너 왼쪽 산자락에 빼곡하게 들어선 카페촌을 바라보면서 느릿한 발걸음으로 옮겨봅니다. 어느 가을날 풍차가 매달려 있는 하얀 집 창가에 앉아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을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호반에 거꾸로 비치는 그림자에 취해 참으로 오랫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고운 단풍이 빗줄기에 젖어 가는 모습에 빠져 이곳에 주저앉았지요.‘ 찻잔을 내려 놓던 안주인의 찬사가 생각났지만 온 산을 덮고 있는 하얀 눈의 두께를 걷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오늘은 속세를 덮어 버린 겨울 눈을 우리들의 마음에 담고 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길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넘어갑니다. 제법 가파르게 이어지는 오르막을 달리면서 오른쪽으로만 눈길을 주는 것은 발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옥정호반의 수면 위로 미끄러지는 그리움 때문입니다.

 

Y형!

고갯마루를 내려서 필봉농악전수관을 지날 즈음에 농악(農樂) 소리가 구성지게 들립니다. 언제 들어도 우리의 농악은 힘이 실려 있고, 흥이 살아 납니다. 발길을 멈추고 들어가보니 수도 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흥에 겨운 모습으로 악기를 두드리며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스텐드를 꽉 메운 구경꾼들도 마음은 마당에 가 있는 듯 어깨를 들썩이고 있습니다. 필봉농악을 배우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젊은이들이 우리 농악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배우려는 것이야말로 나라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매년 전수생들을 위해 전수마당을 펼치고 있는데 올 해는 2월 1일부터 2월 7일까지 진행되고 있으며, 누구나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참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2년째 참가하고 있다는 김응국(21세, 외국어대 중국어과 2학년)군은 참가 동기를 묻는 나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우리 것을 이어간다는 가느다란 뿌듯함이 있습니다. 댄스뮤직 같은 것은 비교도 안될 만큼 흥이 나고 신명이 납니다. 이 땅의 젊은이라면 땀 흘려 배울만합니다.” 당차게 말하는 대학생의 어깨는 흥겨운 가락에 그야말로 신명(神命)이 나는 듯 보였습니다.

임실 필봉농악(筆峰農樂)은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에 전승되고 있는 농악으로 호남좌도농악에 속1988년에 중요무형문화제 제 11-마호로 지정되었습니다합니다. 필봉마을(필봉이라는 마을이름도 마을 뒷산이 붓끝과 같은 형상이라고 붙여졌다고 합니다.)에는 예로부터 당산굿·마당밟기 정도의 단순한 농악이 전승되어 왔는데, 1920년경에 상쇠(패의 지도자 격으로 꽹과리를 가장 잘 치는 사람) 박학삼을 마을로 초빙하여 그의 농악을 배우면서부터 오늘날과 같은 높은 수준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필봉농악의 농악수들은 흰 바지저고리에 남색조끼를 입고 삼색띠를 두르며, 농기, 용기(그릇), 영기(깃발), 긴 쇠나발, 사물(꽹과리, 징, 북, 장구), 법고(불교의식 때 쓰는 작은 북), 잡색(대포수, 창부<남자광대>, 양반, 조리중<삼태기를 맨 중>, 쇠채만 든 농구, 각시, 화동과 무동<사내아이>)으로 편성되는데, 쇠잡이(꽹과리나 징을 치는 사람)만 상모(털이나 줄이 달린 농악에서 쓰는 모자)를 쓰며 나머지는 고깔을 쓰는 것이 특이합니다.

필봉농악은 섣달 그믐의 매굿, 정초의 마당밟기(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도는 것), 당산제굿(당산에서 마을을 위해 제사지낼 때 농악을 치며 노는 것), 보름굿과 징검다리에서 치는 노디굿, 걸궁굿, 문굿, 농사철의 두레굿, 기굿과 판굿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 판굿은 가장 예술성이 뛰어나며, 뒷굿에 편성되는 영산가락은 가진영산, 다드래기영산(상쇠가 부포시범을 보임), 미지기영산, 재넘기영산(상쇠가 쇠시범을 보임) 및 군영놀이영산(개인놀이와 비슷함)으로 매우 세분화되어 있고 느린 편입니다.

필봉농악의 특징은 쇠가락(농악의 대표격인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 씩씩하며, 개개인의 기교보다 단체의 화합과 단결을 중시하는데 있으며, 현재 1989년 박형래(1927년 필봉리 출생)님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보전되고 있으며, 이 곳 필봉리에 전수관을 지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필봉농악 전수관을 나오면서 힘겨운 농사일을 흥겨운 농악소리에 묻어 시름을 달래고, 수확의 기쁨과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농부들의 소박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농촌의 현실을 생각하면 저들이 추는 농무(農舞)는 흥겨운 가락이 아니라 시름에 젖어 버린 한풀이 가락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개운치 못합니다. 신경림 시인이 노래한 ‘농무(農舞)’라는 시야말로 바로 이러한 농부들의 뼈저린 가락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 고 난 텅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 따라붙 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대 는구나 /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 서림이처 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 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 는 점점 신명(神命)이 난다 /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신경림, 농무(農舞)

 

신경림 시인은 이러한 농부들의 피맺힌 절규를 ‘신명(神命)이 난다’고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의 아픔이 더욱 절실하게 가슴을 파고 드는가 봅니다.

 

Y형!

강진면을 돌아 섬진강댐으로 올라가는 오르막을 오릅니다. 오른쪽옆구리를 간지럽히며 부드럽게 흘러가야 할 섬진강은 두꺼운 얼음으로 얼어 붙어 있습니다. 농부들의 마음처럼 얼어 붙은 겨울 강을 보면서도 절망적이지 않는 것은, 섬진강은 넉넉하고 풍요롭기 때문에 꽃이 피고 새가 울어댈 봄날이 되면 얼어붙은 응어리를 풀고 새 생명을 틔워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은 언제나 인간보다 마음의 폭이 넓습니다. 자연은 인간보다 부드럽고, 포근하며, 언제나 지나치거나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자연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인가 봅니다.

숨이 약간 거세어질 즈음에 섬진강댐이 바라다 보이는 고갯마루에 섰습니다. 눈물처럼 가느다란 물줄기를 흘리고 있는 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습니다. 불혹(不惑)을 넘기고 나서야 가정을 이룬 친구 녀석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 막혀 있던 것이 탁 터졌을 때의 시원함 말입니다. 흐르는 강물을 막아 세워두고 있는 거대한 댐을 보면서 가슴이 탁 트인 시원함을 느끼는 무슨 아이러니란 말입니까? 댐은 무한한 힘입니다. 가슴에 담고 있는 물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힘은 더욱 거대합니다. 지난 가을 호남평야를 가로지르는 원평천을 따라 달리면서 그 작은 물줄기들이 김제만경의 거대한 들녘에 생명을 길러 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물은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무한의 힘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물을 담고 있는 댐은 힘의 원천입니다.

물을 한 모금 얻어 마시기 위해 고갯마루에 있는 음식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텅 빈 가게에 난로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차가운 겨울의 날씨를 녹이기에는 조금은 부족한 듯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좋아 보이는 주인 아저씨의 주름진 얼굴에서 피어나는 인정(人情)은 겨울바람에 오그라들었던 마음을 녹이기에는 충분하였습니다.

“ 아이, 이런 겨울에 멋허는 짓이여어. 추운디 이리와서 손 좀 녹이더라고. ” 몇 년 만에고향을 찾은 아들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손을 잡아 끄는데 마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 이게 원래는 일정 때 세운 것이고만. 근디 그후로 박정희 대통령 때 경제개발사업으로다가 새로 쌓은 거여. 이게 이렇게 보여도 배타고 돌면 하루가 걸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클 것이고만. 근디 말여. 댐은 여그를 막었는디 물은 전부다 김제 맹경으로 간다니께. 임실 사람들은 오히려 손해고 그 쪽 사람들만 좋아졌당게. 그리도 어쩌겄는가? 국가에서 허는 일인디 말여. 허기사 이 댐 덕분에 우리 자식들 다 갈치고 살았네. 여그가 고기반 물반이었거든. 지금이야 고기를 못잡지만 그 때만해도 옥정호가 우리를 먹여 살렸당게 그려.”

댐에 대해서 묻는 나의 질문에 구수한 말투로 대답하시는 노인의 얼굴에서 참으로 평안함이 풍겨져 나왔습니다.

Y형!

이제 하프 정도를 달린 것 같습니다. 길은 나긋나긋한 호수의 허리를 휘감고 돌아갑니다. 왼쪽으로 ‘호남의병유적지’라는 팻말이 보입니다. 이곳을 따라 약 2km 정도 오르면 드넓은 분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의 ‘둔헌 임병찬 창의유적지(遯軒 林炳瓚 倡義遺蹟址)’로 전북 옥구 출신인 임병찬(1851-1916)이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스승인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훈련을 시켰던 곳입니다. 이제는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지만, 그들의 애국정신은 종성리 사람들의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전승되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국토의 모두가 박물관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발을 디디는 곳마다 선조들의 얼이 살아 있고, 그분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것을 보면 정말 우리 나라 산하(山河)는 고이고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유산(遺産)입니다.

황토리라는 마을 이름만큼이나 바라다 보이는 분위기에 끌려 주로(走路)에서 벗어나 눈이 짙게 덮인 작은 길을 따라 달립니다. 며칠 전에 내려 쌓인 눈길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젖어 달리는데 작은 길은 마치 호수 속으로 풍덩 빠져 들어가는 듯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달려 들어가던 길이 우뚝 멈춘 곳에 평범한 정자 하나가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채 쓸쓸히 서 있습니다. 난국정(蘭菊亭)이었습니다. 1928년 가을에 건립되었는데 옥정호의 수면이 높아짐에 따라 196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옥정호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용운리에서 바라보는 외안날이라는 섬의 경치가 옥정호 최고의 경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난국정에서 바라보는 경치 또한 용운리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용운리의 외안날이 어머니의 아늑한 품에 안겨 있는 듯하여 오밀조밀한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면, 이곳 난국정에서 바라보는 옥정호는 툭 트인 정경(情景)이 마치 활달한 아버지와 같은 호탕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침 가느다란 눈발이 내리며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마음을 덮어 누르기 시작합니다. 황토리는 모든 움직임이 멎은 채 고요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 함박눈이라도 내리는 날 이 곳 난국정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시심(詩心)이 일 것도 같습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던 유종원(柳宗元;773-819)이 지었던 <강설(江雪)>이란 시 또한 바로 이러한 정경을 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온 산에 새는 날지 않고

萬徑人蹤滅.(만경인종멸). 모든 길엔 사람의 발길도 끊어졌는데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외로운 배에 삿갓 쓴 노인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눈 내려 차가운 강에 홀로 낚시질 한다

- 유종원(柳宗元), 강설(江雪)

 

황토리 마을의 풍광(風光)에 눈길을 떼지 못하여 아무나 붙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쪽문을 하나 열어 두고 있는 가겟집을 문을 열고 싶었으나, 내 마음 속에 내 나름의 포장을 하여 담아 놓은 느낌이 흐트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라 그냥 발길을 돌려 마을을 빠져 나왔습니다. 마치 고귀한 물건이라도 훔쳐 나오는 도둑과 같은 심정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난국정 처마 밑으로 이어지는 겨울 호반과 유종원의 시구(詩句)가 발자국마다 새록새록 묻어 납니다.

 

Y형!

산내면 소재지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길은 왼쪽으로 추령천을 따라 순창군 쌍치면으로, 곧장 구절재를 넘어 칠보면으로, 오른쪽으로 돌면 목욕리를 거쳐 종산리로 이어집니다. 마음 같아서는 어느 곳이든지 눈 덮인 산하(山河)를 따라 달리고 싶지만 30여km를 달리는 발품으로 인한 피로감과 함께 눈으로 밟아왔던 호반의 정경(情景)을 다소곳이 갈무리해 둬야 할 것 같아 오늘은 여기서 발길을 멈추고 싶습니다.

Y형!

마라톤 기행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또한 그들이 건네주는 포근하고도 따뜻한 인정(人情)의 두께가 내가 밟아 갔던 아름다운 자연의 서사시(敍事詩)보다 더욱 두껍게 느껴지는 것은 누가 어떻게 말하더라도 자연은 우리들의 삶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자연은 늘 넉넉한 품을 열어 우리 인간들을 감싸주고 있는 것을 보면 자연은 그대로 우리 인간들의 삶의 한 페이지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따라 인정을 더듬어 가는 나의 마라톤 기행은 세월을 따라 국토의 산하(山河)를 따라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2005. 1 힘날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