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14 풍패지향(豊沛之鄕)의 왕도(王都)를 밟으며

힘날세상 2009. 7. 30. 10:06

마라톤 기행 14

 

풍패지향(豊沛之鄕)의 왕도(王都)를 밟으며

 

푸류류류릉!

시위를 떠난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있습니다. 다가산(多佳山)의 고요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수 천년을 다소곳이 앉아 고도(古都) 전주(全州)를 내려다 보고 있는 다가산의 고요는 이제 그 두께가 몇 천 년의 세월을 머금고 있습니다. 두 어 걸음 달려버리면 어느덧 꼭대기에 올라설 만큼 낮고 낮은 다가산은 그래도 전주 시민들의 애환(哀歡)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가산을 좋아합니다. 다가산의 고요 속에 앉아 있기를 좋아합니다.

Y형!

이 새벽에 다가산의 정수리에 서 있습니다. 발밑을 간지럽히며 조잘조잘 흐르는 전주천을 내려다 보며, 달려가 품에 안아 볼 을 하나하나 떠올려 그려보고 있습니다. 다가산에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은 일본군 아지발도의 목에 활을 날려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고, 그 힘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무예 정신이 이곳 다가산 활터에 아직도 남아 있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은 ‘다가사후(多佳射帿)’라 하여 전주 8경으로 꼽고 맑은 노래를 부르며 청아(淸雅)한 목소리로 흘러가는 전주천의 물이랑을 끼고 한량(閑良)들이 호연지기를 겨루어 오시관중의 과녁판을 울리던 장관을 이야기합니다. 천양정(穿楊亭) 활터에서 만난 유병곤(67)님은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손이지만 활을 날려 보내는 것은 마음이다.’고 말합니다. 활쏘기는 육체적인 단련보다는 정신의 수양에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Y형!

다가산을 보듬고 흐르는 전주천을 따라 채 펼쳐지지도 않은 새벽을 달립니다. 전주천은 자연하천의 생태계를 거의 회복하여 마치 시골길을 달리는 기분입니다. 그 옛날 어린 시절에 물장구치며 뛰돌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쉬리가 살고 있는 전주천은 일본에서 열린 아름다운 하천 경연대회에서 우수하천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전주의 젖줄인 전주천을 살리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겨웠습니다. 둔치에 유채꽃을 심어 봄날의 샛노란 향기를 피우며 노래를 부르다가 그 향기를 비누에 담아 찾아 오는 손님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란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는 비료가 전주천을 살림터로 삼아 살아가는 물고기들에게는 치명적이라는 지적을 받아 이제는 사람의 손길을 거두고 거의 자연적으로 놓아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전주천은 어느 때나 풍덩 뛰어 들어도 좋을 만큼 맑은 물이 60만 시민들의 마음을 타고 흐르고 있습니다.

매곡교를 지나며 전주천을 버리고 남부시장을 가로질러 달립니다. 워낙 이른 새벽이었지만 시장은 활기에 차있습니다. “앗따, 천 원 한 장만 빼주랑게 그려어.” “아이고, 왜 근디야아. 아이, 겨우 2만원도 못되는디 빼돌라고 허면 나는 어찌허라고.” 역시 시장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산업화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오늘날, 남부시장을 찾는 발길이 뜸해지면서 시끌벅적한 가운데 면면히 흐르던 인정(人情)은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아 참으로 아쉽습니다. 문학의 열병을 앓던 대학시절, 나는 녹음기 스위치를 작동시켜 놓은 채 발길 닿는 대로 시장을 걸어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텅 빈 자취방에 돌아와 녹음기를 틀면 소시민(小市民)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팔팔하게 살아납니다. 소주잔을 통해 그 굴곡(屈曲)들을 들여다보면서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마음속에 새겨 보던 일이 생각납니다.

Y형!

남부시장의 인정(人情)을 밟으며 달린 우리는 전주부성(全州府城)의 남문으로 보물 308호로 지정되어 있는 풍남문을 지납니다. 규모는 작지만 제법 남대문의 짜임새를 보이고 있는 풍남문은 조선 후기 문루(門樓)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3층의 문루(門樓)를 세워 명견루(明見樓)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1767년(영조 43년) 3월 발생한 전주의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그해 9월 관찰사 홍락인(洪樂仁)이 2층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풍남문(豐南門)이라는 이름도 왕실의 고향을 풍패(豊沛, 원래는 한고조의 고향지명)라 하는 것을 본받아 전주가 조선 왕조의 발생지라는 의미에서 패서문(沛西門, 전주부성의 서쪽문)과 함께 각각 머리글자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옹성(甕城)까지 복원하여 새롭게 단장한 웅장한 위용(威容) 앞에서 호국(護國)의 일념으로 긴 칼을 움켜 쥐고 문루(門樓)에 올랐을 무장(武將)들의 불호령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합니다. 풍남문의 홍예(虹霓)를 바라보다가 저 문을 드나들었던 민초(民草)들이 막걸리 잔을 들고 불렀을 육자배기 가락을 떠올려 보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풍남문을 바라보던 눈길을 옆으로 돌리니 경기전(慶基殿)입니다. 경기전은 조선 건국의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 태종 14년(1414년)에 건립하였으며, 태조의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보물 제 931호))을 봉안한 곳으로 사적 제33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창시자로서 태조의 어진은 여섯 곳(서울의 문소전, 외방의 선원전, 영승전, 목청전, 집경전, 경기전)에 설치하여 보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태조의 어진은 이 곳 경기전의 어진 1본 뿐입니다. 사실 이 어진도 고종 9년(1872)에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낡아 태워서 파묻고 서울 영회전에 봉안하였던 어진을 모사(模寫)한 것입니다. 경기전에는 당시에 어진을 옮길 때 사용하던 신연(神輦, 어진을 옮길 때 사용하던 가마)과 향정(香亭, 향로를 넣어 받쳐 드는 가마)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유서 깊은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일제 때에 그 서쪽을 분할하여 일본인 전용인 수상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이상의 땅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속 건물까지 거의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인 전각, 하마비,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 등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전주시에서는 경기전 일대를 전통문화의 거리로 조성하여 한옥마을과 오목대, 한벽루, 남고산성을 관광특구로 연결하여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Y형!

이 일대는 한 발만 옮겨도 역사 유적지라고 할만큼 관광자원이 풍부합니다. 관광이라기보다는 선조들의 삶과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선의 기운(氣運)이 물씬 묻어나는 태조로(太祖路)를 따라 이마를 마주 대고 늘어 서있는 800여 채의 전통 한옥들 사이를 달리는 기분은 마치 조선의 어느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입니다. 한옥 생활 체험관, 전통술박물관, 공예품 전시관, 명품관 등을 따라 조선 시대의 삶을 더듬어 보는 것은 전통 문화의 도시인 전주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각별한 시간일 것입니다.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마음으로 안력(眼力)을 한껏 돋우다 보니 발길은 오목대(梧木臺)를 오르고 있습니다. 고려말 우왕(禑王) 6년(1380년)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한 삼도 순찰사 이성계 장군이 승전(勝戰)을 자축하는 연회를 베풀며 조선의 건국을 천명(闡明)했다는 곳입니다.

오목대를 내려서면 전주천의 푸른 물결이 굽이치는 한벽루(寒碧樓)가 발길을 붙잡습니다. 한벽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입니다. 밤을 새워가며 다독거린 물안개가 어슴프레하게 피어 오릅니다. 건너편에 우뚝 솟아 있는 남고산성(南高山城)이 부끄러운 듯 안개 속에 몸을 숨기는 자태는 그 옛날 이 곳을 찾은 선비들의 붓 끝에 힘을 실어 주었나 봅니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이경전(李慶全), 이기발(李起浡), 김진상(金鎭商) 등 20 여명의 선비들이 일필휘지로 써놓은 시문(詩文)들은 그 시절의 풍류를 지금까지 이어주어 세상의 속(俗)한 마음을 씻어주고 있습니다. 남고사(南固寺)에서 은은히 밀려오는 종소리(南固暮鐘)를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은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Y형!

남고산성으로 가는 길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오르막의 경사를 높이고 있습니다. 다리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오르막을 달려 올라 만난 남고산성은 산허리를 따라 낮으막하게 업드려 있습니다. 신라말에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대단한 위세로 세력을 넓혀갔던 후백제의 견훤왕(甄萱王)이 쌓았다는 석성(石城)으로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전주의 남쪽 7리에 있으며 돌로 성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9천9백 20자나 되며, 성안에는 우물이 일곱, 시내가 하나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서문지(西門址)에는 한여름의 고요만이 성벽만큼이나 두텁게 쌓여 있을 뿐입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을 밟아 억경대(億景臺)에 올랐습니다. 가슴으로 파고 들어오는 시가지(市街地)를 바라다보다가 문득 견훤왕을 생각합니다. 그가 이 억경대에 올라 자신의 도읍지 전주시를 내려다 보며 가슴에 새겼던 웅지(雄志)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호기(豪氣)로 두 주먹만을 불끈 쥐었을까요? 아니면 인간의 내면을 타고 흐르는 심사(心思)를 헤아려 호랑이와 토끼가 이마를 맞대고, 사람이 사람과 어깨를 마주 안고 살아가는 대동(大同)의 세상을 꿈꾸었을까요?

세심하게 복원을 해 놓은 성벽을 따라 달려 봅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성벽을 따라 달리면서 나는 문득 시간을 거슬러 견훤시대의 어느 때를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 봅니다. 어차피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고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모습은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천경대(千景臺)입니다. 이 낮으막한 봉우리에서 어느 이름 모를 병사들이 파수(把守)를 하면서 나누었을 이야기를 생각해봅니다. 집에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먹고 살아갈 걱정을 하고, 세력을 넓히기 위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전쟁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요? 이러고 보면 그들의 삶은 그대로 우리들의 삶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제 만경대만 내려서면 원래 출발했던 서문지(西門址)입니다. 만경대(萬景臺)! 고려말의 격동기를 지켜봤을 만경대는 아무 말 없이 전주천을 거슬러 올라온 바람자락만 펄럭이고 있습니다. 삼도 순찰사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하고 돌아 오던 중, 건너편 오목대(梧木臺)에서 승전(勝戰)을 자축하는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는 승전(勝戰)의 환호성이 넘실거리는 술잔을 들고 한고조(漢高祖)가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힘차게 부르며 흔들리는 고려왕조를 멸(滅)하고 조선을 세우겠다는 포부를 드러냅니다.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왜구 토벌에 참여했던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충절의 마을을 달랠 길 없어 말을 달려 이 곳 만경대에 올라 자신의 아픔을 눈물로 토해 내며 통한(痛恨)의 시를 읊었습니다.

 

千仞崗頭石逕橫 천길 바윗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登臨使我不勝情 홀로 오르니 나의 심정 가눌 길 없어

靑山隱約扶余國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한 부여국은

黃葉繽粉百濟城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도다.

九月高風愁客子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짙고

百年豪氣誤書生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天涯日沒淨雲谷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矯首無由望玉京 열없이 고개 돌려 개성만 바라본다.

 

남쪽 벼랑에 선명하게 새겨진 시구(詩句) 위에는 쉬지 않고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 소리만이 포은(圃隱)의 한(恨)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견훤은 전주의 지세(地勢)가 북쪽이 허(虛)해서 기(氣)가 빠져나간다고 보고 북쪽에 연못을 팠습니다.이것은 침입해올 적에 대비하는 장수(將帥)로서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덕진 연못에는 흐드러지게 피어 오르는 연꽃이 수줍은 모습을 들킬세라 푸른 연잎 사이로 분홍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덕진채련(德津採蓮)’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데, 견훤왕은 자신이 판 연못이 후세들에게 새벽을 휘감는 연향(蓮香)이 넘실거리는 하나의 휴식 공간으로 변할 것은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Y형!

전주(全州)는 백제 당시에는 완산(完山)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을 9주로 편성하면서 전주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우고 전주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전주는 한 나라의 왕도(王都)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완산주로 개칭하기도 했지만,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뿌리가 전주였던 까닭에 조선 태종 3년(1403년)에 전주(全州)라는 이름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패장(敗將)의 도읍이었던 탓에 왕도(王都)로서의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발굴을 한 결과 견훤의 왕궁터를 비롯하여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어 그 옛날의 찬란했던 문화를 다시 보는 듯합니다. 판소리의 굵은 선율(旋律)에서 힘찬 붓끝으로 이어지는 예술의 혼(魂)과,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 견위치명(見危致命)의 자세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쟁터로 뛰어 들었던 올곧은 선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예술과 충절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부녀자들의 손끝을 타고 흐르는 감칠맛 나는 음식 솜씨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으니 이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나 할 것입니다.

 

Y형!

참으로 오랜만에 시내를 달려 봤습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왕도(王都)를 따라 달리면서 선조(先祖)들의 삶을 반추(反芻)하며 달릴 수 있다는 것은 마라톤을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접목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5년 동안 전군도로 벚꽃길을 따라 달렸던 전주-군산 마라톤 대회를 시내를 달리는 코스로 바꾼다고 하니 달리면서 전주(全州)의 역사와 문화를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아 벌써 마음은 설레고 있습니다. 달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는 마라톤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얼큰한 맛이 어울어지는 한벽루(寒碧樓)의 오모가리처럼, 향긋하면서도 오묘한 맛을 내는 전주의 비빔밥처럼 말입니다. 힘날세상 20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