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일 여순 감옥 - 러시아 거리 - 텐진가(2014년 5월 4일 일요일)
TIP 여순 감옥가는 방법
대련역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지하도를 통과하면 넓은 광장이 있다. 이곳은 站北廣場이다. 광장 왼쪽에 장거리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뒤로 경전철 역이 있다.(이 경전철은 금석탄으로 가는 전철을 탈 때도 이용해야 한다.) 정면으로는 광장 너머로 커다란 건물이 가로막고 있는데 한국복장성이라고 써 있다. 그 앞에 파란색 컨테이너가 있는 데 이곳이 여순행 매표소다. 뒤에서 사진을 보면서 설명하겠다.
대련에서 둘째날이 밝았다. 일어난 시각은 6시이다. 바람이 엄청 분다. 아내더러 숙소 뒤로 보이는 아동공원 산책을 가자고 했더니 안가겠다고 한다. 혼자서 나섰다. 숙소에서 나와 五五路로 나가서 五五路를 따라가니 아동공원 남쪽 입구이다. 많은 분들이 조깅을 하고 있다.조깅하는 사람들을 거슬러 슬슬 걷는다. 어떤 분들은 춤을 추기도 하고 무술 연습을 하기도 한다. 아침 바람이 상큼하기는 하지만 대하게 불어 온다. 나무에 등을 부딪치고 있는 할머니,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 현란한 칼춤을 선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을 애완견과 함께 무표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있는 노부부, 억세게 담배를 피워대는아저씨, 제기차기를 하고 있는 젊은 부부,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청소하고 있는 여자 분 등. 우리나라 공원의 아침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가볍게 몸을 풀면서 공원을 한 바퀴 돌고 공원 북문으로 나와 명제로를 따라 숙소로 돌아간다.
아동공원 주변 지도와 아동공원 산책 코스
숙소에서 바라본 아동공원
숙소에서 바라본 五五路 방향. 정면에 높게 보이는 건물은 花樣年華 3期이다.
숙소에서 바라본 아동공원 방향. 사진의 왼쪽 아래 구석이 아동공원이다.
숙소에서 본 맥도날드 방향. 보이는 길이 保定街이고 하얀 간판이 붙어 있는 곳이 맥도날드이다.
숙소앞을 지나는 길이 杏林街이다. 숙소에서 나와 왼쪽으로 가면 五五路이다. 왼쪽 전봇대가 있는 곳이 화양연화 3기이고 오른쪽 노란색 간판이 "대만우육탕"집이다.
대만 우육탕. 24시간 영업한다고 되어 있는데 아침에 가보니 문을 열지 않은 것같았다.
대만우육탕 맞은편에 있는 화양년화 3기 1층에 있는 만두 가게 어탕포. 먹어 보고 싶었으나 가볼 기회가 없었다.
오오로를 따라다가 만난 서양식 건물.. 이곳에서 길을 건너면 아동공원 입구이다.
아동공원에서 바라본 숙소가운데 맨 앞에 있는 건물이다. 30층 건물인데 별로 높게 보이지 않는다.
아동공원 북쪽 방향
아동공원에서 바라본 숙소(왼쪽) 오른쪽 은 화양년화 3기이다. 3기는 우리말로 3차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우리 숙소는 화양년화 2차가 된다. 화양년화는 1,2,3,4차가 있다.
아동공원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 중국 사람들은 공원에서 춤추는 일이 생활화 된듯하다.
이분은 도복까지 갖춰 입고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 폼은 이래도 우리나라 태권도 같은 절도 있는 행동이 아니라 춤추듯한 부드러운 동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리 숙소 1층. 노란색 간판은 수퍼이다. 규모가 아주 작은 곳이다. 중국어로 超市는 우리말로 수퍼를 가리킨다.
아동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와 아이들과 준비하여 숙소를 나섰다. 숙소 앞 길인 행림가에 서 있으니 택시가 빈번하게 지나간다. 한 대를 잡아 타고 대련역으로 갔다. 택시비는 10위안이다.택시를 내린 곳은 텐진가 입구를 지나 대련역 앞 승리광장 이다. 정면으로 대련역이 보인다. 역 앞 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대련역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가니 인터넷에서 찾아본 것처럼 사람들이 몰려 가는 지하도가 있다. 우리도 지하도로 들어간다. 지하도 입구에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다. 지하도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식당이 몇 개 있다. 그중에 한 곳(泰和小吃)으로 들어가 아침 식사를 하였다. 만두, 볶음면 등을 판다. 종업들이 밥을 먹으면서 서빙을 하고 있다. 식사비는 55위안이다. 다음날 다른 곳에서 먹은 식사보다 비싸고 안좋았다. 대련역 북쪽 광장에서 식사를 한다면 이곳에 있는 식당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아래 지도의 녹색표시한 亞惠美食을 추천한다.
대련역 주변 지도
택시에서 내려 바라본 대련역. 지하도는 사진 속의 아저씨가 바라보는 방향이다. 중국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이렇게 내가 바라보아야 할 방향을 나를 대신해서 봐라봐주고 있지 않은가. 사진 왼쪽 상단의 버스들이 서 있는 쪽이 지하도 입구이다.
지하도 입구. 양쪽으로 상가들이 이어져 있고, 노점상들도 있 여행할 때에는 역이나 버스 터미널 주변은 빨리 빠져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소지품에 극도로 신경을 쓰면서 말이다.
지하도를 건너가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오른쪽 파란 간판이 우리가 식사한 곳이다. 위 지도에서 말한 아해미식은 왼쪽 하얀 간판(건설가 장거리 버스 터미널)이 있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깨끗한 식당이 있는 곳이다. 사진 중앙의 벽처럼 보이는 건물이 한국 복장성(거대한 시장)이다.
泰和小吃 식당의 만두. 첫날 멋 모르고 먹었지만 추천하고 싶지 않다.
지하도를 빠져나오면 이렇게 VIEW가 펼쳐진다. 금석탄 1일 여행객을 모집하고 있는 삐끼들 뒤로 한국 복장성 건물이 보인다.
이것은 경전철 역이다.
천성미식장이라고 써 있는 이 건물은 지하도를 빠져 나오기만 하면 눈 앞을 가로 막는다. 가운데 분홍색 입구 앞에 있는 파란 지붕이 여순 버스 매표소다. 그리고 늘어서 있는 파란 버스가 여순가는 버스이다. 저 건물은 1층은 건어물, 2층은 옷가게이다.
매표소를 가까이서 본 모습. 여순 버스 타려고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과 매표소
버스비는 7위안, 보험이 1위안이라고 써 있다. 보험은 선택사항이다. 우리는 갈 때는 보험을 샀고, 올때는 안 샀다.
매표소에서 바라본 경전철 역과 지하도
TIP 이 장소에서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가? 매표소 건너편 한국 복장성 건물(분홍색 간판이 있는 곳)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보면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이 있다. 이걸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화장싱 안내표시가 되어 있다.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갔을 때 대략 왼쪽 대각선 방향에 화장실이 있다. 또 하나 매표소 뒤에 있는 잔디 광장을 보면 지하도(대련역 왼쪽 지하도가 아니다)가 있다. 그 지하도로 들어가면 화장실이 있다. 지하 광장 화장실이 조금 더 깨끗하다.
여순행 버스. 일정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차면 출발이다.자리가 없으면 기다렸다가 다음 차를 타면 된다.
여순행 버스 표
보험 증표. 보험은 선택이므로 7위안만 내면 버스표를 살 수 있다.
여순으로 가다가 본 학교 풍경.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행진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월요일마다 이런 시간이 있었는데 군사문화라며 없앴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런 것이 단체 활동이나 질서 교육이 아니었을까.
여순으로 가면서 중간에 흑석탄이라는 정류장을 들렀다가 간다.
여순 터미널. 버스는 터미널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내려준다.
TIP 여순터미널에서 여순 감옥으로 가는 방법
인터넷에서 확인한 바로는 터미널 직전에 쉬는 중심광장에서 하차하여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된다(요금 1위안)고 했는데 여순 터미널에 내리면 택시가 줄지어 서 있다. 여기에서 여순 감옥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므로 기사들이 대충 알아 듣는다. 좋은 방법은 아래 사진을 폰에 저장하여 보여주면 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 사람과 다름 없이 중국어를 구사하는 딸 덕분에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 여행을 할 때는 간체자로 된 정확한 명칭과 목적지의 전화번호를 알고 가서 기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기사가 중국어를 못 읽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참고할 일이다. 이곳에서 여순 감옥까지 택시비는 8위안이다. 사실 걸어가도 될만한 거리였다.
TIP 여순 터미널에서 여순 감옥 걸어가는 방법
여순 터미널에서 하차하여 여순 터미널을 바라보고 터미널 건물 오른쪽으로 가면 지하도가 보인다. 그 지하도를 건너가면 만나는 길이 지도상의 백운로이다. 백운로를 따라 걸어가다가 만나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여순 감옥이다. 여순 감옥 부근은 차량 통행도 많지 않은 한적한 곳이다.
여순 터미널 지하도 쪽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의 나무가 있는 곳에 파란 버스가 있는 곳이 대련에서 온 버스 하차장이다. 버스 터미널 건물을 오른쪽에 끼고 건물 끝까지 걸어오면 된다. 이곳에서 좌측을 보면 이렇게 지하도가 보인다. 이 지하도(지도상의 초록 네모표지)를 통과하면 백운로이고 백운로에서 좌회전하여 걸으면 향양가(向陽街)이다. 거기에서 우회전 하면 여순 감옥이다. 우리는 돌아올 때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지하도 앞에 내려주고 걸어가라고 해서 지하도를 건너오니 터미널이었다. 택시 탄 시간을 계산해 보니 정말 짧은 거리였다.
여순 터미널 옆의 지하 통로. 이곳을 이용하면 여순감옥을 걸어가도 될만한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순 감옥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게 된 후 1907년 현재 형태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총 면적은 약 26,000㎡로, 275개의 여러 형태 감방이 있으며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형무소는 담장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색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15개의 공장 등이 있고 담장 밖에는 강제노동소인 벽돌 공장과 과수원, 채마밭 등이 있었다. 건물의 외형은 큰대(大)자 형으로 방사형 구조이다.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마다 복도를 따라 감방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으며 복도 중간부분에는 간수들의 감시 및 투광, 상하층의 공기소통 역할을 하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고,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이곳에 수감하였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안에서 처형당했다.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곳은 1909년 러시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수감되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하였다.
1945년 8월 소련 붉은 군대가 뤼순에 주둔하면서 사용이 중지되었고, 그후 1971년 복원을 통해 전시관으로 꾸며져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988년 중국 정부는 이곳을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였다
- 네이버 <두산 백과사전>에서 인용
안중근(安重根)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태훈(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다음 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契 :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郎)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언도 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
여순 감옥의 정확한 명칭은 여순일아감옥 구지 박물관(旅順日俄監獄 舊址 博物館)이다. 택시에서 내리면 이런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건물 중앙의 문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문이고 출입구는 건물 오른쪽에 있다.
여순 감옥 출입구. 보안검사 통로라고 써 있는 곳이 출입구이다. 들어갈 때 가방을 엑스레이 투시로 검사한다. 입장료는 없다.
한국어 안내판이 있다는 것은 이곳이 한국인 관광지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도 단체로 관람을 하는 것을 보았다.
보안검사를 하고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안내표지가 있다. 이 사진은 왼쪽을 바라본 모습인데 중국 해군들이 단체로 관람을 하고 나가는 모습이다. 관람을 다하고 나서 우리도 이 군인들처럼 이곳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검신실. 죄수들은 이곳에서 매일 아침 일을 나갈 때 옷을 다 벗고 신체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안중긍 의사가 갇혀 있던 감옥. 그는 특별히 교도소장의 방 옆에 있는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노란 표지가 붙어 있는 곳이 안의사가 감금되어 있던 방이고 정면으로 문이 보이는 곳이 교도소장의 방이다.
안의사의 방. 책상만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안의사가 쓰던 침대. 햇빛도 잘 들고 방의 크기도 넓었다.
안의사가 감금되어 있던 방에 붙어 있는 안내판
안의사가 갇혀 있던 방 뒤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 혹시 안의사도 이곳으로 끌려 다지지 않았을까
수인들이 차고 다녔다는 족쇄
당시 사용하던 고문기구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고문실
감옥의 내부
우리의 역사학자인 신채호와 이회영도 이곳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감방 문의 잠금장치
이곳에는 중국인들도 많이 수감되어 있었기에 중국 사람들도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수감된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했던 기계. 일제의 각종 문서를 인쇄하던 시설이다.
여순 감옥의 뒷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수감자들이 고통을 받았을까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의무실.
당시 사용했다는 의료기기
당시 근무했던 의사들의 참회의 증언. 이곳에서는 환자를 치료하기보다는 의료 실험을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항일 투사들의 교수형을 집행했던 곳. 여순 감옥의 한쪽 구석에 있다. 안의사는 이곳이 니라 다른 곳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사형장 내부.
사형당한 분들의 시신을 이렇게 통에 담아 처리했다고 한다.
바깥에서 본 사형장 건물. 사진에서 보듯 2층에서 사형에 처하고 시신이 아래층으로 떨어지면 이 문으로 들어가 시신을 처래했다고 한다.
이곳은 처형당한 투사들의 시신을 매몰했던 실제 장소라고 한다. 보존을 위해 건물을 지어 놓았다.
실제 발굴된 시신들이다.
전시된 무기들.
이곳은 전시실이기는 한데 기념품들을 파는 목적이 더 큰 것 같았다.
여순 감옥에 설립된 우리 항일 투사들 기념관. 우리나라 투사들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놀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한국 광복회에서 설립해 놓은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자료이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이 사용했다는 맷돌
전시실 내부
이곳에는 최흥식과 유상근의사에 대한 내용도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 광복회에서 후원하여 설립한 전시관이다.
위의 투사들의 자료를 전시한 전시관 건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이다.
안의사가 순국한 곳에 게시되어있는 내용들
안의사가 순국한 교수대. 안의사는 일반 수감자들을 처형한 곳이 아닌 별도의 곳에서 처형을 당했다.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남긴 글들이 전시되어 있다. 복제본을 팔기도 한다.
안의사 기념관을 마지막으로 처음에 들어왔던 출입구쪽으로 나왔다.
감옥의 높은 담
중국에서는 이곳을 중요 관광지로 지정하고 있다.
참관 안내도. 처음에 보안검사를 통과하고 나서 화살표대로 따라가면 된다.
관광객들이 거의 없어서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여순 감옥을 돌아 봤다. 인테넷 자료에서는 입장료가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전혀 받지 않았다. 관람을 하고 있는데 한 떼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약간 걸음을 빨리하여 돌아봤는데 나라를 위해 순국한 애국 투사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숙연해졌다. 이러한 분들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우리나라는 대체 어떻게 된 나라인지 부끄럽다.
여순 터미널로 돌아가기 위해 정문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기본료는 대련과 달리 8위안이다. 택시를 타고 터미날로 가자고 하니 잠깐 이동하더니 내리란다. 아무래도 터미널이 아닌 것 같아 드리가 물어보니 터널을 가리키면서 그곳으로 나가면 터미널이라고 가르쳐 준다. 터널을 통과해 보니 우리가 내렸던 여순 터미널 반대쪽이다.
택시에 기본요금 8위안이라고 써 있다.
우리가 지나온 터널이 보인다.
터미널 앞 풍경. 사진에 보이는 계단 뒤쪽이 대련에서 타고온 버스를 내린 곳이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조금 가면 중심광장이다. 중심광장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군항공원이다.
여순 터미널의 모습. 파란색 버스가 서 있는 곳이 처음에 버스를 내렸던 곳이다.
중심광장에 있는 음식점.
요리를 보고 선택하면 되니까 주문에 별 어려움은 없다.
우리는 볶음밥, 우육면, 볶음 우동을 시켰다. 모두 합해 39위안
식당에서 나와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마시며 찍은 사진 중심 광장에는 경찰 버스가 서 있었다. 군항공원은 이 사진의 왼쪽으로 이어지는 큰 도로를 따르면 된다.
군항공원 방향. 산위에 보이는 탑은 백옥산이다. 유명한 곳인데 올라가지는 않았다.
중심공원서 본 터미널 방향. 사진의 끝부분이 터미널이다. 걸어서 5분 정도 걸린다.
군항공원으로 가다가 만난 우의 공원
우의 공원 풍경들
우의 공원을 지나서 백옥산으로 올라가는 길. 백옥산은 터미널 에서 오르는 길이 있고 커다란 교통 표지판이 있다.
군항공원. 입장료를 10위안씩 받는다. 바다를 바라본다는 것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이곳에 해군 기지가 있는 것 같았다.
군항공원에 있는 동상
군항공원의 "여순구"표지
군항공원에 전시된 무기들
다시 돌아온 중심광장. 군항공원에서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탔다. 기본 요금이다.
여순 터미널 내부. 표를 사고 오른쪽에 보이는 4번 탑승구에서 타면 된다. 드리가 표를 사는 동안 우리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 표를 사서 기다리고 있는데 제복을 입은 남자분이 와서 드리에게 뭐라고 말한다. 표를 사고 10위안을 덜 거슬러 받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표를 파는 분이 돌려 주라고 해서 돌려 주는 거라고 한다. 참 친절한 사람이다. 중국 사람들이 이런 면도 있다며 한참 웃었다.
4번 탑승구. 대련 북로 도달 쾌객(쪽길을 이용하여 대련으로 돌아가는 직통버스라는 의미)이라고 써 있다. 이 버스는 여순으로 올 때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통해서 대련으로 간다. 자세히 보니 대련 공항 부근을 지나서 아침에 승차했던 대련역 북쪽 광장으로 갔다. 대련역 북쪽 광장을 말하는 站北廣場이라고 써 있다.
대련으로 돌아오는 버스 내부
아주 좁은 시장을 통과해서 돌아왔다.
여순에서 돌아올 때는 다른 곳에서 내려준다. 그러나 잘 보면 우리가 탔던 곳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이다. 버스 진행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아침에 여순행 버스를 승차한 곳이다.
한국 복장성 건물 옆에 아주 후진 시장이 있다.
이제 슬슬 걸어서 시장으로 간다.
시장은 어느나라나 먹을 것이 많다. 계란빵인데 맛있어 보여서 사먹었는데 그저 그런 맛이었다.
개고기를 파는 곳도 있다.
한국 복장성 건물 1층으로 들어갔는데 1층은 건어물을 파는 곳이다. 이곳에서 해바라기씨 5근에 80위안에 샀다. 엄청 싼 가격이다.
한국복장성 건물이 문을 닫아서 앞에 보이는 정문(빨간색 부분)으로 나오지 못하고 시장에 있는 문으로 나와서 돌아왔다.
대련역 지하도로 오면서 보니 여순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는 중국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지하도를 건너기 위해 가다가 본 삼륜차. 예전에 우리나라도 삼륜차가 있었다. 무리나라는 트럭만 있었는데 중국은 승용차가 삼륜차이다.
우리는 모르고 지하도를 건너 대련 역으로 간 다음 러시아 거리로 걸어갔는데 러시아 거리는 이곳 북광장에서 바로 가면 아주 가깝다. 사진에 붉을 글씨가 써 있는 곳에 있는 도로를 따라 가면 바로 러시아 거리로 이어진다. 아래 거리에서 우리가 간 길은 초록색인데 빨간색과 비교해 보라.
러시아 거리에서 천진가로 갈 때에도 보라색으로 표시한 상해로를 따르면 쉽게 갈 수 있다. 불과 10분이 채 안 걸린다. 상해로에서 천진가로 들어가는 곳에 "천진가'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다시 지하도를 건너 아침에 택시에서 내렸던 대련역 앞으로 나간다. 지하도를 빠져 나가 대련역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러시아 거리로 갔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 추위를 느꼈다.
다리가 있지만 이것은 기찻길이다. 이제부터 러시아 거리가 이어진다. 대략 400미터 정도 이다.
러시아 거리
러시아 인형이라고 하는데 별로 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러시아 초콜릿이라고 파는데 인터넷에서 본대로 아예 사먹지 않았다.
저녁무렵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거리에 늘어선 러시아 풍의 건물은 멋있어 보였다. 중국 제 71중학교 학생들이 하교를 하고 있다. 중국은 교복이 트레이닝복이다.
대련시 71중학교 모습. 중국은 학교 이름이 숫자로 되어 있다. 들은 말에 의하면 번호가 낮을수록 좋은 학교라고 한다. 중극은 중학교라고 해도 고등학교를 말하기도 한다.
위의 지도에 표기한 상해로와 천진가가 만나는 곳에 이렇게 표시가 되어 있다.
천진가의 모습. 높이 보이는 건물이 신세계 백화점이다.
신세계 백화점. 그 뒤로 보이는 낮은 건물 지하에서 아주 좋은 해물 샤브샤브 식당을 발견했다. 천진가에 간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천진가. 날씨가 추워서 사진도 흔들렸다.
생선 샤브샤브 식당이 있는 건물. 이름은 모르겠고 신세계 백화전 바로 옆에 있다.
식당이 있는 건물을 등지고 바라본 거리. 오른쪽 KFC가 있는 건물이 신세계 백화점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본 지하 식당가
바로 그 식당. 사람이 많아서 저렇게 접수를 하고 20분 이상 기다렸다. 주변에 식당이 많지만 꼭 기다려서 먹을 일이다. 뷔폐식이므로 무한리필이고 1인 68위안이다.
이아가씨에게 접수해야 한다. 평일 점심은 59위안, 저녁은 69위안이고 주말에는 무조건 69위안이라고 써 있다.
이 집의 특징은 개인별 전기렌지를 설치해 놓았고, 육수를 준비해 준다. 나머지는 모두 자기들이 무제한으로 가져다 먹으면 된다. 냉동된 것도 있지만 신선한 것도 많다.
천진가에서 숙소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고 했으나 쉽지 않아 슬슬 걸어가로 했는데 방향을 모겠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우호광장의 대형 볼여서 바로 방향을 잡았다.
우호광장으로 가다가 본 간판. 글씨가 좋아서 찍었다.
우호광장의 대형 볼. 이것을 보고 방향을 판단할 수 있었다.
우호광장. 이곳에서 중산광장은 5 - 600미터. 중산광장에서 숙소가 있는 3.8광장은 1km이다.
중산광장 방향
천진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바로 옆에 있는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샀다. 택시를 타고 가려는 마음이었으나 택시를 잡지 못하여 아들 배낭에 넣고도 모자라 손에 들고 가는데 아들녀석이 힘들어 한다. 그래도 자기가 먹을 것이라 좋다고 들고 간다.
2014년 5월 4일 힘날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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