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산은 웃고 있었다.
장안산!
눈에 덮힌 아름다움으로만 의식의 심층부에 남아있는 장안산 위에
이제 또 하나의 비옥(肥沃)한 시간들을 얹어 놓아야 한다.
초록색 향기따라 이어지는
장안리.
1992년 겨울 찢어질 듯 져며오는 아픔으로
자최눈 밟아가며 올랐던
그 휑한 마음도
정상에서 펼쳐지는 하얀 외침의 파노라마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는데...
무령고개 너머로 희미한 하늘금을 그으며 다가서던
지리산의 노래는
발목을 감싸버리는 눈발에 이내 스러져 버리고
장안산 정상에는 오직
하얀 눈발만이
점령군의 발길질을 해댈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보았었다.
자연은 인간의 얄팍한 마음을 어루만져
닦아줄 만큼의 두께를 가지고 있음을....
2003년 7월 27일
장안산은
아주 높은 톤으로 초록의 고요만 흘리고 있을 뿐
그 옛날 나의 아픈 기억을 하나도 기억하고 있지 않는 듯
슬몃하게 돌아 앉아 있었다.
장안산을 달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 난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
참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픔의 순간들을 다시 밟아보며
더 나은 삶을 조각하는 것도 큰 의의가 있다는 생각에
아내까지 동반하여
장안문화예술촌 마당에 들어 서고 말았다.
지독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달리지 못했던 까닭에
번호표를 다는 나의 손은 사뭇 떨리고 있었다.
대회를 주최한 장수군청과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장수논개마라톤클럽의 세심한 배려와 준비가 여기저기에서 묻어난다.
500여명의 참가자들도
여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어느 대회나
사전에 몸을 풀어야 한다며 운동장을 달리는 참가자들로 인해
혼란스러움에 빠져야 했는데
오늘은 모두들 느긋한 마음으로
마라톤이 가져다 주는 은근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늘 그렇듯이 대회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주최측의 준비상황과
진행요원들의 친절도 등을 점검(?)하여 보았다.
만점까지는 아니지만
준비하신 분들이 정말 많은 정성과 마라톤 사랑을 모았다는 것을
온새미로 느낄 수가 있었다.
육종순 논개클럽 회장님의 개회선언과
정세균의원, 장재영 장수군수님의 짧은 인사말에 이어
류종영 전주마라톤클럽 훈련코치의 지도로 스트레칭이 어어지는 동안
누구도 거스름이 없이
흐름에 따라간다.
정말 조용한 마라톤대회다.
느긋하고 조용한 마라톤대회였지만
출발은 언제나 가슴이 설레인다.
조금도 급할 것이 없는 나는 뒤쪽에 서서 출발했다.
맨 후미 그룹에서 달리는 기분은 온통 여유뿐이었다.
경찰차의 보호를 받으며
앞에서 힘껏 달려 나가는 참가자들을 보며
박춘익, 이복선 그리고 아내와 같이서
달린다.
초록빛 짙은 산자락에 비치는 아내의 주황색 옷이 선명하다.
선두는 벌써 오른쪽으로 돌아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고 있다.
흐릿한 날씨에 햇볕은 가려졌지만
기온은 이미 상승하고 있어
우리가 고갯길을 중간쯤 올라갔을 때는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아내와 이복선님은 서서히 발걸음을 빨리하며
멀어져 간다.
오늘은 부상이 회복되고 나서 처음으로 나서는 대회이고
또 박춘익씨와 동반주를 하기로 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어서
아내더러 잘 달리라고 한 마디하고
서서히 오르막을 디디는 발길에
힘을 주었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는 춘익씨는
오르막에서 힘들어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오르막을 오르는데
문득 그 옛날의 아픔이 꼬리를 문다.
사람 사는데 어디 아픔이 따르지 않으리요만
그해 내게 닥친 아픔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도 3년씩 이어져 버린
그 극심한 눈물나는 역경의 세월
그러나
세월은 아픈 상처를 가시게 하였고
나는 오늘 장안산을 달리며
그 아픔을 더듬어 흘리는 땀방울로 씻어내고 있는 것이다.
옆에서 달리고 있는 춘익씨가 내 속을 들여다 보는 것같기도 하여
가끔씩 고개를 돌려
흐르는 눈물을 씻었지만
어디 그 친구가 내 눈에서 흐르는 것이 눈물인 것을 알기나 했으랴.
그저 흘러내리는 땀방울인 줄 알았겠지.
내리막이 시작된다.
한 모금을 물을 마시고 나자
춘익씨는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어디서 저런 스피드가 나온단 말인가
오르막 내내 붙잡던 복통은 어디로 내 던져버렸다는 말인가
이제 누가 누구와 더불어 동반주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다만 약간씩 패인 도로에서
발을 잘못 디뎌서는 안된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을 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인가?
주머니에 돈이 좀 있으면 거드름을 피우며
잘 놀고 잘 먹을 일만 찾아 다니다가
무일푼이 되었을 때 전전긍긍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이란 말인가
눈물이고
아픔이고
다 내던져 버리고
이제는 오직 다치지 않는 것에만
온 신경을 모아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슴이 터지도록 호젓한 산길을 달려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급수지점을 지나면서
춘익씨에게 전력질주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우리는 힘껏 달렸다.
우리를 따라 흐르는 시냇물에서
피어나는 시원한 노랫가락은
옛날의 상처를 어루만져 씻어 주었고
가슴에 하나 가득
희망과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움들을 담아 주고 있었다.
하늘에
찬란한 무지개를 피어 올랐다.
가시밭길을 헤치고 떠오르는
무지개
그것은 절대 환영(幻影)이 아니었다.
아픔 속에서 일어서는
삶에 대한 기대감이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한 힘찬 도약이었다.
마라톤은
언제나 힘을 가져다 준다.
마라톤은
늘
아름다운 생각 속으로만 이끌어 준다.
장안산의 너른 품에 안겨
되돌아 본 세월은
아픔과 어둠의 옷을 벗어리고
환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부상으로 인해
통한의 눈물만 흘리고 있다가
가슴이 떨리는 전율을 맡보며 달았던
배번호(1146)가 앞가슴에서
힘차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힘나는 날을 위하여.
2003.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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