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산행기

13. 설국(雪國)의 잔치 - 입암산 산행기

힘날세상 2014. 3. 20. 13:32

13. 설국(雪國)의 잔치 - 입암산 산행기

 
 

 

 

1. 일자 : 2009년 01월 10일 (토)

2. 동행 : 아내

3. 산행코스 : 남창 계곡 주차장(12:40) - 산성 갈림길(13:15) - 능선(13:55) - 갓바위(14:25) - 북문(14:45) -

                   남문(15:05) - 주차장(15:40)

4. 산행시간 :3시간 00분

 

 

1. 서설(瑞雪)을 밟아

 

 

눈 속으로 걷는 길에서

나를 잊는다.

 

 

 

세월도 잊는다.

무념무상인지

무위자연인지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다.

그저

눈발을 뒤집어 쓰며

눈사람이 된다.

내리는 눈은

온 산을 덮고

온 누리를 덮고

나를 덮고

우리를 덮는다.

 


 


 

 

눈 속에서

눈이 되고 싶었다.

 


 


 

 

 

문득 정호승님의 시구절이 떠오른다.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 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에서

 

 

 

2. 눈 덮인 능선에서

 


 



 



 



 


 

 


 

 

 

은선골을 따라 올라

능선에 서면

언제나 나를 맞이하는 것은 “탐방로 아님”.

길은 열려 있건만

무서운 얼굴로

가로막는 것은

팻말 하나.

넘어서고 싶은 마음 하나.

‘탐방로 아님이라 써 있는 것은 길이 있다.’뜻이라던데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길에

등돌리고

돌아서는 발길 하나.

 


 



 


 

 

아아,

모든 길을 막혀 있다.

퍼붓는 눈이 아니더라도

무서운 얼굴로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능선은 힘을 잃는다.

 

 

 

3. 갓바위에서

 

 


 

 

그래도 꼭대기라고

한 때는 파수(把守)를 하던 병사들이

창검을 세우고 서 있던 꼭대기라고

바람을 끌어안아

상고대를 피워내는

갓바위에 서서

세상을 품으로 하지만

바람 속에서

눈꽃이 되고 말았다.

그래, 꼭대기에는 바람이 불어야지.

꼭대기에는

눈꽃이 피어야지.

신선의 이야기를 들어야지.

 


 



 


 



 


 
 

 

갓바위에서

혼탁한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흰머리를 곧추 세운

입암산을 따라

하나의 나무가 되어갈 뿐이다.

정맥 마루금을 걷던 일도

천왕봉의 일망무제도 잊고

그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눈보라 속에서

환호성이나 지르는

눈사람이 되어갈 뿐이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대로 설국(雪國) 잔치를 즐기고 있는 까닭이다.

 

 

 

4. 입암산성을 걸으며

 


 




 


 

 

북문터에서

산성으로 들어서면

창검으로 서 있는 나무들

흰 옷 입은 병사가 되어

윤진(尹珍) 장군을 따라 목숨을 버린다.

왜놈들을 껴안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장렬히 전사하건만

나는

언제나 입암산성에서 즐기기만 한다.

 


 



 


 

돌 틈으로 스며든

역사의 핏방울을 뭉개고 앉아

라면이나 끓이고 있다.

남문 성벽에서

사진이나 찍고 있을 뿐

한 번도

이름 모를 병사들의 피맺힌 사설을 듣지 못한다.

나뭇가지에 피어난

설화(雪花)가

남편과 자식을 전선에 보내놓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눈물로 세월을 살아간 아녀자들의

한 맺힌 절규였다는 것을

가슴 터지는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지금 내리는 눈발이

소담스럽고

후박하여

가슴에 담아두고 싶을 뿐이다.

 


 



 


 


 

 

5. 눈길을 걸으며

 


 

골짜기를 따라

가득 덮인 눈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흐르는 물줄기는

영산강의 몸통이 될 때까지

자신을 감추고 근력을 키우는데

세상을 뒤덮은 눈송이에

발에 밟히는 부드러운 감촉에

한 가닥의 생각도 이어가지 못하고

한 움큼의 그리움도

다독이지 못한 체

눈길만 걷는다.

 

 

 

 

 

 

 

입암산에서

피로 물든 역사를 생각하지도 못하고도

갓바위에서

호남의 너른 들녘을 보지 못하고서도

온 산을 덮은 눈만 좋았다.

온 세상을 덮은 눈이 아름답다고 좋아만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 입암산에서 폭설을 맞다.

  2009. 01.10

 

 

 

'오래된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 통영 미륵산(458m) 산행기  (0) 2014.03.20
11. 경남 고성 연화산 산행기  (0) 2014.03.20
10. 제천 금수산 산행기  (0) 2014.03.20
9. 도락산(964m) 산행기  (0) 2014.03.20
8. 선운산 산행기  (0) 2014.03.20