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18
그윽한 호심(湖心)에 젖은 오후의 이야기
Y형!
대아정(大雅亭)이라는 정자에 앉아 겨울의 침묵을 이어가고 있는 대아(大雅) 호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둔산 자락을 흔들며 달려온 겨울 바람이 제법 차가운 발길로 겨울 호반을 뛰놀고 있는데, 햇살은수 없이 많은 은빛 조각으로 부서져 서로를 부딪치며 오후의 한적한 시간들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아직 단풍의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는 나뭇가지 끝에 상념(想念)을 매달고 다가올 한 해를 향해 마음을 열어 보다가, 댐이 넘칠 만큼이나 많은 물을 가두고 있는 대아댐 위에 눈길을 실어 봅니다. 일제시대에 쌓았다는 옛날 댐을 껴안아 다시 막은 댐 위에는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거센 목소리를 토해내는 겨울 바람만이 거만하게 휘젓고 있을 뿐, 황량한 모습으로 돌아서는 세월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텅 비어 있는 댐 위에서 오늘의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은 댐이 품고 있는 무한한 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겨우내 끌어안은 엄청난 양의 물은 내년 여름 호남평야를 촉촉하게 적셔 통통하게 영근 낱알로 가을을 이루어 낼 것이며, 수확의 현장에서 풍년가를 부르고 있을 농부들의 땀을 씻어내는 청량제가 될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흐뭇한 일인가 봅니다.
Y형!
내리막으로 시작하는 주로(走路)는 하프마라톤을 달려 완주군 송광사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바람 줄기에 흔들리는 오후의 햇볕을 끌어 안고 내리막을 막 내려갈 즈음에, 다소곳이 내려다 보고 있는 운암산(573M)의 발끝에서 콧마루가 시큰하게 올라오는 빛바랜 추억을 건져 올려봅니다.
하사관학교 교육이 끝날 무렵에 유격훈련을 받기 위해 여산에서 해가 진 후에 출발하여 밤을 밝히며 걸어 이곳 유격장에 새벽녘에 도착했습니다. 적막과 어둠에 싸인 유격장 앞에서 우리가 본 것은 빨간 모자에서 튕겨 나오는 날카로운 눈매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암산 호랑이, 하사관학교 유격대원들이었습니다. 운암산의 좁고도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유격코스에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조교들 말대로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는 몸으로 다졌습니다. 그러면서 강한 군인 정신을 일깨우게 되었고 '오십만 촉광으로 빛난다'는 하사 계급장을 붙이고 전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호수를 가로질러 하강기가 도착하는 지점에는 유격훈련 중에 산화(散花)한 장병들의 혼이 고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비스듬히 내리는 햇살 속에서 쓸쓸하게 서 있는 묘비 앞에서 마음을 모아 먼저 가신 영혼들에게 묵념을 올렸습니다. 아내는 내가 하는 양을 보고 덩달아 고개를 숙입니다.
"여기에는 젊음을 바친 병사들의 영혼과 함께 당신의 마음도 담겨 있는 거죠?"
묵념을 마친 아내가 속삭였는데 왠지 그 말이 가슴을 짓누릅니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생각으로 한시라도 빨리 유격 훈련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였던 하사관학교 시절이 떠올라 괜스레 부끄러워졌던 까닭입니다.
추모비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 달립니다. 맑은 호수를 끼고 달리는 길은 낙엽이 다 떨어져 버린 나뭇가지처럼 황량합니다. 지나 다니는 차량도 거의 없어 삭막한 느낌까지 스멀스멀 파고 듭니다. 우리는 발자국을 세면서 달립니다. 굽어 돌아간 고갯길을 돌아 내리막을 달려 내려가니 은천교가 잔뜩 쪼그라든 오후의 햇살을 받고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달립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곧장 달리면 대아 수목원으로 이어지는 아늑한 길입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해 겨울 우리는 눈 덮인 길을 아무 말도 없이 걸었습니다. 그녀의 눈가에매달리는 눈물을 보면서 가슴 깊은 곳에 남겨둘 정(情) 한 조각씩을 나누어 가지고 우리는 돌아섰습니다. 지금은 뉴질랜드로 가버린 친구 김형동 화백이 그 때의 이야기를 그려준 그림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그때의 심사(心思)가 그녀의 얼굴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다리를 건너가는 아내를 앞세워 보내고 은천골로 뻗어간 도로를 따라 마음으로 달려봅니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남긴 발자국이 새록새록 돋아날 것 같았는데 되돌아본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그대로 움추려 들고 말았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아내는 그리움이란 소중한 것이라며 덮어 주었지만, 아내의 얼굴을 스쳐가는 시샘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Y형!
대아리 호반을 보듬고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내년 3월 26일에 펼쳐질 제1회 전주울트라마라톤 대회(www.jjultra100.co.kr)의 100km 코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부분입니다. 50km 지점부터 대략 15km 정도 이어지는 호반의 정취는 울트라 주자들의 가슴을 다독여 줄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주자들이 이 아름답고 고귀한 길을 밟을 시간이 한 밤중이라는 것입니다. 새벽녘에 이 곳을 달린다면 호반을 애무하는 물안개의 장관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자들은, 특히 울트라 주자들은 몸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달리는 까닭에 검은 치맛자락에 휩싸였을지라도 대아리 호반 굽이굽이 피어나는 환영과 찬사의 노래에 흠뻑 젖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울트라 마라톤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온 몸을 타고 흐릅니다. 그것도 혼자서 달리는 서바이벌 울트라마라톤은 보일 듯 보일 듯한 내 자신의 내면세계를 확실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길을 따라 나란히 달리는 산자락에 철잃은 개나리가 노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자신을 드러낸 꽃은 내 마음에 들어와 비로소 활짝 피었습니다. 상쾌하게 밀려들어 오는 달리기의 즐거운 시간 속에서 피어난 꽃은 그대로 사랑입니다. 그대로 행복입니다.
수만리로 건너가는 다리 앞에서 다리쉼을 하면서 베낭에 메고 온 물을 한 모금 나누어 마십니다. 이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그대로 곧장 내달리는 길은 운일암 반일암으로 넘어가는 삼거리를 지나 동상면을 거쳐 화심(花心), 전주로 이어지는 울트라마라톤 코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리를 건너 수만리로 이어지는 길을 밟아 갑니다.
수만리(水滿里)! 그야말로 물이 가득한 마을이라는 이름입니다. 대아 저수지가 생겨나기 전에는 대한민국 8대 오지(奧地)였다는 곳입니다. 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었을 동네인데 이름은 수만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 이 동네를 수만리라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Y형!
나는 이 수만리를 잊지 못합니다. 마을 입구에 동그맣게 서 있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서봅니다. 이제는 노랗게 쌓아 놓은 정(情)을 다 흘려 버리고 그저 그리움 하나로 서있는 품이 왠지 가녀리게 보입니다. 문학의 열병을 앓던 대학시절, 이상(李箱)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찾아 든 곳이 바로 여기 수만리였습니다. 학동(鶴洞)이라는 마을 이름도 좋았지만, 그 할머니댁의 뜨겁게 달구어진 방바닥과 아궁이에서 타오르던 장작불에 마음이 끌려 내리던 눈을 핑계삼아 한 달 가량을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단 한 줄도 글을 쓰지 못하고 단 한 줄의 글도 읽지 못한 채, 창 너머로 기웃거리는 산봉우리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녀를 만났습니다.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던 날, 큰 트렁크 하나를 들고 마을로 들어왔던 그녀는 보름이 못되어서 오던 길을 되돌아 마을을 떠나갔습니다.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지만 그 때의 감정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전혀 때묻지 않은 마음이었기에 혼탁한 세태에도 곱디 고운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Y형!
이제 이 곳에는 옛날의 인정(人情)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을의 입구에 은행나무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 밑에서 '수만리 밥집'이라고 쓴 헝겊 조가리가 바람에 펄렁거리고 있습니다. 수만리는 고요 속에 젖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는 자꾸만 머리를 치켜드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자행동이라는 마을을 지나며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길가에 허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낡은 집에서 왠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다가 불러 세웁니다.
"아이, 날도 추운디 멋헐라고 그렇게 뛰어 댕겨? 아이고오 저 땀 좀 봐. 물이나 한 사발 먹고 가."
우리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할머니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여름 클럽 훈련하다가 클럽 선배와 같이 아침밥을 얻어 먹었던 그 할머니 집이었습니다.
"여름에도 상추쌈이랑 밥 주셔서 잘 먹었는데... 미안스러워 어쩌지요?"
할머니가 내미는 말랑말랑한 홍시를 한 입 베어 무는데 글로 써서는 안될 것은 그 단맛 속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시골의 정(情)이 듬뿍 묻어 납니다. 이것이야말로 시골길을 달리는 맛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전주 8경의 한 곳인 위봉폭포가 힘찬 모습으로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깎아지른 듯한 60여 미터의 절벽을 2단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주변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폭포는 살아 있습니다. 폭포는 솟아오르는 힘입니다. 그래서 김수영시인은 폭포를 노래하여 선구자라고 불렀습니다. 나태와 무사안일에 빠져 있는 소시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질타하던 시인은 이제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그가 남긴 시(詩)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폭포(瀑布)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正)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김수영, 폭포(瀑布)
위봉폭포의 굉음이 귓가를 떠나갈 무렵 위봉산성의 성벽을 밟습니다. 위봉산성은 이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축성했던 성으로 높이 4~5m, 폭 3m의 성벽이 16km 정도 이어지는 규모이며, 지금도 홍예석문이 남아 있어 지방기념물(제17호)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 산성은 1675년 (숙종 원년) 인근 7개 군민을 동원하여 7년의 세월 동안 쌓은 것으로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과 조경묘에 있던 태조의 초상화와 그의 조상을 상징하는 나무 패를 피난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 동학농민봉기로 전주가 함락 되었을 때 초상화와 나무 패를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성 안에는 초상화와 위패를 모실 소형 궁전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문을 두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주로 통하는 서쪽에 반월형 문 하나만이 남아있을 뿐이어서 아쉬움이 더합니다.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성벽을 바라보다가 성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 객고(客苦)의 아픔에 젖어 눈물지었을 병사들을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 산자락을 거슬러 올라오는 차디찬 칼바람을 맞으며 그리움을 달래야 했던 이름 없는 병사들의 안타까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는데, 문득 당(唐)대의 시인인 왕창령이 변방 군사들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떠오릅니다.
烽火城西百尺樓 봉화성 서쪽 백척 수루에
黃昏獨坐海風秋 황혼에 홀로 오르니 청해호의 바람은 이미 가을인데
更吹羌笛關山月 또 다시 오랑캐의 피리는 관산월을 부르고
無邪金閨萬里愁 어찌할거나, 규방의 만 리 밖 시름을.
琵琶起舞換新聲 비파 소리에 춤을 추는데 새로운 노래로 바뀌었다가
總是關山舊別情 반드시 관산월 곡조로 돌아와 이별을 슬픔을 노래하네
亂邊愁廳不盡 향수에 젖은 병사들의 소란에 잘 들리지도 않고
高高秋月照長城 장성 아래로 높은 가을달이 기우네.
- 王昌齡, 從軍行(1,2)
Y형!
이제 눈 앞으로 넘어가고 있는 고개만 내려서면 오늘 마라톤 기행의 종착지인 송광사입니다. 내리막길의 스피드를 미처 달래기도 전에 맑은 계류를 끼고 있는 송광사 일주문에 도달하였습니다. 한창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송광사는 신라 진평왕 5년(583)에 터를 잡았고,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에 의해서 개창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폐사(廢寺)가 되어 가시덤불 속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대성지(大聖地)임을 알아보시고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수백 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임술)에 덕림 스님을 비롯하여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복원․중창하게 되었습니다.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면, 몇 일 전부터 흥건히 땀 흘려 뭇 사람들을 경고한다는 불가사의한 부처상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도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관광공사에서 발간한 한국관련 홍보책자에도 여러 번 실린 바가 있는 국내 유일의 전통 음악 벽화가 천정에 그려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송광사에서 주목해야 할 문화재는 亞자형 종각 (보물 1244호)입니다. 이는 학(鶴)이 내려앉은 듯한 모습을 한 국내 유일의 아(亞)자형 종각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이나 보궁에만 올릴 수 있는 아(亞)자 형태의 지붕을 가지고 있다는 특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종각을 찾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주 송광사가 자랑하는 것은 십여 리를 따라 이어지는 벚꽃터널입니다. 눈부시게 피어나는 벚꽃도 좋지만 여름날 새벽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따라 진초록의 물결을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어느 곳에서도 느껴 볼 수 없는 환상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Y형!
빛 바래고 낡아빠졌지만 아직도 송광여관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눈이 몹시도 내리던 날 오후 학교 연극반 워크샵을 위해 이곳을 찾았던 우리들은 꼬박 이틀을 갇혀 있었습니다.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눈, 눈이었습니다. 유난히 붉은 빛을 내며 타오르는 아궁이의 장작불 앞에 두 손을 편 채, 주고받던 이야기들은 오늘 같은 속(俗)한 세상에는 도저히 내어 놓을 수 없는 청아(淸雅)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온 누리를 덮고 우리들의 마음까지 덮어버린 눈 때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눈이 내리기를 은근히 기대하였지만, 맑은 하늘은 기어이 어두운 치마자락을 끌어다 덮을 뿐이었습니다.
새해가 다가옵니다. 이제 그 동안 달렸던 산하(山河)를 돌아다 보며, 또 다른 마라톤 기행을 꿈꾸어야 합니다. 달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달리는 장소와, 달리는 시간과, 달리는 사람에 따라서 독특한 맛을 풍겨내는 것이 마라톤 기행입니다. 고갯길은 반드시 혼자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강을 따라 달릴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달려야 합니다. 길게 이어지는 국도는 여럿이서 어깨를 맞대고 달리는 것이 마음의 화평(和平)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새해에도 마음의 화평을 위한 달리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달리고 싶은 마음을 이어 아름다운 강산을 즐거운 발길로 밟아 보아야겠습니다. 힘날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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