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행 19
선비들의 노랫소리를 머금고
Y형!
2005년의 들머리로 불어오는 바람 자락이 제법 날카로워 옷깃을 여미어보지만, 소매 끝으로 파고드는 차가움에, 따사로왔던 가을날 오후의 햇살이 그리워집니다. 눈을 내리지 않고 며칠 째 이어진 겨울의 시샘은 참으로 볼상 사나워 이제는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새해 첫날에 아내와 같이 부모님 산소까지 달려가서 인사를 드리고 온 터라 다리의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겨울 바람을 끌어 안고 달려보자는 아내의 재촉에 길을 나섰습니다.
Y형!
태인에 있는 피향정(披香亭)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신라의 석학 최치원(崔致遠 857~?)이 이곳 태산군수 시절에 수시로 올라 풍월을 읊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정자로, 앞에는 피향정, 뒤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보물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는 피향정은 처음 창건한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지금의 건물은 조선 현종 때 현감 박숭고가 중건(重建)한 후 두 차례 중수(重修)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4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고 주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습니다. 바로 옆에 연지(蓮池)가 있어 연향(蓮香)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피향정(披香亭)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의 정자를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 선비들의 풍류와 여유로운 마음입니다.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정사(政事)를 돌보는 중에도 주변의 풍경과 인정(人情)이 어우러지는 곳에 누각(樓閣)을 세우고 한 잔의 술과 시를 읊으며 마음을 나누었던 선인(先人)들의 한가로운 정(情)은, 시간과 정보의 홍수 속에 묻혀 내둘리며 삶의 질곡(桎梏)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대인들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심사(心思)일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산하(山河)를 가슴에 안고 내달리는 마라톤 기행은 삶의 활력소가 되어 줍니다.
Y형!
칠보면(七寶面)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를 따라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손바닥만한 시가지를 벗어나는 동안 어디에서도 최치원 선생의 흔적은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멀어지는 피향정의 부드러운 처마 곡선만이 지난날의 풍류를 말해 주는 듯하여 씁쓰레한 기분입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농가를 끝으로 시가지를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 대략 6km 정도 달리면 무성서원이 있는 칠보면입니다.
30번 도로를 감싸고 있는 겨울의 들녘은 차갑고 투명하여 싸늘한 느낌을 주는 겨울 햇살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가을걷이를 하던 농부들이 여름 내내 쌓아 둔 자신들의 땀방울과, 후덕한 새참의 인정까지 모두 걷어 가버린 탓에 휑그러한 바람줄기만 겨울 햇살을 타고 몰려 다닐 뿐, 무엇하나 눈길을 줄만한 것이 없습니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가운데 우뚝우뚝 세워 놓은 대나무 뾰쪽한 끝에서 노란 깃발이 분노의 몸짓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농촌 마을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는 ‘쌀 수입 반대’라는 깃발을 볼 수 있습니다. 허리가 휘도록 농사지어 이루어 낸 자신들의 땀이 영농비도 안 되는 값으로 팔려 나가는 가슴 아픈 현실에 대한 농민들의 토악질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외국에서 쌀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고 보니 농민들의 가슴저림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달리기는 농부들의 아픔까지 안고 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들판 가득히 쌓아 두었을 농부들의 애환(哀歡)을 생각하면, 인간의 삶이 늘 허전하고 어딘가 찬바람이 스며드는 것 같다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발길을 잡을 만한 풍광(風光)은 없고, 새록새록 정(情)을 쌓을 이야기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겨울의 들녘을 그래도 달리는 것은 선비들의 노랫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여정(旅情)인 까닭입니다.
Y형!
칠보천을 건너 무성서원의 처마가 뻔히 내다 보이지만, 칠보면을 우회하여 708번 지방도로로 접어 듭니다. 산외면 오공리에 있는 아주 귀한 조선시대 양반 가옥(家屋)을 보러 가기 위한 까닭입니다.
지금의 주인인 김동수님의 6대조 김명관(1755-1822)이 17세 되던 해에 짓기 시작하여 10년만에 완성했다는 옛집으로 도중에 보수하거나 개조하지 않아서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를 갖추고 있는 조선 상류층의 집입니다.
사랑채와 안채가 안 행랑채와 담장으로 인하여 강한 내외(內外)를 한 흔적이 보이고, 사랑채나 안채의 기둥 등이 전 시대 가옥들에 비해 빈약하며, 사랑채나 안채의 모습이 썩 잘생겨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안채의 평면 구성은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안채가 좌우 대칭으로 두 개의 부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에 대해서 칠보향토사료관장인 김생기(71)님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집안의 권리를 맏며느리에게 넘겨주지 않는 호남지역 가정의 특징이 가옥에서도 잘 나타난 예인데, 집안에 행사에 대한 권한이 없는 큰며느리가 불만을 갖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권한을 시어머니와 큰며느리가 공유하는 모습으로, 이 집을 처음 지을 당시 맏며느리의 경제권이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중요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된 이 집은 양반집 같은 격식이나 위엄보다는 오밀조밀한 살림집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집으로, 독창적인 공간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마당의 크기와 위치, 그리고 대문간에서 안채까지 흐르는 동선의 관계가 뛰어난데, 그 중에서도 문간마당과 안마당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행랑채와 담장으로 ㅁ자형을 구성하는 문간마당은 마당의 크기,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의 위치, 담장 너머로 머리가 살짝 보이는 안 행랑채 등 어느 곳 하나 허술한 곳이 없어, 문득 오랫동안 살아 보고 싶은 느낌이 든다며 아내는 여기저기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Y형!
칠보면(七寶面)에 들어 섭니다. 칠보면사무소를 지나 칠보천을 건너기 직전에 최치원 선생이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다는 '유상대(流觴臺)'라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유상곡수의 기원은 서기 3백53년 중국 동진(東晋)시대 절강성(浙江省)에서 명필 왕희지 등 당대의 학자들이 난정(蘭亭)이라 불리는 곡수(曲水)를 만들고 회동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흐르는 물을 따라 술잔을 돌리는 곡수의 풍습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 나라와 일본 등 동북아 3국에 널리 전해졌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극소수에 불과할 뿐입니다. 돌홈을 파서 만든 경주의 포석정에 비해 동진강 물을 끌어들였던 유상대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칠보8경에 꼽힐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했다고 하는데, 앞으로 복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어 맬 것입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유상대에서 정(情)이 이어지는 벗과 마주 앉아 술잔을 띄워 마음을 주고 받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져 옵니다.
통일신라시대 유상대가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진 지점에는 현재 감운정이라는 정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곁에 유상대의 내력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유상대유지비가 서 있어 유상곡수의 옛터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유상곡수는 풍류와 멋을 아는 선비들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곳이어서 머무르고 싶었지만 아쉬운 발길을 돌려 무성서원으로 달립니다.
Y형!
칠보 천을 건너가는데 맑은 시냇물이 가슴으로 흘러드는 듯한 느낌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겨울 냇물을 거슬러 오는 바람이 옷자락을 파고들기도 전에 우리는 무성서원에 도달하였습니다. 무성서원은 신라 말의 유현(儒賢)인 고운 최치원과 조선 중종 때 태인 현감이었던 신 잠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사액(賜額)을 받아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하게 되었습니다.
서원은 마을 안쪽에 다소곳이 서 있었는데 위풍이나 도도함 같은 기운은 다 벗어 던지고 그저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한 세도가(勢道家)가 두 눈을 부릅뜨고 윽박지르는 듯한 강력한 카리스마를 느꼈던 안동의 도산서원이 주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냥 늘 드나들던 친구의 집과 같은 편안함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아내는 곱게 칠한 단청(丹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해진 데서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최치원을 비롯하여 신 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 관 등을 모시고 있는 무성서원에는 세월 속에서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선비들의 올곧은 정신이 두껍게 쌓여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겨울 추위 속에서 고고한 모습으로 서 있는 송정(松亭)에 올랐습니다. 광해군의 폭정에 항거하며 미치광이의 모습으로 살아 '칠광(七狂)'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월봉(月峰) 김대립(金大立), 오무제(悟無齊), 김응윤(金應贇), 부휴 제(浮休齊) 김 감(金 堪), 호암(壺巖) 송치중(宋致中), 난곡(蘭谷) 송민고(宋民古), 천묵 (天黙) 이상형(李尙馨), 관산(觀山) 이 탁(李 倬) 등 7명의 선비들의 기개가 그대로 남아 있는 느낌입니다. 칠보면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송정에 걸터앉아 있으려니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빛이 바래가는 낡은 제품(題品)마다마다에 담겨 있는 선비 정신이 칠보천 맑은 물에 투영되어 보이는 듯합니다.
송정(松亭)에서 내려오니 필양사와 한정(閒亭)이 우리를 맞아 줍니다. 연이어 이어지는 정자(亭子)에 눈이 팔려 우리는 달리는 기분이나 즐거움은 어디론가 내다 버린 채 고즈넉하게 앉아 있는 정자와 사당 앞에 쌓여 있는 고요를 흩어 내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습니다. 산자락을 돌아 나오는 바람 소리 속에서 불우헌 정극인 선생의 노랫가락이라도 들릴 듯한 마음에 여기저기 눈길을 주며 몇 백년 묵은 향(香)을 서리서리 끌어 안아 봅니다. 문득 주름투성이인 느티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어달리는 그리움이 우리들을 힐끔거리고 있습니다.
" 마을 안쪽으로 들어 가면 불우헌 정극인 선생의 생활 근거지와 묘소, 사당(祠堂), 제각(祭閣) 등이 있어. 아마 거기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할 거여. 아 여그가 단종 임금의 비 정순왕후를 배출한 곳이라니까. 자, 봐봐. 이것이 퇴계 선생이 지은 시(詩)이고, 이것이 김인후 선생이 남긴 작품이라니까. 자랑스러운 곳이지."
조금 전에 한정(閒亭)에서 일견(一見)했던 김인후 선생의 싯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내려다 뵈는 풍광에 빠져 버린 심사를 노래한 작품이라는데 약간은 애절한 느낌이 감돌기도 하는 시입니다.
夢斷終南淸渭濱 종남산 위수빈은 꿈길에도 끊어지고
一軒高臥任閒身 정자에 높이 누워 한가함만 누리는가
機心盡處聞禽語 기심 다한 곳에 날짐승소리 들리고
俗客來時見柳嚬 속객(俗客)이 찾아드니 버들 빛이 찡그리네
칠보향토문화사료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생기 원장님이 모처럼 겨울에 찾아온 객을 그냥 보내는 것이 서운하다며 붙잡는 인정을 차마 떨치고 우리는 정극인 선생의 묘소를 향하여 마을 안 길을 따라 달려 들어갑니다. 마을은 참으로 조용합니다.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집안에서 가족과 둘러 앉아 정을 나누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의 겨울 풍경을 떠올려 봅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 칼바람 속에서 썰매타기나 연날리기에 빠져 놀다가 어머니가 내미는 고구마 두어 개로 배고픔을 달래었던 지난날들을 말입니다. 그러나 눈길이 닿는 집집마다 겉모습은 넉넉해 보이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궁기(窮氣)가 흐르고 있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불우헌의 묘소는 겨울 추위에 얼어붙은 오후의 햇살 속에서 짙은 고요에 쌓여 있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던 가객(歌客)으로서, 선비로서의 품위와 기세는 세월의 뒤쪽에 묻어 놓고 하나의 봉분과 두 개의 화표주(華表柱)로 남은 불우헌을 기리며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묵도(黙禱)를 올렸습니다. 그가 남긴 상춘곡(賞春曲)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데, 자연친화적이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어 불우헌 선생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 줍니다.
Y형!
불우헌이 노래한 칠보의 너른 들녘을 내려다 보기 위해 원촌마을을 빠져 나와 구절재로 향합니다. 구절재는 칠보 8경의 하나로서 구절재를 넘어 오는 봄바람이 칠보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평안함을 가져다 주는 모양입니다. 칠보면 소재지를 빠져 나와 구절재로 오르는 초입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칠보 수력발전소가 내려다 보입니다. 1925년 3월,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에서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사이로 6,215m 길이의 칠보터널을 뚫어 세운 발전소로서 유효 낙차가 136m에 이르고 있으며, 발전 용량은 28,800Kw에 달하고 있습니다. 발전을 하고 방류된 물은 김제시 광활면까지 관개(灌漑)되어 풍족한 호남의 들녘을 적셔 기름진 쌀을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Y형!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하나의 거대한 댐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댐이 높으면 높을수록 많은 물을 담을 수 있고, 가두어 놓은 물은 반드시 유익하게 사용되어지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많은 역량을 쌓아놓아야만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저장해 놓은 역량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할 것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무 것도 쌓아 놓은 것이 없어 남 앞에 나설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구절재는 제법 굽이를 높여 가고 있습니다. 고갯길을 오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오르막은 달려 올라갈 때는 힘들지만, 그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의 성취감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값어치를 가져다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딪쳐 그 난관을 극복해냈을 때, 삶은 고귀한 의미로 온 몸에 스며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굽이를 돌아 뒤돌아 보니 칠보의 들녘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참으로 아늑하고 정겨운 모습입니다. 이러한 정경(情景)을 보았기에 정극인은 상춘곡을 쓸 수 있었나 봅니다.
微吟緩步(미음완보)야 시냇의 호자 안자 明沙(명사) 조 믈에 잔 시어 부어 들 고, 淸流(청류) 굽어보니, 오니 桃花(도화)ㅣ로다. 武陵(무릉)이 갓갑도다. 져 이 긘 거인고.(중략) 功名(공명)도 날 우고, 富貴(부귀)도 날 우니, 淸風明月(청풍명월) 外(외)예 엇던 벗이 잇올고. 簞瓢陋巷(단표누항)에 흣튼 혜음 아니 . 아모타, 百年 行樂(백년행락)이 이만 엇지리. - 정극인, ‘상춘곡(賞春曲)’에서
나직이 시를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 시냇가에 혼자 앉아, 깨끗한 모래 위를 흐르는 맑 은 물에 잔 씻어 술을 부어 들고 맑은 물을 굽어보니 떠내려 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구 나. 무릉도원이 가깝도다. 아마도 저 들이 무릉도원인 것일까. (중략) 나는 공명도 꺼려 하고 부귀도 꺼려하니, 아름다운 자연 외에 어떤 벗이 있으리오. 비록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잡스러운 생각은 아니 하네. 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지내는 것이 이만하면 족하 지 않겠는가?
아직은 한겨울이지만 이내 다가올 봄날의 정경이 한 눈에 보이는 듯하지 않습니까? 불우헌은 이 곳을 가리켜 무릉도원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아마 저 아래 보이는 칠보천 맑은 물에서 탁료계변(濁醪溪邊)을 즐기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봄날의 정경에 흠뻑 젖어 오직 자연만을 사랑하는 연하고질(煙霞痼疾)의 기분을 온 하늘에 널어 놓고 있는 불우헌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눈에 잡힐 듯합니다.
Y형!
부귀공명(富貴功名)을 버리고 저 아래 들녘을 미음완보(微吟緩步)하고 있었을 불우헌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하는데 웬 일인지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욕심과 탐욕이 많은 인간의 마음으로서는 선뜻 버리기 어려운 것이 바로 부귀(富貴)요, 공명(功名)인 까닭입니다.
칠보 들녘을 가로질러 온 바람이 한 줄기 가슴을 파고 듭니다. 이제 저 바람의 안 쪽 어디쯤에 꽃피고 새우는 봄날의 이미지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저 건너 성황산 자락 무성서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선비들의 올곧은 정신 또한 봄날의 기운을 따라 다시 피어 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마라톤 기행을 준비해 나갈 것입니다. 힘날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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