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향기가 나는 사람
아침 달리기에 나섰다.
여섯 시가 다되어 가는데도 아직 어두움을 다 걷어 내지 못한 태양은 짙은 구름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한 여름의 하늘가를 맴도는 바람만이 삼천(三川)을 따라 달리는 많은 사람들의 옷깃을 붙들고 매달린다. 잔뜩 흐린 날씨가 아주 좋았다. 이 정도면 돌아올 때쯤엔 빗줄기를 세어가며 달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몇 번인가 이어지는 고개를 넘다보니 어느덧 10km를 달려 금구IC 입구에 도착했다. 반환점을 돌아서자 나를 맞아 준 것은 바람이었다. 금구 벌판을 건너와 나의 가슴을 마구 짓이기고는 휭하니 달아난다. 그 옛날 정여립이라는 분이 대동(大同)의 세상을 외치며 말을 달리던 벌판을 바라보며 그 분이 그토록 갈망했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하며 금구중학교 앞 내리막을 힘차게 내닫는데 빗방울이 아스팔트 여기저기에 부딪혀 자신의 꿈을 접는가 했더니 이내 앞을 가로막아 버리는 빗줄기, 빗줄기들.
양 허벅지를 어루만지는 빗줄기의 손길이 서늘하면서도 부드럽다고 느낄 즈음에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금천 저수지 앞 길가에서 비닐로 천막을 치고 복숭아를 팔고 있는 아저씨에게 물 한모금을 얻어 마셨다. 물바가지를 내미는 아저씨의 주름진 얼굴과 거북이 같은 손등을 나는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그 아저씨의 지난 세월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이 짐작이 되었다.
" 멋이 나온다고 그렇게 뛰어 댕겨? 비까지 오는디. 자네 저번 날도 뛰었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달리느냐? 수 없이 들어본 질문이었고 그럴 때마다 얼마나 현란하고 세련된 말로 그들의 질문을 눌러대었던가? 그러나 나는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길 한쪽에 '복숭아 판매'라고 써 놓은 삐뚤삐뚤한 글씨를 보면서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다행이 빗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서 아저씨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 고맙습니다. 아저씨 "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내민다.
" 밥도 안 먹었지? 가다가 먹게. 배고프면 죽어 "
아저씨에게서 복숭아의 달콤한 향기가 풍겨 났다. 그 복숭아를 결코 먹을 수가 없었다. 거기엔 그 아저씨의 땀과 인생이 모두 담겨 있었다. 한 손으로 겨우 쥐어지는 복숭아를 들고서 달리는 기분은 정말 묘했다. 서울마라톤 반환점에서 바나나를 들고 달리던 기분은 분명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이젠 빗기둥이라고 해도 될 만큼 굵어 져버린 비 속에서 그 아저씨와, 평생을 농사일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앞을 가렸다. 박물관 앞을 지나는데 두 명의 여학생이 나를 보고 히히득거린다. 쏟아지는 비 속에서 복숭아 하나를 들고 달리는 모습이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물이 뚝둑 떨어지는 몸으로 복숭아를 소중하게 들고 현관을 들어서는데 아내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다.
"왠 복숭아?"
"퇴근하고 금천 저수지로 복숭아 사러가지."
앞으로 얼마동안은 복숭아 향기 속에서 달려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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