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16 지평선(地平線)에 일렁이는 황금물결에 젖어

힘날세상 2009. 7. 30. 11:03

마라톤 기행 16

 

지평선(地平線)에 일렁이는 황금물결에 젖어

 

 

Y형!

오후의 햇살이 참으로 말갛습니다. 금산사 미륵전 앞마당에 내려 앉는 가을의 햇살은 투명하되 비어 있지 않으며, 가벼우나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름내 혹독하게 파고들던 그 뜨거움을 받아내며 가을을 기다렸던 나뭇잎들은 들녘에서 달려 나오는, 황금빛이 찬란한 바람 줄기의 선율을 따라 마음속에 깊이 깊이 갈무리해 두었던 화려한 빛깔의 노래를 한 소절씩 또는 한 마디씩 흘리고 있습니다.

국보 제 62호인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佛國土)인 용화 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으로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입니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자비(慈悲)를 갖춘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비라는 것이 포용력을 가지고 인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아우른다는 말이고 보면, 미륵은 역시 거칠고 메마른 모든 중생(衆生)들을 제도(濟度)할 구세주인 미래불(未來佛)입니다. 그러나 산사(山寺)의 뜰에는 가을빛으로 범벅이 된, 고요와 화평(和平)한 기운이 가득할 뿐이어서 미륵불이 현신(現身)할 만큼 탁한 분위기는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Y형!

들녘을 따라 지천(至賤)으로 피어서 하얗고 빨간 손길로 눈시리도록 푸르른 하늘가를 단장(丹粧)하고 있는 코스모스 향을 가슴에 담고, 황금 물결 일렁이는 들녘을 달리는 시간은 틀림없이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소중한 보배일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의 마음을 닦아 자비와 사랑으로 채워주는 부처의 품에서 시작하여 풍성한 들녘을 더듬어 삼국시대 선인(先人)들의 삶의 족적(足跡)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벽골제까지 달려가 벌써 여섯 번 째 열리고 있는 지평선 축제를 구경할 생각을 하니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떨림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Y형!

미륵불의 품을 벗어나 산문(山門)을 나섭니다. 속세(俗世)의 흐릿한 기운을 벗어버려 정갈한 산사(山寺)를 나서려니 어쩐지 속(俗)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아 개운하지 못한 마음이나, 벽골제 터에서 벌어지는 지평선 축제의 살 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 농경문화의 중심부를 관류(貫流)하고 있는 농심(農心)의 세상을 들여다 볼 생각에 오후의 햇살을 밟아가는 발걸음은 힘이 솟아납니다. 화려한 단풍을 준비하고 있는 벚나무 터널을 달려 금산사 입구에 있는 고색(古色)이 창연(蒼然)한 돌로 된 홍예(虹霓)를 지나는데 후백제를 세운 견훤왕이 후즐그레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세력을 넓혀가던 기세가 꺾이고, 자신의 아들에 의해 이곳 금산사에 유폐(幽閉)당했던 견훤의 말로(末路)는 인생무상 바로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허망한 것이 인생이고 보면 늘 즐거운 마음으로만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금평저수지에 자리잡고 있는 증산교 총본부를 지나면서 모악산(母岳山)은 참으로 많은 종교를 품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륵의 정기가 살아 있는 땅이라며 수도 없는 신흥 종교가 스며들어 모악은 그야말로 종교의 세상입니다. 세상이 혼탁할수록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많은 종교가 생겨나는가 봅니다. 무엇인가 불안한 나머지 종교에 매달려보려는 사람들의 심사 말입니다.

원평면 소재지를 지나는데 아내가 동학혁명군 얘기를 불쑥 꺼냅니다. 원평의 땡뫼산에서 집결했던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향하여 득달같이 달려간 길을 따라 달립니다. 아내는 마치 우리가 동학군이나 된 듯한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분노에 찬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두 주먹 불끈 쥐고 나섰던 그들의 심사(心思)는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평시가지를 벗어나 원평천 둑을 따라 달립니다. 이제 호남의 들녘은 그 넓은 가슴을 열고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황금빛의 춤사위를 펼쳐 내고 있는 벼이삭을 보듬어 가을의 풍요로움을 노래하고 있는 오후의 햇살에 눈이 팔린 아내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며 호들갑을 떨어 댑니다. 우리는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잡은 메뚜기 목덜미를 강아지풀에 꿰어 와 구워 먹었던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논두렁을 돌아다니며 메뚜기 잡기에 나섰으나 힘찬 날갯짓으로 가을 하늘을 날아오르는 풀무치 몇 마리를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풀이 많이 자라 달리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여기저기 내려놓는 눈길마다 가을빛이 가득가득 담겨 들어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커다란 나무가 우리들을 내려다 보고 있기에 다가가 보니 천연기념물 제 296호로 지정되어 있는 왕버들 나무입니다. 김제시 봉남면 종덕리 성덕 마을 앞에 서 있는 이 노목(老木)은 450년의 세월을 따라 높이 20m 둘레 8.8m나 되도록 몸집을 키워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왕버들나무로 자라면서 이곳 마을 사람들이 그려내는 희비(喜悲)의 쌍곡선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노목(老木)의 피부는 형편없이 주름이 잡히고 가지 또한 힘없이 늘어져 버팀목을 받혀 놓아야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나뭇가지에 빽빽하게 매달린 푸르디 푸른 나뭇잎은 초롱한 눈망울로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매년 3월 3일에 이 나무를 향해 고사를 지내어 자신들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것도 자신들의 조상들이 노목(老木)과 나누어 온 정(情)을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버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찾아온 마을 사람들과 나누었을 이야기들을 그려보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 모악산(793m)이 후덕한 몸매를 드러내놓고 자신의 품을 벗어나 기름진 들녘을 적시며 서해로 발걸음을 옮겨 디디는 원평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옛부터 엄뫼, 큰뫼로 불려져온 모악산(母岳山)은 정상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과 같아서 모악산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모악산의 줄기는 세 개의 행정구역 (전주시, 김제시, 완주군) 을 나누며 배재, 장군재, 밤티재의 부드러운 능선이 있고, 금산사 방면의 내모악과 동쪽의 구이 방향의 외모악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산세는 기운찬 호남정맥의 힘을 그대로 이어 우뚝 솟구쳐서 서해에 닿을 것처럼 길게 뻗어 내리다가 산자락 아래 사방 백 리가 넘는 호남평야를 펼쳐놓았고 북쪽으로 천년고도 전주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호남평야는 모악산을 중심으로 북쪽에서는 금남정맥, 남쪽에는 호남정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호남평야 한가운데서 보면 마치 어머니가 양팔을 벌려 사방 몇 백 리의 너른 들녘을 감싸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또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구이저수지, 금평저수지, 안덕저수지를 채우고, 만경강과 동진강으로 흘러들어 호남평야를 넉넉하게 해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늘상 허리를 돌아 이마를 넘어 어깨죽지를 밟고 다녔던 모악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다가 문득 소식(蘇軾)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橫看成岭側成峰 가로로 보면 으슥한 골짜기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인데

遠近高低各不同 멀고 가깝고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고 제각각 다르구나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只緣神在此山中 다만 제 스스로 이 산 속에 들어 있는 탓이로다

- 蘇軾, 題西林壁

 

Y형!

역시 모악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모악의 품을 벗어나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바라보려면 자신에서 한 발 벗어나야 하는가 봅니다. 부상으로 1년이 넘게 달리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몸은 달리지를 못했지만, 사실 그때 나는 아주 소중한 달리기를 한 셈입니다. 장거리 달리기에 나선 클럽 회원들의 급수를 하면서 나는 달리기의 본질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왜 달리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깨달았던 생각 하나는 우리는 무엇인가 포장하기를 좋아하고, 덧입히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색을 칠하고 옷을 입혀서 만든 껍데기를 마치 본질인 것처럼 내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 ‘살아있음의 확인’이나 ‘자신과의 대화’, 또는 ‘고요와 화평’과 같은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하여 들고 다녔던 달리기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영국의 등산가 조지 맬러리(George Mallory)의 말처럼 내가 달리고 싶고 내 몸이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달리는 것입니다.

 

Y형!

원평천을 따라 달리다 보니 어느덧 어린 시절 내가 뛰어 놀던 우리 동네에 들어섰습니다. 한 때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주 초라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것 같은 고샅을 돌아 다녀봅니다. 고샅에 돋아난 풀뿌리까지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조잘조잘 남겨 놓았던 철없는 이야기들이나, 자치기․ 구슬치기를 하며,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에서 썰매를 타며 쌓아 놓았던 순수한 인정(人情)은 두툼한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뒷집에 살던 영기와 뛰어다녔던 학교길도 옛모습 그대로건만 학교길을 가득 메웠던 친구들은 이제 어디에고 없습니다.

 

우리가 여름내내 낚시를 하던 원평천 바로 그 자리에서 아이들이 낚시를 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손바닥만한 붕어를 낚아 올립니다. 옛날 내가 잡아 올리던 그 물고기를 세월이 지난 오늘도 이 아이가 잡아 올립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그대로며 낚시터의 풍경도 그대로건만 가슴 아프게도 이 아이가 나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야 너희 아버지가 누구냐?”, “강대석인데요” “그래 네가 대석이 아들이로구나. 네 아버지가 내 후배인데” “그러세요?” 아이는 별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한 번 지어 보이더니 다시 낚시에 열중입니다. ‘숱하게 흘러간 세월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만 간격이 벌어지고 말았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초당(初唐)의 시인 하지장(賀知章)이 토로(吐露)한 마음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少小離家老大回 젊어서 집을 떠나 늙어서 돌아 왔는데

鄕音無改鬢毛催 머리는 희어졌어도 시골사투리는 여전하건만

兒童相見不相識 아이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笑向客從何處來 웃으면서 묻는구나 손님은 어디서 왔느냐고.

- 賀知章, 回鄕偶書

 

원평천 둑 위에 서서 물끄러미 동네를 내려다 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던 논을 바라보다가 문득 허리를 굽혀 일하시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두 손을 들어 어머니를 부르려고 하는데 그 자리에는 정갈한 가을 바람만 살랑거릴 뿐 아무도 없습니다. 나를 반겨 주는 누구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도망치듯 떠나와버린 고향의 하늘은 무심하게도 짙푸르기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한쪽 가슴이 저려옵니다. 우리 어머니는 매일 아침 기차역까지 내 책가방을 들어다 주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창피하여 제발 그만 두라고 아침부터 투정을 하였으나 어머니는 막무가내였습니다. 6살에 학교에 입학한 탓에 중학생이 되었어도 겨우 12살이었던 내가 30분 넘게 새벽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안스러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늘 투정을 부렸고 고집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어머니를 생각하기만 하면 이청준의 소설 <눈길>이 생각나 눈물을 적십니다.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어머님 그때 우시지 않았어요?”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 이청준, <눈길>에서

 

세상의 어머니들은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자신은 돌보지 않고 오직 자식 걱정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는 오직 내 가슴에 회한(悔恨)의 눈물로만 남아 있을 뿐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내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줍니다. 아내가 아들녀석에게 하는 양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어머니를 추억합니다. 그리고 늘 죄책감에 빠집니다.

 

Y형!

벽골제를 향해 달려가는 길을 조금 바꾸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원평천 둑길을 버리고 들녘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따라 달립니다. 들판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황금 물결이 되고 싶습니다. 누렇게 고개 숙인 벼이삭과 어깨동무를 하고서,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끝없이 펼쳐져 있는 황금 물결이 맞닿으며 풍성한 가을빛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 호남의 들녘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까닭입니다.

올해는 풍년입니다. 그것도 대풍(大豊)입니다. 지난 여름의 혹독한 불볕을 견뎌내고 충실한 이삭으로 서 있는 벼를 바라보는 일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풍요로운 함박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농부들의 막걸리 잔에 담겨 이 넓고 기름진 호남의 들녘에 울려 퍼질, 투박스럽지만 정겨운 풍년가를 생각해 봅니다. 빠른 속도로 벼를 베고 있는 콤바인을 바라보며 기계화에 힘입어 농촌의 삶도 이제는 많이 풍성해졌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내 생각의 발목을 붙잡고 흔들어 대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순박한 농민들, 하늘이 파랗게 물들어 오는 가을이면 여름내 흘린 땀방울을 따라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농민들의 노랫가락이 즐겁지만 않은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쌀 수입을 개방한다는 정부의 발표에 이제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며 삶의 현장을 떠나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을? 수확? 다 빛 좋은 개살구여어. 이렇게 통통허고 잘 여물게 농사 지어봐야 수입쌀헌티 밀려 버릴 턴디... 농민들만 불쌍하지. 안그려요?” 콤바인을 멈추고 마시던 막걸리 잔을 내밀며 한숨을 토해내는 김진국(63)씨의 가슴저림을 나는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풍성한 수확을 하면서 이렇게 가슴 아파하는 농민들의 심사를 어떻게 헤아려야 할 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미륵불이라도 현신(現身)하여 이 농민들의 아픈 가슴을 다독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Y형!

벽골제(碧骨堤) 둑 위에 서서 지평선(地平線)을 바라봅니다. 아내는 벽골제에 대해 궁금한 얼굴입니다. ‘지금 우리가 달려온 저 들판이 모두 벽골제에 의해 생겨난 호수였던 거야. 저기 모악산 밑에까지 물이 들어 찼다고 생각을 해보라구. 삼국시대에 이렇게 큰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지.’ 벽골제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섬진강댐을 쌓아 만든 옥정호의 물을 관개 시설을 하여 징게맹경(김제․ 만경) 넓은 들녘으로 내보내게 되면서 벽골제는 한낱 수로에 불과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김제시에서 지평선 축제를 하면서 터를 닦고 시설을 보수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장생거(벽골제의 5개 수문 가운에 현재 남아 있는 수문) 옆에 당시의 벽골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아 우리들을 삼국시대로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벽골제를 찾은 사람들은 모두 그 어마어마한 저수지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정읍에서 왔다는 정종남(57)씨는 ‘지금까지는 벽골제가 작은 저수지에 불과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였다면 이것은 저수지가 아니고 거의 바다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며 놀라는 얼굴입니다.

벽골제를 쌓았던 선인(先人)들로부터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농경문화(農耕文化)가 현대화에 밀려나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황금 들녘의 천혜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는 김제에서 지평선 축제라는 이름으로 농경문화와 자연 환경, 그리고 그 주체인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상생(上生)과 조화의 장(場)을 마련하여 세계 농경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려는 웅비의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김제시에서는 벽골제 유적이 남아 있는 이 곳에 박물관을 세워 농경문화를 한 곳에 집대성하여 놓았으며 실제로 농경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길옆으로 울긋불긋 피어난 코스모스도 파아란 가을 하늘을 머금고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어 축제의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축제의 마지막날인 까닭인지 눈길 닿은 곳마다 형형색색으로 사람꽃이 피었습니다. 사람들이 축제의 주체인지 객체인지 쉽게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雲集)하였습니다. 축제의 끝은 늘상 허전하고 쓸쓸함만 넘실거리는 것인데, 지평선 축제는 마음까지 넉넉해지는 황금 들녘의 한가운데서 워낙 쏠쏠한 눈구경을 한 까닭인지 사람들의 얼굴이 여유가 있고 발그스레하니 홍조(紅潮)가 돕니다. 농민들의 얼룩진 가슴도 쓰다듬어 주고 삭막한 도시민들의 잿빛 얼굴도 환하게 닦아 주는 화합의 정이 가득한 축제입니다. 그래서 지평선 축제는 살아 있습니다.

 

Y형!

지평선 축제가 벌어지는 바로 옆에 조정래 문학관이 서 있습니다. 바로 이 김제 만경 들녘이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무대가 되었던 인연 때문에 우리는 이곳 김제 만경의 들녘에서 우리의 근현대사를 소설화한 대단한 소설가의 족적(足跡)을 느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조정래가 생명을 불어 넣은 <태백산맥>의 ‘정하섭과 하대치’, <한강>의 ‘유일민, 유일표’ 형제는 바로 우리들의 아픔이요, 우리들의 삶입니다. 지난 여름 ‘유일민’ 형제의 삶을 읽으면서 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연좌제의 아픔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우리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삶의 한 지표(指標)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설(小說)은 우리 곁에 있어야 합니다. 조정래 문학관을 들르는 모든 사람들이 조정래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생생하게 담아가기를 바랐습니다.

 

Y형!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달리기는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찬란한 가을 햇살처럼 말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만 즐거운 달리기가 될 것입니다. 기록을 갱신(更新)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모습이겠지만, 나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콧노래를 부르면서 도란도란 정을 나누며 달리는 것이야말로 아마추어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라는 뜻으로 시경(詩經)을 읽고 난 후에 가지게 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시(詩)는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달리기 또한 세파(世波)에 시달린 우리 마음을 정화(淨化)시켜 ‘사무사(思無邪)’의 경지로 이끌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풍성한 김제의 들녘을 밟으면서 마음까지도 풍성해졌습니다. 힘날세상 20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